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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스미기

백석 시 성외(城外)

by 빗방울이네 2024. 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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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 시인님의 시 '성외(城外)'를 만납니다. 우리 영혼의 아궁이에 따뜻한 군불을 지펴주는 시입니다. 함께 읽으며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백석 시 '성외(城外)' 읽기

 
성외(城外)
 
- 백석(1912~1995, 평북 정주)
 
어두워오는 성문(城門) 밖의 거리
도야지를 몰고 가는 사람이 있다
 
엿방 앞에 엿궤가 없다
 
양철통을 쩔렁거리며 달구지는 거리 끝에서 강원도(江原道)로 간다는 길로 든다
 
술집 문창에 그느슥한 그림자는 머리를 얹헜다
 

- 「정본 백석 시집」(백석 지음, 고형진 엮음, 문학동네, 2007년 1쇄, 2019년 32쇄) 중에서

 

2. 주변부에 사는 이들의 따뜻한 저녁 풍경들

 
시 '성외(城外)'는 백석 시인님의 시집 「사슴」에 실린 33편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33편의 시들은 한결같이 '사슴'처럼 깊고 선한 눈망울을 가진 시입니다. 그 눈망울들은 우리의 내부를 다 들여다보고 우리 외진 영혼의 아궁이에 군불을 지펴줍니다. 따뜻하게요. 슬프고 쓸쓸하다가도 종래에는 마음 밑자락까지 따뜻하게요.
 
'성외(城外)'는 어떤 따뜻함을 가진 시일까요? '성외(城外)'는 '성밖', '성문 밖'이라는 말인데, '성안'과 대조를 이루면서 이 시의 무대가 강조되는 느낌을 주네요
 
'성외(城外)'. 시인님의 눈길이 닿은 곳은 중심이 아니라 주변부입니다. 높은 곳이 아니라 낮은 곳이네요. 그런 곳에서 시인님은 어떤 일들을 목격했을까요? 한 편의 연극을 보는 것 같은 시입니다.
 
어두워오는 성문(城門) 밖의 거리 / 도야지를 몰고 가는 사람이 있다

- 백석 시 '성외' 중에서

 
극이 진행되는 시간은 '어두워오는' 때입니다. 장소는 '성문 밖의 거리'고요. 이렇게 장소에 조명까지 지정해 시인님이 큐 사인을 던지자 '성문 밖의 거리'라는 무대에 첫 등장인물이 나타납니다. 아, 돼지와 사람이네요.
 
'도야지를 몰고 가는 사람이 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첫 장면에 관객들은 쿡 웃음을 터뜨릴 것만 같네요. 돼지를 몰고 가는 일이 쉬운 일이겠는지요? 돼지는 요리조리 도망가려고 하고요, 사람은 막대기로 돼지 등을 툭툭 치면서 녀석을 쫓아가느라 정신이 없겠네요.
 
어두워오는 시간에 왜 돼지를 몰고 갈까요? '성문 밖의 거리'. 이 구절에 정답이 있는 것 같습니다. '성문 밖의 거리'는 사람 통행이 많은 곳이어서 장이 열리는 곳이기도 하겠네요. 바로 극의 무대는 장터거리네요. 
 
아마도 돼지를 사서 집으로 가는 사람, 또는 돼지를 팔려고 시장에 왔다가 팔다 남은 한 마리를 다시 집으로 몰고 가는 사람일 것입니다. 돼지 한 마리를 사서 집으로 데려가는 사람이라면, 이 돼지를 잘 먹여서 새끼를 낳아 돼지를 늘리는 생각에 걸음이 바빴겠습니다. 팔다 남은 돼지를 몰고 가는 사람이라면, "오늘은 니 주인이 없나 보다, 다음 장날에 다시 오자꾸나! 늦었다 어서 가서 밥 먹자."라고 했겠지요?
 
시인님은 '도야지'가 자꾸 눈에 들어오나 봅니다. 시인님이 다른 시에서 만난 귀여운 도야지, 만나볼까요? 
 
졸레졸레 도야지새끼들이 간다 / 귀밑이 재릿재릿하니 볕이 담북 따사로운 거리다

- 백석 시 '삼천포' 중에서

 
요즘에야 거리에 '도야지새끼들이' 줄지어 '졸레졸레' 간다면 사람들이 119에 신고부터 할 거 같네요. 이 시절에는 이렇게 '도야지새끼들'과 사람이 어울려 살았던 따뜻한 시간들이었네요.
 
'성문 밖의 거리'. 이 무대에서 펼쳐지는 다음 장면은 무얼까요?
 
 

"도야지를 몰고 가는 사람" - 백석 시 '성외' 중에서.

 
 

 

 

3. 흐릿하고 깊숙하고 평온한, 그래서 더 따뜻한 풍경들

 
엿방 앞에 엿궤가 없다

- 백석 시 '성외' 중에서

 
시인님은 도야지를 몰고 가는 사람을 보여준 뒤 '엿방' 앞을 보여주네요. 엿방은 엿을 고아 만들어 파는 가게이겠지요. 장터거리에서 제일 달콤한 가게네요. '엿궤'는 엿을 잘라 진열해 둔 진열대(엿상자)입니다.
 
엿방 앞에 그 진열대가 없다고 하네요. 엿이 다 팔렸다는 말, 오늘 엿장사는 끝이 났다는 말입니다. 아마 오늘 장터에 사람들이 많아서, 달콤한 것이 당기는 이들이 많아서 엿은 걱정 없이 일찌감치 다 팔렸네요. 엿방 사장님은 오늘 저녁이 달콤할 것만 같네요. 지금 가게 안에서는 또 다른 달콤한 엿을 열심히 고고 있겠지요? 사장님, 저는 콩엿요, 내일 콩엿 사러 갈게요!
 
양철통을 쩔렁거리며 달구지는 거리 끝에서 강원도(江原道)로 간다는 길로 든다

- 백석 시 '성외' 중에서

 
우리의 무대에, '성문 밖의 거리'에 이번에는 달구지가 등장했네요. 어떤 달구지일까요?
 
'양철통'은 경적인 것 같습니다. 이 양철통 쩔렁거리는 소리를 듣고 길 가던 사람들이 달구지를 피할 수 있는 경적요. 소나 나귀가 끄는 달구지일 텐데요, 시인님의 시 '미명계'에 등장한 나귀일까요? 바로 이 나귀 말입니다.
 
행길에는 선장 대여가는 장꾼들의 종이등(燈)에 나귀눈이 빛났다

- 백석 시 '미명계' 중에서

 
시집 「사슴」에 보면, 시 '미명계' 다음에 배치된 시가 '성외'입니다. 둘 다 장터를 소재로 한다는 점에서 두 시의 연관성이 깊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시 '미명계'에 등장한 장꾼과 나귀가 시 '성외'에도 등장한 듯한 느낌을 주네요.
 
'양철통을 쩔렁거리며'. 이 나귀가 고개를 움직일 때마다 '양철통'이 쩔렁거리게 해두었나 봅니다. 일종의 '워낭'이네요. 이 장꾼은 오늘 '성문 밖의 거리'에서 장사를 잘하고 다음 장터로 떠나는 중입니다. 평안북도에서 강원도로 가는 먼 길이네요.
 
이 장돌림은 밤을 새워 나귀와 함께 들길 산길 물길을 갈 것입니다. 가는 길에는 달빛 아래 소금 같은 메밀꽃도 한창 피었을까요? 가다가 맛있는 안주를 잘하는 주모가 있는 주막에 들러 막걸리도 한 잔 걸치면서 고단함도 풀겠지요? 이랴, 나귀야, 오늘 밤도 잘 부탁한데이. 
 
술집 문창에 그느슥한 그림자는 머리를 얹헜다 

- 백석 시 '성외' 중에서 

 
달구지는 멀리 사라지고요, 우리의 무대 '성문 밖의 거리'에는 마지막 장면 '술집 문창'이 등장하네요. 이 술집은 시 '미명계'에서 등장한 '술국을 끓이는 듯한 추탕집'의 느낌입니다. 추탕집이라도 장터에 있는 추탕집이라면 장꾼들이 술을 한잔 하면서 끼니도 해결하고 하룻밤 묵어갈 수도 있는 그런 주막일 것입니다.  
 
'그느슥한', 평북 방언일 듯한 이 형용사의 뜻이 사전에는 나오지 않네요. '그느슥한'이 아니라 ''그 느슥한'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고요. 이 경우라도 '느슥한'이라는 형용사도 사전에 나오지 않고요. 그런데 사전이 아니라도 우리는 직감으로 '그느슥한'의 뉘앙스를 알 수 있습니다. 어쩐지 흐릿하지만 깊숙하고 평온한 느낌 말입니다. 
 
'머리를 얹헜다'. 무슨 말일까요? 밖에서 보니 술집 문창에 사람의 머리가 희미하게 보였네요. 문창(門窓)은 창호지를 바른 창문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그래서 방안의 불빛에 의해 문창에 비친 그림자는 '그느슥한', 즉 흐릿하지만 깊숙하고 평온한 느낌을 주었겠네요. 
 
'언헜다'. '얹었다'라고 새겨봅니다. '술집 문창에 그느슥한 그림자는 머리를 얹었다'. 그 그림자가 '머리를' '문창에' 얹었다고 하네요. 이 그림자의 주인공은 '성문 밖 거리'의 장터에서 하루종일 물건을 팔던 장꾼이겠지요? 한 푼이라도 깎으려는 이와 한 푼이라고 더 받아야 하는 그 사이의 흥정은 얼마나 힘들었겠는지요.
 
따뜻한 추탕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고 막걸리도 한 잔 했을까요? 힘들었던 하루를 접고 머리를 문창에 기대어 쉬고 있습니다. 이 나른한 포만감이라면 장사의 고단함도, 집과 떨어져 있는 쓸쓸함도 잠시 잊을 수 있겠지요? 지금 그가 빠져드는 잠 속에서라도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을 만날 수 있기를요. 
 
이처럼 우리의 무대인 '성문 밖의 거리'에서 펼쳐진 한편의 아름다운 단막극은 '그느슥한' 분위기로 마무리되네요. 문창에 기댄 흐릿한 머리의 잔상을 우리 머릿속에 잔잔하게 일렁이게 하면서요.
 
'성외(城外)'. 낮은 곳에, 주변부에 사는 이들이 일상을 마무리하는 저녁, 그 풍경들이 주는, 흐릿하지만 깊숙하고 평온한 감정들이 연료가 되어 우리 마음 낮아지고 여려지고 애연해지다가, 그러다가 종래에는 따뜻해지네요.
 
그대도 그대만의 하루를 '그스늑하게' 잘 마무리하고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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