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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스미기

백석 시 고야

by 빗방울이네 2024. 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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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 시인님의 시 '고야'를 만납니다. 저마다의 어린 시절 아름다운 추억들이 새록새록 돋아나 아이 마음 같아지는 시입니다. 함께 읽으며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백석 시 '고야' 읽기

 
고야(古夜)
 
- 백석(1912~1995, 평북 정주)
 
아배는 타관 가서 오지 않고 산비탈 외따른 집에 엄매와 나와 단둘이서 누가 죽이는 듯이 무서운 밤 집 뒤로는 어느 산골짜기에서 소를 잡아먹는 노나리꾼들이 도적놈들같이 쿵쿵 거리며 다닌다
 
날기멍석을 져간다는 닭보는 할미를 차 굴린다는 땅 아래 고래 같은 기와집에는 언제나 니차떡에 청밀에 은금보화가 그득하다는 외발 가진 조마구 뒷산 어느메도 조마구네 나라가 있어서 오줌 누러 깨는 재밤 머리맡의 문살에 대인 유리창으로 조마구 군병의 새까만 대가리 새까만 눈알이 들여다 보는 때 나는 이불 속에 자즈러붙어 숨도 쉬지 못한다
 
또 이러한 밤 같은 때 시집갈 처녀 막내 고무가 고개 너머 큰집으로 치장감을 가지고 와서 엄매와 둘이 소기름에 쌍심지의 불을 밝히고 밤이 들도록 바느질을 하는 밤 같은 때 나는 아릇목의 삿귀를 들고 쇠든 밤을 내여 다람쥐처럼 밝어먹고 은행여름을 인두불에 구어도 먹고 그러다는 이불 위에서 광대넘이를 뒤이고 또 누어 굴면서 엄매에게 웃목에 두른 평풍의 새빨간 천두의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고모더러는 밝은 날 멀리는 못 난다는 뫼추라기를 잡어달라고 조르기도 하고
 
내일같이 명절날인 밤은 부엌에 쩨듯하니 불이 밝고 솥뚜껑이 놀으며 구수한 내음새 곰국이 무르끓고 방안에서는 일가집 할머니가 와서 마을의 소문을 펴며 조개송편에 달송편에 죈두기송편에 떡을 빚는 곁에서 나는 밤소 팥소 설탕 든 콩가루소를 먹으며 설탕 든 콩가루소가 가장 맛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얼마나 반죽을 주무르며 흰가루손이 되어 떡을 빚고 싶은지 모른다
 
섣달에 냅일날이 들어서 냅일날 밤에 눈이 오면 이 밤에 쌔하얀 할미귀신의 눈귀신도 냅일눈을 받노라 못 난다는 말을 든든히 여기며 엄매와 나는 앙궁 위에 떡돌 위에 곱새담 위에 함지에 버치며 대냥푼을 놓고 치성이나 드리듯이 정한 마음으로 냅일눈 약눈을 받는다
이 눈세기 물을 냅일물이라고 제주병에 진상항아리에 채워두고는 해를 묵여가며 고뿔이 와도 배앓이를 해도 갑피기를 앓어도 먹을 물이다
 

- 백석 시집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시와사회 편집부 엮음, 시와사회 발행, 1997년 초판, 2003년 개정 1판) 중에서

 

2. 시집 「사슴」에서 가장 긴 시 '고야'

 
백석 시인님의 시 '고야(古夜)'는 1936년 「조광」을 통해 발표됐습니다. 시인님의 시집 「사슴」에 실린 33편의 시 가운데 가장 긴 시입니다. 이 시집에서 한 편의 시가 6쪽에 걸쳐 실린 시로는 '고야'와 '여우난골족' 등 2편인데, '고야'가 41줄로 '여우난골족'보다 1줄이 더 있네요.
 
'고야(古夜)'는 말 그대로 '옛밤'이네요. 옛날, 그 깜깜한 밤에는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어린 백석이 겪은 옛날 밤의 이야기입니다. '독서목욕'에서는 원본에 없는 쉼표를 찍어가며 읽습니다.
 
아배는 타관 가서 오지 않고, 산비탈 외따른 집에, 엄매와 나와 단둘이서, 누가 죽이는 듯이 무서운 밤, 집 뒤로는, 어느 산골짜기에서, 소를 잡아먹는 노나리꾼들이 도적놈들같이 쿵쿵 거리며 다닌다

- 백석 시 '고야' 중에서

 
백석 시인님의 아버지는 사진 관련 일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다른 지역(타관, 他官)에 일을 가면 오랫동안 집을 비웠네요. 집이 있는 곳은 시 '여우난골족'에 나오는 '여우난골'인데요, 여우가 출몰할 정도로 '산비탈 외따른 집'이네요.
 
예닐곱 살 아이의 마음이 되어 이 깊고 깊은 산골짜기의 깜깜한 밤을 생각합니다. 아버지가 있으면 하나도 무섭지 않을 텐데요. '엄마와 나 단둘이' 있으니 '누가 죽이는 듯이 무서운 밤'이라고 하네요. 나를 '누가 죽이는 듯이', 또는 누구를 '누가 죽이는 듯이' 무서운 밤입니다. 어린 마음에 밤의 공포가 죽이는 순간의 공포로, 죽임을 당하는 순간의 공포로 다가왔네요.
 
노나리꾼. 소를 밀도살하는 사람을 일컫습니다. 살아있는 커다란 소를 죽이고 그것을 부위별로 해체하는 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노나리꾼은 아이에게 공포의 대상이었겠습니다. 그렇게 무서운 '노나리꾼들이' '무서운 밤'에 '쿵쿵 거리며 다닌다'라고 하네요. 얼마나 무서웠을까요? 
 
날기멍석을 져간다는, 닭보는 할미를 차 굴린다는, 땅 아래 고래 같은 기와집에는, 언제나 니차떡에 청밀에 은금보화가 그득하다는, 외발 가진 조마구, 뒷산 어느메도 조마구네 나라가 있어서, 오줌 누러 깨는 재밤, 머리맡의 문살에 대인 유리창으로, 조마구 군병의 새까만 대가리, 새까만 눈알이 들여다 보는 때, 나는 이불 속에서 자즈러붙어 숨도 쉬지 못한다

- 백석 시 '고야' 중에서

 
곡식을 널어놓은 날기멍석을 도둑 맞거나, 닭 모이주는 할머니가 마당에서 넘어지는 일은 다반사이겠지만, 어른들은 그것이 모두 조마구(난장이처럼 작고 외발로 다닌다는 도깨비)의 행패라고 아이들에게 말하곤 했나 봅니다. 이 조마구는 지하에 고래 같은 기와집에 살고 언제나 니차떡(인절미)에 청밀(꿀)에 은금보화가 그득한, 없는 게 없고 못하는 게 없는 도깨비라고 하면서요. 그래서 아이들에게 '어른들 말 안 들으면 조마구한테 혼난다'라고 엄포를 놓았겠습니다.
 
아이는 또 그걸 곧이곧대로 듣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오줌이 마려워 한밤중(재밤)에 깼는데, 머리맡의 문살에 붙여놓은 유리창으로 밖을 보려니 조마구 도깨비들이 들여다보는 것만 같아서 이불속에 '자즈러붙어' 숨도 쉬지 못하는 중입니다. 이 일을 어쩌면 좋을지요?
 
'머리맡의 문살에 대인 유리창'. 이 구절, 정말 추억 돋네요. 방안에서 누워있다가 밖에 인기척이 나면, 방문을 열지 않고도 상체만 일으켜 밖을 내다볼 수 있는 위치(창호문)에 유리 조각을 댄 아주 작디작은 창입니다. 그러니 밖에서도 안을 들여다볼 수 있겠지요. 도깨비들이 깜깜한 밖에서 방안을 들여다보고 있다는 상상에 빠지기 시작한 아이는 얼마나 무서웠겠는지요? 이불속에서 두 무릎을 배에 댄 채 오줌을 참고 있는 아이는 얼마나 귀엽고 정다운 아이인지요.
 
또 이러한 밤 같은 때, 시집갈 처녀 막내 고무가 고개 너머 큰집으로 치장감을 가지고 와서, 엄매와 둘이 소기름에 쌍심지의 불을 밝히고, 밤이 들도록 바느질을 하는 밤 같은 때, 나는 아릇목의 삿귀를 들고, 쇠든 밤을 내여 다람쥐처럼 밝어먹고, 은행여름을 인두불에 구어도 먹고, 그러다는 이불 위에서 광대넘이를 뒤이고, 또 누어 굴면서 엄매에게 웃목에 두른 평풍의 새빨간 천두의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고모더러는 밝은 날 멀리 못 난다는 뫼추라기를 잡어달라고 조르기도 하고

- 백석 시 '고야' 중에서

 
참으로 천진난만한 아이의 모습입니다. 바느질을 하고 있는 고모와 엄마 곁에 있는 아이는 얼마나 행복한 아이인지요. '치장감'. 시집갈 때 입을 옷이었겠지요? 새옷감에서 나는 냄새, 날 선 새 옷감이 스르륵 서로 부딪히는 소리, 고모와 엄마의 두런대는 이런저런 소소한 이야기들, 따뜻한 이야기들.
 
이렇게 아무 긴장이 없는 평온한 시간, 아무 할 일이 없는 '나'는 아무 걱정이 없겠습니다. 아랫목에 깔아놓은 삿자리 모서리(삿귀)를 들어서 그 속에서 말라 시들해진 밤(쇠든 밤)을 꺼내 먹는다네요. '밝어먹고'. 속에 든 알맹이를 속속 꺼내먹는다네요. 다람쥐처럼 앙증맞네요. 은행 열매(여름)를 인두불에 구워 먹기도 하고요. 은행이 구워지는 고소한 냄새가 나는 것도 같네요.
 
그래도 아무 할 일이 없는 '나'는 아무 걱정이 없이 이불 위에서 광대처럼 몸을 굴리며 놉니다. 아무리 몸을 굴려도 아무 데도 아프지 않는 푹신하고 안전한 이불 같은 밤이네요. 누워 구르다 보니 병풍(평풍) 그림이 눈에 들어왔네요.
 
엄마, 저 새빨간 열매가 뭐야? 응 그거 천두(천도 복숭아)야. 하늘나라 신선들이 먹는 거란다. 사람들이 먹으면 늙지 않는다는 복숭아야. 우리 아들, 엄마한테 저 천두 한 알 따 줄 거지? 응! 그런데 고모, 내일 메추라기 잡아줄 거지? 메추라기는 잘 날지 못하니까 고모도 잡을 수 있지? 
 

"나는얼마나반죽을주무르며"-백석시'고야'중에서.
"나는 얼마나 반죽을 주무르며" - 백석 시 '고야' 중에서.

 

 

 

3. '나는 얼마나 반죽을 주무르며 흰가루손이 되어 떡을 빚고 싶은지 모른다'

 
내일같이 명절날인 밤은, 부엌에 쩨듯하니 불이 밝고, 솥뚜껑이 놀으며 구수한 내음새 곰국이 무르끓고, 방안에서는 일가집 할머니가 와서 마을의 소문을 펴며, 조개송편에 달송편에 죈두기송편에 떡을 빚는 곁에서, 나는 밤소 팥소 설탕 든 콩가루소를 먹으며 설탕 든 콩가루소가 가장 맛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얼마나 반죽을 주무르며 흰가루손이 되어 떡을 빚고 싶은지 모른다

- 백석 시 '고야' 중에서

 
명절 전날 밤의 풍경입니다. 누구나 설레는 시간이네요. 명절 음식을 한다고 부엌은 밤늦도록 불이 밝습니다. '솥뚜껑이 놀으며'. 곰국이 끓는 솥인데, 솥뚜껑이 놀고 있다고 하네요. 곰국이 얼마나 부글부글 무르익도록 끓는지(무르끓고) 솥뚜껑이 들썩거리는 모습이 눈에 보이는 것만 같네요.
 
일손을 도우러 아랫마을에 사는 친척(일가집) 할머니가 오셨네요. '마을의 소문을 펴며'. 참 멋진 표현이네요. 마을에서 일어난 이런저런 재미난 소문을 접는 부채처럼 촘촘히 접어왔다가 하나씩 펴서 들려준다고 하네요.  
 
'설탕 든 콩가루소가 가장 맛있다고 생각한다'. 이 구절에서 쿡 하고 웃음이 나네요. 다들 열심히 송편을 빚고 있는데 아이인 '나'는 송편에 들어가는 소를 맛보고 있습니다. 맛있는 소를 몰래 집으러 가는 손을 엄마에게 들켜 몇번씩이나 제지당했겠지요. 그래도 그 달콤함을 어찌 참겠는지요. 아이니까요. 음, 설탕 든 콩가루소가 가장 맛있군! '가장 맛있다고 생각했다'가 아니라 '생각한다'입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생생한 현장의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나는 얼마나 반죽을 주무르며 흰가루손이 되어 떡을 빚고 싶은지 모른다'. 백석 시인님의 시 가운데 참으로 빛나는 명구절의 하나입니다. 이 구절을 자꾸 읽으면 아이처럼 '얼마나 반죽을 주무르며 흰가루손이 되어 떡을 빚고 싶은지' 모릅니다. 그 쫀득한 촉감과 흰 가루가 주는 자유로움, 가루의 고소한 냄새, 반죽을 주무르는 일은 아이에겐 오감이 즐거운 놀이네요.
 
그러나 엄마는 제사상에 올린 음식 만드는 일에 아이는 손도 못 대게 했겠지요? 그래도 아이의 성화에 하나쯤 만들어보게 했겠지요? 나중에 다 익은 떡판을 꺼내냈을 때, 앗, 저 못생긴 송편, 저거 내가 빚은 거야! 그 기분, 얼마나 나는 대견한지요?
 
섣달에 냅일날이 들어서, 냅일날 밤에 눈이 오면, 이 밤에 쌔하얀 할미귀신의 눈귀신도, 냅일눈을 받노라 못 난다는 말을 든든히 여기며, 엄매와 나는 앙궁 위에 떡돌 위에 곱새담 위에, 함지에 버치며 대냥푼을 놓고, 치성이나 드리듯이, 정한 마음으로 냅일눈 약눈을 받는다
이 눈세기 물을 냅일물이라고, 제주병에 진상항아리에 채워두고는, 해를 묵여가며, 고뿔이 와도 배앓이를 해도 갑피기를 앓어도 먹을 물이다

- 백석 시 '고야' 중에서

 
'섣달'은 한해의 마지막 12월입니다. '냅일날'은 납일(臘日)을 말합니다. 한 해 동안의 농사에 감사하고 공동체의 평온을 기원하는 제사를 올리는 날입니다. 그런 성스러운 날 밤에 눈이 오네요. 그런 성스러운 밤하늘이 눈을 내려주네요. 할미귀신도 그 눈을 받는다고 돌아다니지 않는다고 할 정도로 귀하디 귀한 눈이네요.
 
엄마와 나도 그 귀한 눈을 받습니다. 집안에 있는 넓적하게 생긴 그릇들(함지, 버치, 대냥푼)일랑 다 꺼내어 밖에 있는 아궁이(앙궁) 위에, 떡을 칠 때 쓰는 넓적한 돌(떡돌) 위에, 곱새담(담 위에 이엉을 'ㅅ'자로 얹은 담) 위에 얹어놓고 그 성스러운 눈을 받습니다.
 
이 눈을 받는 마음은 '치성이나 드리듯이 정한 마음'이라 합니다. 그 '정한 마음'은 신성한 하늘을 대하는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늘 하늘을 바라보는 마음, 하늘의 신성함을 인식하는 마음, 끊임없이 하늘마음을 닮으며 하늘마음으로 살아가려는 마음입니다. 
 
그러니 이 눈이 어찌 '약눈'이 아니겠는지요. 하늘에 닿은 마음이라면, 하늘과 같이 맑고 넓은 마음이라면, 그 마음이 귀하게 여겨 먹는 물이라면 그 물은 약물이 아니겠는지요? 제사 때 쓰는 술병(제주병)이나 귀한 항아리(진상항아리)에 넣어두고 고뿔과 배앓이, 설사(갑피기)를 앓을 때 먹을 물이라고 하네요.
 
'냅일날' 밤에 내리는 약눈을 '치성이나 드리듯이' 받고 있는 이런 '정한 마음'에 대해 생각해 보는 밤입니다.

 

백석 시 여우난골족

백석 시인님의 시 '여우난골족'을 만납니다. 설날 명절에 따뜻한 가족의 품, 그 목소리와 체온이 그리워지는 시입니다. 함께 읽으며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백석 시 '여우난골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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