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옥 시인님의 시조 '봉선화'를 만납니다. 손톱에 봉선화 꽃물 들이던 평화로운 시간으로 데려다주는 시조입니다. 함께 읽으며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김상옥 시조 '봉선화' 읽기
봉선화
김상옥(1920~2004년, 경남 통영)
비 오자 장독간에 봉선화 반만 벌어
해마다 피는 꽃을 나만 두고 볼 것인가
세세한 사연을 적어 누님께로 보내자.
누님이 편지 보며 하마 울까 웃으실까
눈앞에 삼삼이는 고향집을 그리시고
손톱에 꽃물 들이던 그날 생각하시리.
양지에 마주 앉아 실로 찬찬 매어주던
하얀 손 가락 가락이 연붉은 그 손톱을
지금은 꿈속에 본 듯 힘줄만이 서누나.
▷「김상옥 시전집선」(김상옥 지음, 창비, 2005년) 중에서
2. 봉선화를 보면 누가 떠오르나요?
한국시조문학의 대표 시인으로 꼽히는 김상옥 시인님이 20세 때 쓴 시조가 '봉선화'입니다.
'봉선화'는 시인님의 등단작입니다. 시인님은 1939년 「문장」지 9호에 '봉선화'로 가람 이병기 님의 추천을 받아 등단했습니다.
20세의 청년 김상옥 시인님이 쓴 '봉선화'는 어떤 시조일까요?
봉선화는 봉숭아라고도 합니다. 여름에 피는 꽃입니다. 종류에 따라 빨간색, 주홍색, 분홍색, 보라색, 흰색의 어여쁜 꽃을 피우는 봉선화를 만납니다.
'비 오자 장독간에 봉선화 반만 벌어 / 해마다 피는 꽃을 나만 두고 볼 것인가 / 세세한 사연을 적어 누님께로 보내자'
'반만 벌어'. 비 온 뒤 장독간에 봉선화가 반만 벌었다고 합니다. '벌어'는 '틈이 나서 사이가 뜨다'는 뜻의 '벌다'에서 나온 말인데, '벌어져'보다 더 정감 있는 시어네요. 발간 봉선화 꽃이 삐죽이 벌어지고 있는 모습이 눈앞에 보이는 것만 같습니다.
아파트에서는 장독간을 보기 어렵습니다. 간장과 된장이 익어가는 장독들이 옹기종기 앉아있는 시골집 장독간에 봉선화가 막 피기 시작했네요. 그 봉선화를 보자마자 누님이 생각났네요. 누님은 시집을 갔나 봅니다. 이렇게 편지를 썼을까요?
- 누님, 우리 집 장독간에 봉선화가 피었어요. 오늘 보니 꽃이 반쯤 벌었어요. 그 빨간 꽃을 보니 누님 생각이 나네요.
봉선화를 보고 왜 누님이 떠올랐을까요?
'누님이 편지 보며 하마 울까 웃으실까 / 눈앞에 삼삼이는 고향집을 그리시고 / 손톱에 꽃물 들이던 그날 생각하시리'
'손톱에 꽃물 들이던 그날 생각하시리'. 손톱에 봉선화 꽃물을 들였군요! 시인님은 봉선화를 보고 누님이 생각났고, 누님과 손톱에 꽃물 들이며 놀던 시간이 생각났네요.
'하마'라는 시어가 이 시에 활력을 불어넣네요. '행여나 어찌하면'의 뜻입니다. 자신의 편지를 받아본 누님의 반응을 떠올리며 가슴을 졸이는 시인님의 마음이 느껴지네요.
고향집 동생의 편지를 받은 누님은 반갑고 그리워 울기도 웃기도 했겠지요?
이렇게 세상의 봉선화에는 얼마나 저마다의 애틋한 그리움이 묻어있겠는지요!
3. 평생 지울 수 없는 그리움, 봉선화 꽃물 들이기
'양지에 마주 앉아 실로 찬찬 매어주던 / 하얀 손 가락 가락이 연붉은 그 손톱을 / 지금은 꿈속에 본 듯 힘줄만이 서누나'
그런데요, 소년 때 시인님은 손톱에 봉선화 꽃물을 들였네요. 얼레리꼴레리네요!
남자아이들은 손톱에 봉선화 꽃물을 들이지 않거든요. 꽃물 들이는 누이한테 끼어서 꽃물 들여달라고 손을 내밀면 못 들이게 했거든요. 사내아이는 하는 거 아니라고요.
그런데 이 누님은 남동생 손톱에 꽃물을 들여주었네요. 그것도 '양지에 마주 앉아' 말입니다. 얼마나 다정하고 또 애틋한지요.
봉선화 꽃물 들이기는 이렇게 합니다. 봉선화 꽃잎을 넓적한 돌 위에 놓고 백반을 뿌려 작은 돌로 찧습니다. 그 찧은 꽃덩이를 열 개의 손톱 위에 조금씩 얹은 뒤에 헝겊으로 싸서 실로 감습니다. 하룻밤 자고 나서 헝겊을 풀면 봉선화 꽃물이 손톱에 곱게 스며들게 됩니다.
'실로 찬찬 매어주던'. '찬찬'이라는 시어도 멋지네요. '찬찬하다'의 어근인데, '성질이나 솜씨 행동 따위가 꼼꼼하고 차분하다'는 뜻이네요.
'양지에 마주 앉아 실로 찬찬 매어주던'. 찧은 꽃덩이를 손톱에 알맞게 올려 헝겊으로 매는 장면이네요. 요즘 많이 하는 '네일아트' 풍경이네요.
누님의 자상한 손길에 손을 맡긴 소년은 얼마나 평화로웠을까요? 손가락에 조심조심 실을 매던 누님의 고른 숨결이 다 느껴지고요, 우리 상옥이 손톱 더 예쁘게 만들어줄게, 하는 누님의 다정한 마음도 다 느껴지고요.
이 장면은 시인님의 뇌리에 각인된 아름다운 한 장의 '인생컷'일 것입니다. 봉선화만 보면 누님이 떠오르는 까닭이겠네요.
'지금은 꿈속에 본 듯 힘줄만이 서누나'. 시인님은 예전의 추억을 떠올리며 자신의 손가락을 바라보았네요. 어릴 때 봉선화 꽃덩이 올리던 그 여리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아니겠지요? 힘줄이 돋고 굵어진 손가락입니다.
그래서 '하얀 손 가락 가락' '연붉은 그 손톱'은 '꿈속에 본 듯하다'라고 하네요. 그 시절의 평화로운 시간으로 돌아가고 싶은 시인님의 그리움이 느껴집니다.
이처럼 다정한 누님이 있었다면! 빗방울이네에게는 누님이 없었답니다. 빗방울이네의 어린 시절, 남자아이에겐 봉선화 꽃물 들일 기회도 없었답니다.
그런데도 이 시조를 읽으니 누님한테 손가락을 맡긴 평화로운 소년이 되네요.
'누부야, 머시마가 손톱에 물들였다고 친구들이 놀리면 어떡하지?' '그러면 주먹을 꼭 쥐고 있으면 돼.' '아, 맞네!'
그렇게 손톱에 천천히 빨간 꽃물이 스며 들어갔겠지요? 그렇게 마음에 천천히 애틋한 추억이 스며 들어갔겠지요? 평생 지울 수 없는 그리움이 되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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