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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스미기

김현승 시 가을의 기도 읽기

by 빗방울이네 2023. 9.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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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승 시인님의 시 ‘가을의 기도’를 만납니다. 이 시는 저 높은 ‘마른 나뭇가지’ 위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거기에 무엇이 있을까요? 함께 읽으며 마음을 씻으며 독서목욕을 해보십시다.

1. 김현승 시 ‘가을의 기도’ 읽기


가을의 기도(祈禱)

- 김현승(1913~1975, 평양)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
낙엽(落葉)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謙虛)한 모국어(母國語)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肥沃)한
시간(時間)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을로 있게 하소서 ···
나의 영혼,
구비치는 바다와
백합(百合)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 같이
 

- 「다형김현승전집 운문편·산문편」(다형김현승시인기념사업회, 2012년) 중에서

 

2. 왜 이 시에 까마귀가 등장했을까요?


이 시는 김현승 시인님 43세 때인 1956년 「문학예술」에 발표됐습니다. 장년기의 정점에 있던 시인님은 어떤 가치를 추구하며 살고자 하였을까요?

그런데요, 이 시를 읽다보면 마지막에 ‘까마귀’ 한 마리가 불쑥 등장합니다. 많은 새 중에서 왜 하필 시커먼 까마귀? 하면서 좀 당혹스러울 수 있습니다. 까마귀에 대한 우리의 편견 때문일 것입니다. 시인님은 까마귀를 어떤 존재로 보았을까요?

모든 빛깔을 억누른 검은 빛깔로 저 자신을 두르고
기쁨과 슬픔을 초월한 거친 소리로 울고 가는
광야의 시인, 저 까마귀의 소리를 귀 기울여 들어보라!

- 김현승 산문 ‘겨울 까마귀’ 중에서(「다형김현승전집 운문편·산문편」)


그렇군요. 까마귀를 ‘광야의 시인’으로 보았군요. 고독의 상징이네요. 기쁨과 슬픔을 초월하려는 존재 말입니다. 까마귀에 대한 이 같은 인상을 말풍선처럼 머리 위에 올려두고 시로 들어갑니다.

가을에는 / 기도하게 하소서 ···

- 김현승 시 ‘가을의 기도’ 중에서


기도를 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네요. 내면으로 시선이 모아지면서 마음을 맑히는 계절이 가을인 것 같습니다. 기도를 해왔던 사람은 더 깊은 기도를, 기도를 잘하지 못했던 사람은 마음을 모아 기도를 하고 싶어지는 구절이네요.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 김현승 시 ‘가을의 기도’ 중에서


낙엽이 지면 마음이 낮아집니다. 봄부터 여름까지 나무를 키워주고 열매를 익혀주었던 잎입니다. 그 경이로운 일을 하고 떠나는 잎입니다. 그 낙엽을 보면 몸과 마음이 다소곳해질 수밖에 없겠네요. 반성과 사색의 시간입니다. 나를 이끌던 욕망을 다 비운 뒤의 순정한 언어로, 아이에게 처음 건네준 어머니의 언어로 나를 채우는 절실한 기도라면 당신에게 닿을 수 있겠지요?

가을에는 / 사랑하게 하소서 ···

- 김현승 시 ‘가을의 기도’ 중에서


가을의 두 번째 염원은 사랑을 하게 해 달라는 거네요. 아직 사랑을 만나지 못한 그대라면 가을에는 부디 사랑을 만나시길!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 김현승 시 ‘가을의 기도’ 중에서


그런데 세속적인 사랑은 아닌 듯합니다. 절대자에게 가까이 가려는 소망이네요. ‘가장 아름다운 열매’는 구원일 것입니다. 높은 정신의 경지인 깨달음일 수도 있겠고요. 시인님은 오로지 그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겠다고 합니다. 그런 열매를 맺게 하려면 나뭇잎이 그랬듯이 얼마나 정성을 다해야겠는지요. 쉼 없이 물을 당기고 햇빛을 모아야 합니다. 그 순도 높은 열정의 시간, 몰입의 시간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김현승시가을의기도중에서
김현승 시 '가을의 기도' 중에서.

 

 

3. 고독의 궁극에서 자기 초극의 경지를 향하다


가을에는 / 호을로 있게 하소서 ···

- 김현승 시 ‘가을의 기도’ 중에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관계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지요?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맺기 위해 세속의 욕망과 번뇌로부터 벗어나고자 합니다. 시인님은 새벽에 홀로 커피숍에서 차를 마시며 하루를 시작했고, 문단이나 사람들로부터 떨어져 홀로 되기를 스스로 원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고독을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는데 시인님은 고독의 다정한 벗이었네요. 그 고독 속에서 시인님은 무엇을 추구하였을까요?

나의 영혼 / 구비치는 바다와 /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와 같이

- 김현승 시 ‘가을의 기도’ 중에서


‘나의 영혼’이 ‘까마귀 같이’ 홀로 있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드디어 맨마지막에 까마귀가 등장했습니다. 까마귀는 시인님이기도 하네요.
 
어느날 문득 나무를 쳐다보았는데 거기 조용히 앉아있는 까마귀를 본 적이 있습니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을까요? 까마귀는 어디로부터 날아왔을까요?

‘구비치는 바다’를 거쳐왔네요. 오욕칠정(五慾七情)’이 구비치는 저마다의 삶의 바다 말입니다.
 
백합은 순결과 변함없는 사랑을 상징합니다. 까마귀는 그런 환희의 세계인 ‘백합의 골짜기’까지 다 거쳐왔다고 합니다.

앞에서 읽었던, 까마귀에 대한 시인님의 문장을 다시 떠올려봅니다.

모든 빛깔을 억누른 검은 빛깔로 저 자신을 두르고 기쁨과 슬픔을 초월한 거친 소리로 울고 가는 광야의 시인

- 김현승 산문 ‘겨울 까마귀’ 중에서(「다형김현승전집 운문편·산문편」)


시인님에게 까마귀는 ‘기쁨과 슬픔을 초월한’ 존재입니다. ‘구비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다 건너온 존재가 까마귀네요.

그런 까마귀가 지금 앉아 있는 곳이 ‘마른 나뭇가지’입니다. 시인님은 ‘나의 영혼’이 ‘까마귀 같이’ 홀로 있게 해 달라면서, 그렇게 홀로 있는 자리가 ‘마른 나뭇가지’이기를 기도합니다.

마른 나뭇가지!

잎을 떨어뜨리고 수분도 빠져버렸네요. 나무 몸체와의 연결도 끊어졌습니다. 희노애락마저 다 비워졌을까요? 그러면 무엇이 남을까요? 핵심(core), 본질만 남았네요.

시인님은 그런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와 같이’ ‘나의 영혼’이 홀로이기를 기도합니다. 이렇게 시인님은 이 가을, 고독의 궁극에 도달한 영혼이 되기를 염원하네요.

온몸 온마음으로 고독을 받아들여 자기 초극의 경지에 이르기를 갈망하는 시인님을 생각합니다. 그런 경지를 상상하지 못할지라도 우리 이 가을에는 무엇이든 조금씩 끊고 비워보기를 기원해 봅니다.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목욕’에서 김현승 시인님의 시 ‘플라타너스’를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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