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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스미기

천상병 시 귀천 읽기

by 빗방울이네 2023. 6.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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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병 시인님의 시 '귀천'을 만납니다. 시인님이 건네주는 슬프고도 맑고 아름다운 시의 여울에 마음을 담가 맑히며 함께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천상병 시 '귀천' 읽기


귀천

- 천상병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

- 천상병 시집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미래사) 중에서


천상병 시인님(1930~1993)은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 히메지(姬路) 시에서 태어났고, 1952년 「문예」에 시 '갈매기'가 추천 완료되어 등단했습니다. 1967년 억울하게 간첩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렀고, 고문 후유증에다 음주와 영양실조로 거리에 쓰러져 서울시립정신병원에 행려병자로 입원하기도 했습니다. 이를 모르고 시인님이 작고한 줄 알았던 친구들은 1971년 그의 유고시집 「새」를 발간했습니다. 이후 시집 「천상병은 천상 시인이다」 「저승 가는 데도 여비가 든다면」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 문학선집 「구름 손짓하며는」 등을 냈습니다. 유달리 아이들을 좋아한 시인님은 동화집 「나는 할아버지다 요놈들아」를 발간했습니다. 은관문화훈장을 받았습니다.


2. 왜 아름다웠다고 말한다 했을까요?


천상병 시인님의 시 '귀천', 죽음 이야기인데 음울함은 없고 자유롭고 맑고 밝은 느낌이 들지요?
 
그런데요, 마지막 이 구절 좀 보셔요.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

- 천상병 시 '귀천' 중에서

 
시인님은 평생 가난 속에 주벽, 병으로 점철된 기인(奇人)의 삶을 살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 시인님이 죽어서 하늘에 가면 이 지상의 삶이 아름다웠다고 '하늘님'에게 말한다고요? 
 
오히려 '아유, 하늘님, 세상살이 참 힘들었네요.'라는 푸념이 나올 것만 같네요. 우리네 통념으로 말입니다. 일반적으로도 우리는 고인의 명복을 빌면서 '이제 이승의 아픔을 다 잊어버리시고, 고통 없는 저승에서 편히 지내십시오.'라고 말하기도 하지요. '이승=고통, 저승=평안'이 우리의 생각입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

- 천상병 시 '귀천' 중에서


그래서 이 구절은 고달픈 삶을 살아온 시인님의 깊은 한숨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세상에 대한 한스럽고 슬픈 마음, 즉 삶의 페이소스(pathos) 같은 것 말입니다. 삶의 고통에 정면으로 맞서 헤쳐나가는 대신 애써 외면한 이의 씁쓸한 웃음 같은 것 말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시인님 주변에 시인님의 어려웠던 삶을 도와준 수많은 정다운 사람들이 있었으니 실제로 시인님이 세상을 아름답게 느꼈기 때문에 그렇게 고백했을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요, 그렇게 생각하며 시집을 덮어버리기에는 미진한 구석이 있습니다.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려 한 데는 좀 더 다른 ‘마음 하늘’이 있었을 것만 같아서요.

어떤 시인님일까요? 천상병 시인님의 마산중학교 재학시절 담임선생님이 '꽃'의 시인인 김춘수 시인님이었습니다. 김춘수 시인님으로부터 시를 배웠고 「문예」에 시 '강물'을 발표했습니다.

서울대 상대를 수료한 시인님은 한국전쟁 중 미군 통역관으로 활동했고, 김현옥 부산시장 공보비서(처음이자 마지막 직장)로 재직하기도 했습니다. 시 창작과 평론, 번역활동을 활발하게 했던 시인님은 진주의 이형기, 삼천포의 박재삼, 부산의 최계락 시인님과 함께 시단(詩壇)의 젊은 기수 4인으로 꼽히기도 했습니다.
 

천상병시귀천중에서
천상병 시 '귀천' 중에서.

 

 

3. 동심과 무욕, 그 진정한 자유인의 삶


'시의 길'을 가기 위해 보장된 직장을 스스로 포기하고 서울대도 중퇴했던 천상병 시인님. 과연 어떤 캐릭터이고, 또 등단 후 작고하기까지 41년 동안 어떤 빛깔의 시를 썼을까요? 시인님이 하늘로 돌아가서 세상살이를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라고 한 이유를 아래 몇 개의 글을 읽으며 그 속에서 찾아보려 합니다.

상병은 아이들의 웃음이야말로 세상에 찌들지 않은 가장 맑고 아름다운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신도 그렇게 살려고 노력했다. 누가 뭐라고 하든 상병은 아름답게 살려고 노력했다. 일곱 살 아이의 눈과 마음을 간직한 채 살려고 노력했다. 세상의 모진 풍파도 일곱 살 아이의 순수 앞에서는 힘을 잃는다. 상병은 지금까지 자신을 살린 것은 일곱 살짜리의 순수한 마음이라고 믿었다.

- 천상병 평전 「소풍을 마치고 하늘로 간 시인 천상병」(전남진 지음, 작은씨앗) 중에서


'동심'이 삶의 자세였네요. 그래서 천상병 시인님의 시들을 읽으면 그 속에 장난기 가득한 아이가 들어있는 것만 같았네요. 시인님이 순진무구한 순수시인으로 불리는 이유입니다. 그렇게 천진난만한 눈에 세상은 어떻게 보였을까요? 또 물적 욕망은 어땠을까요?

물질은 삶을 위한 최소한의 조건일 뿐이라는 천상병 시인의 생각은 가난에 대한 긍정의 인식에서 비롯된다. (중략) 시인은 "가난은 내 직업"이라고 긍정함으로써 현실 속에서 행복감을 느낀다. (중략) 물적 욕망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상태의 인간, 즉 진정한 인간 본성에서 실현되는 시적 언어를 통해 우리는 천상병 시의 정신을 만날 수 있다.

- 「천상병 시선」(박승희 엮음, 지식을만드는지식) 해설(박승희) 중에서


그랬군요. 평생 가난하게 살면서도 가난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부자나 출세한 사람을 부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가난을 질료로, 외로움과 고독을 질료로 삶의 진실에 다가갔던 시인님이네요. 그래서 '나', '내 것'이라는 껍데기를 훌훌 벗어던져버렸네요.

천상병의 시들은 무욕과 순진무구한 시심을 바탕으로 일관되게 자신의 길을 개척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중략) 시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떠올릴 때 우리는 일차적으로 천상병의 눈에 낀 눈곱과 입가의 거품을 떠올리게 되는데, 우리는 거기서 통달한 바보가 지닐 수 있는 아름다운 삶의 누추함을 아름답게 확인할 수 있다.

- 천상병 시집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해설(최동호) 중에서


'물적 욕망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상태의 인간', '무욕과 순진무구한 시심'이었기에 이렇게 자유롭고 아름다운 자세로 죽음을 생각할 수 있었을까요? 집착도 미련도 없이 자유롭고 아름답고 자연스럽게!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 천상병 시 '귀천' 중에서


그리하여 하늘로 돌아가서 이 세상살이가 아름다웠다고 말하겠다고 합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마음은 어떤 경지인지, 빗방울이네는 어렴풋이 짐작만 할 뿐인 걸요. 그러면서 그것은 어떤 ‘마음 하늘’일까를 곰곰 생각하게 되네요.

아침에 읽은 책 중에서 한 구절 덧붙입니다.

기쁨 슬픔을 당하는 것은 사아(私我) 곧 의식 때문에 그것이 생의 습관과 몸에 달려 있으면서 거기 붙어서 지식과 행동을 하는 이상은 언제까지라도 계속될 수 있다. 그러나 마음이 한번 자유를 얻어 거기에 대한 관심을 내버리고 신비의 가라앉음 밑에 빠져들게 되면, 즉 그 의식이 밝아짐을 얻으면 그런 것들은 오고 가는 것이지 그 자신이 아님을 잘 알기 때문에 그다음에 어떤 것이 와도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 「바가바드 기타」(함석헌 주석, 한길사) 중에서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목욕'에서 삶의 비의를 보여주는 시 한 편 더 읽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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