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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스미기

서정주 시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읽기

by 빗방울이네 2023. 10.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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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주 시인님의 시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를 만납니다. 시인님이 퍼올려주는 사유의 목욕물로 마음을 씻으며 저마다의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서정주 시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읽기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 서정주(1915~2000, 전북 고창)

 

섭섭하게,

그러나

아주 섭섭지는 말고

좀 섭섭한 듯만 하게,

 

이별이게,

그러나

아주 영 이별은 말고

어디 내생에서라도

다시 만나기로 하는 이별이게,

 

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 아니라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

 

엊그제

만나고 가는 바람 아니라

한두 철 전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

 

- 서정주 시집 「질마재로 돌아가다」(미래문화사, 2001년 1쇄, 2002년 3쇄) 중에서

 

2. '좀 섭섭한 듯만 하게'

 

서정주 시인님의 시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는 1968년 발간된 시인님의 제5시집 「동천」에 수록된 작품입니다. 이 시집 가운데서도 백미로 꼽히는 작품입니다. 시인님 50대 초반 즈음 쓰인 시네요. 삶에서 수많은 희노애락의 강과 산을 건너왔을 시기입니다. 

 

섭섭하게, / 그러나 / 아주 섭섭지는 말고 / 좀 섭섭한 듯만 하게,

- 서정주 시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중에서

 

1연은 이별에 대한 시인님의 자세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이 시 속에 나오는 이별은, 뒤에 나오는 2연의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죽음입니다. 이 시는 죽음에 대한 시인님의 자세를 말하고 있는 걸까요?

 

'그러나'를 한 개의 행으로 배치했네요. 그만큼 이 접속사에서 시인님의 목소리가 강하게 들리네요. 뒤에 나올 구절에 방점이 찍힌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좀 섭섭한 듯만 하게'가 중요하네요.

 

시인님은 그렇게 '아주 섭섭지는 말고 좀 섭섭한 듯만 하게' 떠날 수 있기를 희망하는 걸까요? 이별을 두려워하지 않고 섭섭하게 여기지 않고 그렇게 담담하게 여유롭게 떠날 수 있다면 그것은 얼마나 멋진 떠남인지요?

 

이별이게, / 그러나 / 아주 영 이별은 말고 / 어디 내생에서라도 / 다시 만나기로 하는 이별이게,

- 서정주 시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중에서

 

'이별이게'. 이 구절에서는 '이런 이별이었으면'이라는 함의가 느껴집니다. 죽음이 닥쳐오면 어쩔 것인가, 그러나 이런 죽음이라면, 다시 만나는 죽음이라면 따라가야지, 하는 시인님의 독백도 느껴집니다. 

 

죽으면 우리는 어디로 가는 걸까요? 불교에서 말하는 궁극적인 해탈은 윤회를 끊고 다시 어떤 모습으로도 생을 거듭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시인님은 그런 해탈은 원하지 않는 듯 보입니다.

 

시인님은 '어디 내생에서라도 / 다시 만나기로 하는 이별'이 될 수 있다면 좋겠다고 합니다. 그런 이별일 수 있도록, 그런 죽음을 맞을 수 있도록 살아가겠다는 시인님의 삶의 자세가 느껴집니다. 삶의 내용이 곧 죽음의 내용이 될 테니까요.

 

서정주시연꽃만나고가는바람같이중에서
서정주 시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중에서.

 

 

3.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연꽃 / 만나러 가는 / 바람 아니라 /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

- 서정주 시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중에서

 

'바람같이···'. 이 구절은 앞의 '이별이게'와 연결됩니다. 그 이별이 이러저러한 바람같은 이별이게, 라고 새겨집니다.

 

그러니까 이 3연은 죽음을 맞는 자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나는 죽음을 어떤 자세로 맞을 것인가! 나는 어떤 표정으로, 어떤 마음으로 떠날 것인가!

 

시인님은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떠나기를 바라고 있네요. 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은 미지(未知)를 향한 힘과 용기는 있어도 철부지입니다. 반대로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은 경륜과 지혜의 바람이겠네요.

 

시인님은 그런 '바람처럼' 떠날 수 있다면 좋겠다고 합니다.

 

엊그제 / 만나고 가는 바람 아니라 / 한두 철 전 /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

- 서정주 시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중에서

 

'한두 철 전'. 이 구절에서 '관조(觀照)'라는 단어가 떠오르네요. 사물이나 현상을 비추어보는 것을 말합니다. 경륜과 지혜에 더해 관조의 자세까지. 이런 자세의 바람처럼, 그렇게 훨훨 떠나가리라! 아니 그렇게 훨훨 떠나갈 수 있게 지금의 삶을 잘 살아가리라.  

 

그런데 이렇게 훨훨 자유롭게 떠날 수 있으려면, 지금 현생의 삶을 어떻게 잘 살아야 하겠는지요? 그 질문이 이 시 깊숙이 숨겨진 하얀 뼈인 것 같습니다.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목욕'에서 서정주 시인님의 시 '국화 옆에서'를 만나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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