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만영 시인님의 시 '비의 image'를 만납니다. 비의 이미지를 이처럼 처절하게 표현한 시는 아마 세상에 다시없을 것입니다. 쓸쓸함과 서러움도 때로 마음을 씻어 줍니다. 시인님이 구축해 놓은 비애의 풍경 속으로 함께 들어가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장만영 시 '비의 image' 읽기
비의 image
- 장만영(1914~1975, 황해도 연백)
병든 하늘이 찬비를 뿌려 ···
장미(薔薇) 가지 부러지고
가슴에 그리던
아름다운 무지개마저 사라졌다.
나의 '소년(少年)'은 어디로 갔느뇨, 비애(悲哀)를 지닌 채로.
- 오늘 밤은
창(窓)을 치는 빗소리가
나의 동해(童骸)를 넣은 검은 관(棺)에
못을 박는 쇠마치 소리로
그렇게 자꾸 들린다 ···
마음아, 너는 상복(喪服)을 입고
쓸쓸히, 진정 쓸쓸히 누워 있을
그 어느 바닷가의 무덤이나 찾아가렴
- 「장만영 시선」(송영호 엮음, 지식을만드는지식, 2013년) 중에서
2. 비를 소재로 한 시 중에서 가장 우울한 시
장만영 시인님은 '서울 어느 하늘 아래~'로 시작되는, 최헌 가수님의 유명한 가요 '순아'의 노랫말이 된 시 '사랑'을 쓴 시인님입니다.
시 '비의 image'는 1940년 「조광」에 발표되었으니 장만영 시인님 26세 때 쓰인 시입니다.
아마 이 시는 '비'를 소재로 한 세상의 시 중에서 가장 우울하고 절망적인 분위기를 가진 시로 꼽힐 것입니다. 26세 청춘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병든 하늘이 찬비를 뿌려 ··· / 장미(薔薇) 가지 부러지고
가슴에 그리던 / 아름다운 무지개마저 사라졌다
- 장만영 시 '비의 image' 중에서
'병든 하늘'. 이 시가 발표된 해가 1940년, 일제강점기입니다. 우리의 말과 글을 빼앗기고 창씨개명제로 성(姓)과 이름마저 빼앗긴 때였습니다. 휘두르는 채찍을 맞으면서도 어쩌지 못하는 순한 양처럼 일제의 잔인한 폭력에 무력하게 굴복해야 했던 처참과 치욕의 시간, 바로 '병든 하늘'의 시간이었습니다.
그 '병든 하늘'이 뿌린 비로 인해 세상의 장미 - 사랑과 아름다운 것들이 꺾이고, 내일을 꿈꾸던 희망(무지개)마저 사라졌다고 합니다. 그 비는 '찬비'라고 하네요. 온몸과 마음을 움츠러들게 하는 '찬비'입니다.
나의 '소년(少年)'은 어디로 갔느뇨, 비애(悲哀)를 지닌 채로
- 오늘 밤은 / 창(窓)을 치는 빗소리가 / 나의 동해(童骸)를 넣은 관(棺)에
못을 박는 쇠마치 소리로 / 그렇게 자꾸 들린다 ···
- 장만영 시 '비의 image' 중에서
시의 화자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립니다. '소년'이라고 작은따옴표까지 씌운 것은 어느 특정한 시간대의 유년시절을 의미하는 것으로 새겨봅니다. '아름다운 무지개'를 잡으러 뛰어갔던 '소년' 말입니다. 그러나 '소년'은 그 꿈을 피워보지 못한 채 허망하게 사라졌네요.
그런 슬프고 서러운 회상 위로 '창(窓)을 치는 빗소리가' 들립니다. 이 빗소리는 마치 '나의 동해(童骸)를 넣은 관(棺)에' '못을 박는 쇠마치 소리로' 들린다고 합니다. 아, 세상의 시 가운데 빗소리를 이렇게 처절하게 표현한 구절을 본 적이 없습니다.
'동해(童骸)'는 어린아이의 뼈를 말하네요. 허망하게 사라진 화자의 유년 말입니다. 빗소리는 세상 가득한 소리입니다. 온 세상에 내리는 빗소리가 '나의 소년'의 뼈가 든 관에 못을 박는 쇠망치 소리로 들린다고 하니, 결코 그 크기를 짐작할 수 없는 절망과 공포였겠습니다. 화자의 '소년'은 고운 꿈으로도 영영 돌아올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3. 저마다의 '내면의 상처 입은 아이' 돌아보기
마음아, 너는 상복(喪服)을 입고 / 쓸쓸히 진정 쓸쓸히 누워 있을
그 어느 바닷가의 무덤이나 찾아가렴
- 장만영 시 '비의 image' 중에서
'어느 바닷가의 무덤'. 자신의 '아름다운 무지개'를 쫓아가다 허망하게 '비애(悲哀)를 지닌 채로' 사라진 '소년'이 '쓸쓸히 누워 있을' 무덤이겠습니다.
이 마지막 연에서 시는 홀연 앞의 흐름과는 다른 국면으로 진입합니다. 빗소리가 자신의 관 뚜껑에 못을 박는 망치소리로 들렸을 만큼 크나큰 좌절과 절망에 빠져있던 화자는 문득 시선을 안으로 돌려 스스로를 바라봅니다.
거기 자신의 내부에, 그 어두운 내부의 한 구석에 '소년'이 있네요. 고개를 어깨 사이에 묻은 채 웅크린 '소년'이네요. 화자의 심정으로 보아 '소년'은 지금 울고 있네요. '바닷가의 무덤'은 화자의 슬픔이 정박해 있는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겠습니다.
화자는 말합니다. 자신의 '마음'에게 '상복(喪服)'을 입어라고요. 그리고 그 무덤에 찾아가라고 합니다. 아니, '찾아가라'가 아니라 '찾아가렴'이라고 달래듯 말하고 있네요. 자신의 '마음'을 다독이면서요.
그 '소년'은 화자의 '상처 입은 내면의 아이'였네요. 그 아이의 동해(童骸)가 든 관에 못을 박는 '빗소리'는 아이가 감당할 수 없었던 시대의 상처였겠습니다. 그렇게 어린 시절의 아픔은 어떤 힘으로도 빼낼 수 없는 못이 되어 마음 구석에 박혀 있었네요. 위로와 사랑 말고 무엇이 필요하겠는지요. 가만히 안아주고 토닥토닥 등을 두드려주는 수밖에요.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목욕'에서 장만영 시인님의 시 '달, 포도, 잎사귀'를 만나 보세요.
'읽고 쓰고 스미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희 뜻 유래 인생칠십고래희 두보 (99) | 2023.12.09 |
---|---|
김현승 시 견고한 고독 (114) | 2023.12.08 |
정태춘 노래 빈산 (113) | 2023.12.06 |
내사랑 백석 자야 이백 자야오가 (121) | 2023.12.05 |
황동규 시 조그만 사랑노래 (116) | 2023.12.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