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삼 시인님의 시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을 만납니다. 강에서, 바다에 다 와 가는 강에서 시인님은 무엇을 보았을까요? 시인님이 보여주는 울음이 타는 강 노을에 마음을 맑히며 함께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박재삼 시 '울음이 타는 가을 강' 읽기
울음이 타는 가을 강(江)
- 박재삼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 햇볕으로나 동무 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 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 질 녘 울음이 타는 가을 강(江)을 보것네.
저것 봐, 저것 봐,
네보담도 내보담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
그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 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 와 가는
소리 죽은 가을 강(江)을 처음 보것네
- 「박재삼 시선」(이상숙 엮음, 지식을만드는지식) 중에서
박재삼 시인님(1933~1997)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 도쿄에 태어나 4세 때 어머니 고향 삼천포로 왔습니다. 1953년 「문예」에 시조 '강물에서', 1955년 「현대문학」에 시조 '섭리', 시 '정적' 추천으로 문단에 데뷔했습니다. 「현대문학」 「대한일보」 기자, 삼성출판사 편집부장, 월간 「바둑」 편집장 등을 역임했습니다.
1962년 발간된 첫 시집 「춘향이 마음」을 비롯, 「햇빛 속에서」 「천년의 바람」 「허무에 갇혀」 「다시 그리움으로」 등의 시집과 시조집, 수필집 등이 있습니다. 현대문학 신인상, 문교부 문예상, 한국시협상, 노산문학상, 한국문학작가상, 중앙일보 시조대상, 조연현문학상, 인촌상 등을 수상했습니다.
2. '소리 죽은 가을 강'의 의미는?
얼마 전 경남 사천에 여행을 간 적이 있는데요, 삼천포 앞바다의 붉은 저녁노을이 장관이었습니다. 삼천포가 고향인 박재삼 시인님을 기리는 '박재삼문학관'이 거기 있었고, 시인님의 대표 시로 꼽히는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이 생각났습니다.
그대는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의 어느 구절에서 마음 주저앉았는지요?
소리 죽은 가을 강(江)을 처음 보겄네
- 박재삼 시 '울음이 타는 가을 강' 중에서
빗방울이네는 이 구절이 이 시의 솟대라 여기고 읽습니다. '소리 죽은 가을 강' 말입니다. '왜 소리 죽은 가을 강'일까요? 이 구절에 시 속의 사연이 모두 수렴되어 있을 것 같습니다.
처음부터 볼까요?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 햇볕으로나 동무 삼아 따라가면 /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 나고나
- 박재삼 시 '울음이 타는 가을 강' 중에서
여기서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들려주는 '친구'는 누구일까요? 바로 '강'입니다. 시의 화자는 지금 강을 따라 걷고 있습니다. 화자의 마음은 '한자리에 못 앉아 있는 마음'이네요. 바람처럼요. '가을 햇볕으로나 동무 삼아' 따라간다고 하니, 화자의 곁에는 사람이 없네요.
곁에 아무도 없이 '햇볕으로나 동무 삼아' 걷는 길, 이것은 강의 길이자 우리네 삶의 길인 것만 같습니다. 그대도 참 외롭지요?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렀군요. 삶의 등성이에 말입니다. 삶의 가을쯤요. 이제 곧 내려가야 하는 시간, 곧 추운 겨울이 올 것만 같습니다. 그래서 화자는 '눈물 나고나'하고 읊조리네요. 나직이요. 한숨처럼요.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 / 그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 나고
- 박재삼 시 '울음이 타는 가을 강' 중에서
화자는 기다란 강의 궤적을 떠올리고 있네요. 강의 출발점은 어느 깊은 산골 작은 샘입니다. 그 산골 좁은 계곡을 흐르다가 더 넓은 세상으로 나와 세상의 이런저런 웃음과 울음을 다 받아내며 유유히 흐르는 강이네요.
이런 강의 이야기는 바로 그대의 이야기네요. 졸졸졸 산골 물소리 같았을 첫사랑은 얼마나 기뻤을지요? 그러다 그대도 유유히 흘러왔네요. 온갖 세상 풍파 다 그대 삶 속에 녹아났겠네요. 얼마나 구불구불한 여정이겠는지요? 누구라도 말입니다.
3.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 와 가는' 강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 와 가는 / 소리 죽은 가을 강(江)을 처음 보것네
- 박재삼 시 '울음이 타는 가을 강' 중에서
참으로 이 구절, 떨림 없이 못 읽어내겠네요. 강의 스러짐을, 소멸을 이토록 숨 막히는 흐느낌으로 읊은 시를, 빗방울이네는 아직 못 보았네요.
1연의 '등성이에 이르러'는 이 마지막 연에 와서 '바다에 다 와 가는'으로 변주되었네요. 삶이 '등성이에 이르러' '바다에 다 와 가는' 시간을 지나는 중이라면, 누구라도 이 마지막 연에서 숨을 참고 있을 것만 같네요.
산골 물소리 같은 깨끗하고 깨끗했을 첫사랑도, 그다음 그다음의 사랑과 이별들, 그리고 그리움, 그리하여 터져 나온 울음마저 저리 붉게 다 태워버리고 '소리 죽은' 강을 보셔요.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 와 가는' 저 강을 보셔요.
이렇게 강은 스러져 죽어 다 끝나 버리는 걸까요?
마지막 연에 등장한 구절 '미칠 일'의 다의성은 이 시를 더욱 증폭시키네요. 미칠 듯이 가슴이 답답했다가도 소리 없이 소멸하여 더 큰 세상에 ‘닿아’ 합류하는 존재의 영원성을 우리에게 떠올려주네요. 얼마나 아름다운 위안인지요?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목욕'에서 노을이 나오는 시 한 편 더 읽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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