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하림 시인님의 시 '메아리'를 만납니다. 오래된 우물을 찾아가 삶의 이유를 묻고 있네요. 우물은 무어라고 답했을까요? 마음의 옷을 벗고 함께 읽으며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최하림 시 '메아리' 읽기
메아리
- 최하림
오래된 우물에 갔었지요 갈대숲에 가려 수시간을 헤맨 끝에 간신히 바위 아래 숨은 우물을 발견했습니다 마을 장로들의 말씀으로는 성호 이익(星湖李瀷)선생께서 파셨다고도 하고 성호 문하에서 파셨다고도 하고 그보다 오래 전 사람들이 파셨다고도 했습니다 아무려면 어떻겠습니까마는 좌우지간 예사 우물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숙이고 벌컥벌컥 물을 마신 다음 우리가 살아야 할 근사한 이유라도 있는 것이냐고 가만히 물어보았습니다
우리가 살아야 할 근사한 이유라도 ··· 이유라도 ···
하고 메아리가 일었습니다 그와 함께 수면이 산산조각 깨어지고 얼굴이 달아났습니다 나는 놀래어 일어났지만 수면은 계속 파장을 일으키며 공중으로 퍼져가고 있었습니다
- 최하림 시집 「때로는 네가 보이지 않는다」(랜덤하우스중앙, 2005년) 중에서
최하림 시인님(1939~2010)은 전남 목포 출신으로 1964년 시 '빈약한 올페의 회상'이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등단했습니다.
1976년 첫 시집 「우리들을 위하여」를 비롯, 시집 「작은 마을에서」 「겨울 깊은 물소리」 「속이 보이는 심연으로」 「굴참나무숲에서 아이들이 온다」 「풍경 뒤의 풍경」 「때로는 네가 보이지 않는다」 등이 있습니다.
시선집 「사랑의 변주곡」 「햇볕 사이로 한 의자가」 등이, 판화 시선집 「겨울꽃」 등이, 미술 산문집 「한국인의 멋」, 김수영 평전 「자유인의 초상」, 최하림 문학산책 「시인을 찾아서」 등이 있습니다.
제11회 이산문학상, 제5회 현대불교문학상. 제2회 올해의 예술상 문학 부분 최우수상 등을 수상했습니다.
2. 오래된 우물을 찾아간 이유는 무얼까요?
이 시는 시인님의 마지막 시집(제7시집) 「때로는 네가 보이지 않는다」에 실려있습니다. 2003년 시인님 64세 때 발표된 시입니다.
오래된 우물에 갔었지요
갈대숲에 가려 수시간을 헤맨 끝에 간신히 바위 아래 숨은 우물을 발견했습니다
- 최하림 시 '메아리' 중에서
시의 화자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왜 오래된 우물을 애써 찾아갔을까요? 문득 ‘진리’에 대한 목마름이 느껴지네요. 나의 갈증을 해소해 줄 우물은 갈대숲에 가려져 있었고 바위 아래에 숨어 있었네요. ‘수시간을 헤맨 끝에 간신히’ 찾아냈네요.
마을 장로들의 말씀으로는 성호 이익(星湖李瀷) 선생께서 파셨다고도 하고
성호 문하에서 파셨다고도 하고 그보다 오래 전 사람들이 파셨다고도 했습니다
아무려면 어떻겠습니까마는 좌우지간 예사 우물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 최하림 시 '메아리' 중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우물은 주위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깊은 내력을 가진 오래된 우물은 '예사 우물은 아닌 것' 같습니다. 무슨 질문이든 답해줄 수 있을 것 같네요.
여기서 우리는 차갑고 맑고 깊은 '우물'과 차갑고 맑고 깊은 '고전(古典)’의 이미지가 겹쳐지면서 의미가 증폭되는 것을 느낍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숙이고 벌컥벌컥 물을 마신 다음
우리가 살아야 할 근사한 이유라도 있는 것이냐고 가만히 물어보았습니다
- 최하림 시 '메아리' 중에서
’천천히 고개를‘ 숙였지만 ’벌컥벌컥 물을‘ 마셨네요. 얼마나 목이 마른 상태인지 느껴집니다. 그리고는 우물에게 묻습니다. ’살아야 할 근사한 이유‘라도 있느냐고요. 삶의 어떤 막다른 벽에 다다랐을 때 우리는 이처럼 절박한 질문을 던지게 되네요.
우리가 살아야 할 근사한 이유라도 ··· 이유라도 ···
하고 메아리가 일었습니다
- 최하림 시 '메아리' 중에서
우리도 우물 속에 머리를 쑤셔 넣은 듯 공명으로 인해 점점 파장이 일면서 서라운드로 퍼져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네요. 과연 이 오래된 신비의 우물은 어떤 대답을 내놓았을까요?
3. '우리가 살아야할 근사한 이유라도 ··· 이유라도 ···'
딱 하나의 문장으로 된 명쾌한 답을 원하는 이에겐 송구하지만요, 우물은 그 질문을 다시 돌려주네요.
우리가 살아야 할 근사한 이유라도 ··· 이유라도 ···
- 최하림 시 '메아리' 중에서
이 시의 제목이 ‘메아리’입니다. 메아리는 되울려오는 소리입니다. ‘살아야할 근사한 이유’를 물었는데 우물은 메아리로 되물었네요.
그와 함께 수면이 산산조각 깨어지고 얼굴이 달아났습니다
나는 놀래어 일어났지만
- 최하림 시 '메아리' 중에서
그리고 그 메아리의 파장 때문에 우물의 수면이 깨어져 거기 비쳤던 화자의 얼굴이 달아났다고 합니다. 없어진 게 아니고 달아났다고 하네요. 성현들이 파셨다는 오래된 우물의 꾸지람으로 느껴졌을까요? 화자는 놀라 일어납니다.
‘살아야 할 근사한 이유’에 대한 우물의 대답, '메아리'는 우물의 명답이네요. 그런 질문은 나(우물)에게 하지 말고 네 자신에게 하라는 말이네요. ’살아야 할 근사한 이유’는 네 자신이 찾아야 한다고요. 과연 누가 그 이유를 가르쳐줄 수 있을까요? 개별적인 삶의 당사자만이 찾을 수 있는 대답인데요.
수면은 계속 파장을 일으키며 공중으로 퍼져가고 있었습니다
- 최하림 시 ‘메아리’ 중에서
그 질문의 메아리는 우물에 비친 공중으로 한없이 퍼져갑니다. 이렇게 이 질문은 멈출 수 없는 질문입니다. 삶이 다하는 날까지요. ‘살아야 하는 근사한 이유’를 자신에게 끊임없이 묻고 찾으며 또 묻고 찾으며 가는 것이 바로 우리네 삶일 테니까요.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목욕'에서 김현승 시인님의 시 '가을의 기도'를 만나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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