백석 시인님의 시 '오금덩이라는 곳'을 만납니다. 귀신과 거머리와 여우와 소통하며 자연과 더불어 아름답게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함께 읽으며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백석 시 '오금덩이라는 곳' 읽기
오금덩이라는 곳
백석(1912~1995, 평북 정주)
어스름저녁 국수당 돌각담의 수무나무 가지에 녀귀의 탱을 걸고 나물매 갖후어놓고 비난수를 하는 젊은 새악시들
- 잘 먹고 가라 서리서리 물러가라 네 소원 풀었으니 다시 침노 말아라
벌개눞역에서 바리깨를 뚜드리는 쇠ㅅ소리가 나면
누가 눈을 앓어서 부증이 나서 찰거마리를 불으는 것이다
마을에서는 피성한 눈숡에 절인 팔다리에 거마리를 붗인다
여우가 우는 밤이면
잠 없는 노친네들은 일어나 팟을 깔이며 방요를 한다
여우가 주둥이를 향하고 우는 집에서는 다음날 으레히 흉사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무서운 말인가
▷백석 시집 「사슴」(1936년 오리지널 디자인, 도서출판 소와다리, 2016년) 중에서
2. 서낭당에서 '비난수'하는 의미는 무얼까요?
이 시의 제목은 원래 '오금덩이라는 곧'인데, 현대어로 '오금덩이라는 곳'으로 새깁니다.
위의 시 본문은 '독서목욕'이 띄어쓰기만 조정한 원문 그대로입니다.
'오금덩이'는 어떤 곳의 지명(地名)이네요.
'오금'은 무릎의 구부러지는 오목한 안쪽 부분을 말합니다. '오금이 저리다'라는 말이 떠오르네요.
'덩이'는 무얼까요? 덩어리진 곳이란 뜻일까요?
그렇게 생각하니 '오금덩이'라는 지명에서 오금처럼 오목한 지형에 사람들이 서로 가까이 덩어리져 다정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보이는 것만 같네요.
시의 제목을 왜 '오금덩이라는 곳'이라고 했을까요? '오금덩이'라고 해도 될 텐데요.
'오금덩이라는 곳'이라는 말에는 '오금덩이'라는 지명을 곰곰 생각해 달라는 시인님의 눈짓이 담겨있는 것 같네요.
깊고 외진 산골 마을 '오금덩이'라는 곳을 주목해 주세요,라는 시인님의 당부 말입니다.
1936년에 발표된 시입니다.
문명세계와는 멀리 떨어진 깊고 외진 산골, '오금덩이라는 곳'에서는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요?
'어스름저녁 국수당 돌각담의 수무나무 가지에 녀귀의 탱을 걸고 나물매 갖후어놓고 비난수를 하는 젊은 새악시들'
예전에 시골마을에서 이런 풍경은 흔했습니다. 지금은 잘 볼 수 없지만요.
'국수당'은 마을을 지켜주는 서낭신을 모신 집(국사당), 서낭당 또는 성황당을 말합니다.
그 서낭당의 당나무인 수무나무(시무나무) 가지에 귀신(녀귀)의 탱화를 걸어놓고 빌고 있네요. 새색시들이요.
'나물매', 제상에 올리는 나물과 밥을 갖추어(갖후어) 놓고요.
'비난수'는 귀신에게 비는 소리를 말합니다.
귀신에게 어떻게 말하며 빌었을까요?
'잘 먹고 가라 서리서리 물러가라 네 소원 풀었으니 다시 침노 말아라'
'서리서리'는 연기 따위가 자욱하게 올라가는 모양을 뜻합니다.
'나물매' 잘 먹고 연기처럼 물러가라고 당부하네요.
다시 오지 말라고 당부하는 걸 보니 '녀귀'는 해를 끼치는 귀신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겠습니다.
'잘 먹고 가라', 이렇게 따뜻하게 대접하고요, '물러가라' '침노 말아라', 이렇게 단호하게 명령하네요.
오늘날 우리에게는 이처럼 사람이 귀신과 소통하는 '비난수' 풍경이 낯설게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네 조상들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영적(靈的)인 세계와 이처럼 끊임없이 교감하면서 살아왔습니다.
마을 수호신을 모시는 서낭당을 마을마다 짓고 거기에 서낭신이 하늘로 오르내리는 당나무를 심고 그 나무에 대고 크고 작은 소원을 빌며 살아온 것입니다.
이렇게 목욕재계하고 '나물매'를 준비하고 '비난수'를 하는 과정은 이런 의미도 있지 않았을까요?
불안한 자신을 달래며 안심시키고, 스스로 조심하면서 바르게 살아가려는 참회와 다짐의 시간, 정화(淨化)의 시간 말입니다.
3. 자연을 경외하고 소통하며 조신(操身)하는 삶
'벌개눞역에서 바리깨를 뚜드리는 쇠ㅅ소리가 나면 / 누가 눈을 앓어서 부증이 나서 찰거마리를 불으는 것이다
마을에서는 피성한 눈숡에 절인 팔다리에 거마리를 붗인다'
거참, 찰거머리 부르는 방법이 절묘하네요.
시끄럽게 '바리깨'(놋쇠 밥그릇 뚜껑)를 두드리며 쇳소리를 내면 찰거머리(찰거마리)가 온다고 합니다.
벌개늪 옆(벌개눞역)에서 말입니다. 찰거머리는 벌판의 갯벌 옆 물구덩이(늪)에 사나 봅니다.
이렇게 요란하게 찰거머리를 불러 무얼 할까요?
눈이 부은 부증(浮症, 浮腫)에, 피멍 든(피성한) 눈시울(눈숡)에, 저리는(절인) 팔다리에 찰거머리를 붙인다(붗인다)고 합니다.
그러면 평소 동물의 피를 빨아먹고 사는 찰거머리가 환자 상처 부위의 피를 빨아먹어 병이 낫는다는 말인데요,
맙소사, 너무 무지하고 징그러운 치료법이라고요?
아닙니다. 동의보감에도 나오는 치료법입니다. 종기에 거머리를 붙이면요, 글쎄 이 녀석이 피고름을 다 빨아먹어 종기가 낫는다고 하네요.
첨단의학을 자랑하는 오늘날에도 거머리가 치료에 사용되고 있습니다.
피부이식수술이나 신체부위 접합수술에 의료용 거머리가 한 역할 톡톡히 해내고 있답니다.
이식부위에 의료용 거머리를 올려두면 피를 빨아서 혈액이 굳어지는 것을 방지한다고 합니다. 거머리의 생리활성물질은 소염진통작용도 한다고 하네요.
이 시가 1936년 나온 시인데, 그 당시 우리 조상들의 거머리 요법이 이렇게 과학적인 근거가 있는 것이었다니 정말 신기하네요.
이 대목에서 백석 시인님의 어투(이 시의 마지막 행)를 흉내 내고 싶어 지네요.
'100여 년 전의 거머리 요법을 지금 사용하고 있다는 말은 얼마나 놀라운 말인가!'
그런데요, 바리깨를 두드리면 찰거머리가 온다는 사실은 또 어떻게 알았을까요?
우리 조상님네들, 참으로 신통방통하기 그지없네요.
'여우가 우는 밤이면 / 잠 없는 노친네들은 일어나 팟을 깔이며 방요를 한다
여우가 주둥이를 향하고 우는 집에서는 다음날 으레히 흉사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무서운 말인가'
'깔이며'는 '뿌리며' '흩으며'의 뜻일 텐데요, '뿌리다' '흩다'는 의미에서는 느낄 수 없는 뉘앙스가 있는 것 같습니다. 공중이 아니라 바닥에 펴는 듯 흩뿌리는 느낌이랄까요?
붉은 색깔인 팥(팟)은 예부터 재앙을 막는 신령스러운 소재였습니다. 요즘도 시골에서는 동짓날 붉은 팥죽을 집안 곳곳에 뿌리곤 합니다.
'여우가 주둥이를 향하고 우는 집'. 여우가 우는데요, 그 주둥이가 향하고 있는 집에 '다음날 으레히 흉사가 있다'라고 하네요.
여기서 '흉사'는 갑자기 사람이 죽는 일을 말하겠네요.
그래서 밤중에 여우 울음소리가 들리면 불안해진 '노친네들'이 일어나 팥을 깔이며 방뇨(방요)를 한다고 합니다.
여우는 왜 울까요?
여기서 여우 울음은 흉사의 징후를 알려주는 의미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것을 알고 있을 듯한 신령스러운 여우가 사람들에게요.
그래서 울음소리로 노친네들에게 흉사에 대비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말이네요.
밤에 들리는 여우 울음이므로 여우가 어느 집을 향하고 우는지는 모르겠지요.
그렇지만 노친네들은 여우 울음소리가 나면 밤중에 일어나 팥을 깔이며 오줌을 누는, 자신에게 그 흉사가 닥치지 않도록 재앙을 쫓는 사전 처방을 한다는 겁니다.
이처럼 여우와 사람과의 소통은 참으로 은밀하고 신묘한 것이네요.
'여우가 주둥이를 향하고 우는 집에서는 다음날 으레히 흉사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무서운 말인가'
사람들은 이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그것은 오랫동안 반복된 경험으로 학습된 것이었겠지요?
여우의 울음과 흉사의 일치가 비록 여러 번의 우연이었다 할지라도, 여우 울음의 진실을 따지는 일은 사람들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네요.
다만 자연을 경외하고 소통하며 스스로 조신(操身)하며 자연의 일부로 살아가는 일이 자신에게 주어진 삶이라고 믿었을 테니까요.
이처럼 순박하고 아름다운 사람들이 모여 사는 '오금덩이라는 곳'에 달려가고 싶어지네요.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목욕'에서 백서 시인님의 시를 더 만나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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