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승 시인님의 시 '견고한 고독'을 만나봅니다. 우리 모두 빠져나오고 싶어하는 고독, 그런데 시인님은 자초해서 고독을 추구합니다. 그것도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고독'을요. 시인님이 건네주는 '견고한 고독' 속으로 들어가 함께 마음을 씻으며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김현승 시 '견고한 고독' 읽기
견고(堅固)한 고독
- 김현승(1913~1975, 평양 출생)
껍질을 더 벗길 수도 없이
단단하게 마른
흰 얼굴.
그늘에 빚지지 않고
어느 햇볕에도 기대지 않는
단 하나의 손발.
모든 신(神)들의 거대(巨大)한 정의(正義) 앞엔
이 가느다란 창끝으로 거슬리고,
생각하던 사람들 굶주려 돌아오면
이 마른 떡을 하룻 밤
네 살과 같이 떼어 주며,
결정(結晶)된 빛의 눈물,
그 이슬과 사랑에도 녹쓸지 않는
견고(堅固)한 칼날 - 발 딛지 않는
피와 살.
뜨거운 햇빛 오랜 시간(時間)의 회유(懷柔)에도
더 휘지 않는
마를 대로 마른 목관악기(木管樂器)의 가을
그 높은 언덕에 떨어지는,
굳은 열매
쌉쓸한 자양(滋養)
에 스며 드는
에 스며 드는
네 생명(生命)의 마지막 남은 맛!
- 「김현승 시전집」(김인섭 엮음/해설, 민음사, 2005년) 중에서
2. 고독에 파묻혀 고독을 추구한 까닭은?
김현승 시인님은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로 시작되는, 우리 모두 사랑하는 시 '가을의 기도'를 쓴 시인님입니다.
그런데요, 김현승 시인님은 유독 고독에 매달리고 고독에 파묻혔습니다. 고독에 얼마나 천착했을까요?
「견고한 고독」과 「절대고독」이라는, '고독'이 든 제목의 시집을 2권이나 냈습니다. 또한 시 제목에 '고독'이 들어있는 시만 10편 - '인간은 고독하다' '견고한 고독' '고독' '절대고독' '고독의 순금' '고독한 싸움' '고독의 끝' '고독한 이유' '군중 속의 고독' '고독의 시' - 을 썼습니다.
이는 매우 이례적입니다.
시인님! 보통 사람들은 빠져나오고 싶고, 빠져나오려 몸부림치는 고독에, 시인님은 왜 스스로 그렇게 파묻혀 있었습니까?
고독 속에 파묻히는 것은 감상이나 위축이 아니다.
고독을 추구하는 것은 허무의식과도 그 색채가 다르다.
고독을 표현하는 것은 나에게는 가장 즐거운 시 예술의 활동이며,
윤리적 차원에서는 참되고 굳세고자 함이 된다.
고독 속에서 나의 참된 본질을 알게 되고
나를 거쳐 인간 일반을 알게 되고
그럼으로써 나의 대사회적 임무까지도 깨달아 알게 되므로.
- 위의 같은 책 속에 실린 '김현승 제4시집 시집 「절대고독」의 자서(自序)' 중에서
그렇네요. 우리가 빠져나오고 피하려고 하는 것이 고독인데, 시인님은 오히려 참되고 굳세어지려고 고독을 추구한다고 합니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시 '견고한 고독'을 만납니다.
'견고한 고독'은 1965년 「현대문학」에 발표됐습니다. 시인님 53세 즈음이네요.
이 시는 1968년에 발간된 시인님의 제3시집 「견고한 고독」의 표제시입니다. 시집에서 세 번째 시로 실려있습니다.
제목에 나오는 '견고하다'는 '굳고 단단하다', 또는 '사상이나 의지 따위가 동요됨이 없이 확고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시 '견고한 고독'은, 시인님이 추구하는 고독이 누구로부터도, 어떤 것으로부터도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것이라는 점을 말하고 있네요.
이런 고독은 시인님의 의지가 들어있는, 시인님이 스스로 의도적으로 또는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특별한 고독입니다.
껍질을 더 벗길 수도 없이 / 단단하게 마른 / 흰 얼굴
그늘에 빚지지 않고 / 어느 햇볕에도 기대지 않는 / 단 하나의 손발
- 김현승 시 '견고한 고독' 중에서
화자가 추구하는 고독의 모습을 보여주는 구절입니다. '흰 얼굴'. 이런 얼굴에는 표정이 없을 것 같습니다. 표정이 없다는 말은 인간적 감정이 소거된 상태입니다. 화자는 자신의 삶의 요소였던 감정의 '껍질을 더 벗길 수도 없이' 건조시켜서 드디어 희로애락에 좌우되지 않는 '견고한 고독'의 상태에 이르고자 합니다.
'단 하나의 손발'. 여기저기 손 벌리지 않고, 그 '빚'을 얻기 위해 그곳으로 발걸음 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화자는 오로지 자신이 추구하는 '견고한 고독'에 이르기 위한 '단 하나의 손발'이 필요할 뿐이라고 합니다.
이런 마음은 구도자의 자세를 떠올립니다. 이 문장을 함께 읽습니다.
맑은 이성으로 마음을 통일하고 굳센 뜻으로 자기를 억제하며 소리 따위 감각의 대상을 물리치고 좋고 언짢고를 내버리고
(중략)
아집·폭력·오만·욕망·분노·탐욕을 벗어나 아욕(我慾)이 없고 마음이 잔잔한 사람은 브라만과 하나 됨을 얻을 수 있느니라.
- 「바가바드 기타」(함석헌 주석, 한길사, 1996년 1쇄, 2021년 16쇄) 중에서
화자가 '견고한 고독'을 추구하는 과정은 이처럼 철저한 자기 수행인 것만 같습니다. '그늘'과 '햇볕', 어느 쪽에게도 기울지 않고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는 고독. 이런 '고독 수행'은 결국 자신을 더욱 굳세게 만들기 위한 것이었네요.
모든 신(神)들의 거대(巨大)한 정의(正義) 앞엔 / 이 가느다란 창끝으로 거슬리고
생각하던 사람들 굶주려 돌아오면 / 이 마른 떡을 하룻밤 / 네 살과 같이 떼어 주며
- 김현승 시 '견고한 고독' 중에서
'견고한 고독'을 추구하는 화자의 인식은 신들의 거대한 정의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고통받고 있다고 합니다. 신앙의 절대적 가치에 국한하지 않고 인간에 대한 이해와 동정에 더 몰두하는 모습이네요.
그래서 신들의 정의 앞에 창끝(곧은 신념)으로 거슬리고 굶주린 사람들에게 마른 떡을 자신의 살과 같이 떼어준다고 합니다. 인간의 본질을 이루는 기본 정신, 기본 가치를 지향하는 것이 '견고한 고독'을 추구하는 이의 자세입니다.
3. 고독은 인간의 궁극적 본질이자 최후의 가치
결정(結晶)된 빛의 눈물, / 그 이슬과 사랑에도 녹쓸지 않는
견고(堅固)한 칼날 - 발 딛지 않는 / 피와 살
- 김현승 시 '견고한 고독' 중에서
'결정된 빛의 눈물'. 자신을 더욱 강하게 만들기 위한 육체적 정신적 수련과정에서 수반되는 수많은 날들의 시련이 느껴집니다. 어떠한 유혹에도 훼손되지 않는 견고한 칼날을 향한 시간, 단단하게 결정(結晶)된 눈물의 시간 말입니다.
뜨거운 햇빛 오랜 시간(時間)의 회유(懷柔)에도 / 더 휘지 않는
마를 대로 마른 목관악기(木管樂器)의 가을
그 높은 언덕에 떨어지는, / 굳은 열매 / 쌉쓸한 자양(滋養)
에 스며 드는 / 에 스며 드는 / 네 생명(生命)의 마지막 남은 맛!
- 김현승 시 '견고한 고독' 중에서
'마를 대로 마른 목관악기'. 화자가 추구해 온 '견고한 고독'의 형상입니다. 햇빛의 오랜 회유에도 더 휘지 않는 목관악기입니다. 수분이 완전히 제거된 나무의 원형질만 남은 상태입니다. 이는 삶의 부차적인 것들이 제거된 인간의 궁극적 본질을 상징하네요.
그러나 이 마지막 연에서도 화자가 추구하는 '견고한 고독'은 미완성입니다.
그동안 화자는 견고한 정신적 가치라는 결실('굳은 열매')을 얻기 위해 자신의 쓰디쓴 고난의 시간을 자양(滋養)으로 바쳐왔습니다. 이제 최후의 가치인 고독의 완성을 위해서는 '네 생명의 마지막 남은 맛'이 스며들어야 한다고 합니다.
'생명의 맛'. 이것은 생명에 대한 인식, '나'에 대한 인식을 의미하는 것으로 새깁니다. '네 생명의 마지막 남은 맛'이 '굳은 열매'에 스며드는 상황은 '나'가 완전히 사라져 화자가 추구하는 고독이 완성되는 과정을 말하네요.
이렇게 '네 생명의 마지막 남은 맛'마저 남김없이 쏟아부어야 이룰 수 있는 것이 화자의 절대가치입니다.
이는 '나'라는 개념이 소멸된 상태, 자타(自他)의 관계 개념을 초월해 자유로워진 무아(無我)의 상태일 것입니다. 이는 결국 시인님이 절차탁마 추구해 온 고독 속에서 '나'의 참된 본질을 찾아낸 깨달음의 상태입니다.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목욕'에서 김현승 시인님의 시 '자화상'을 만나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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