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병 시인님의 시 '새'를 만납니다.
고단하고 슬픈 현실을 직시하며, 욕망의 집착에서 자유로운 영혼의 길을 생각하게 하는 시입니다.
함께 읽으며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천상병 시 '새' 읽기
새
천상병(1930~1993, 일본 출생 창원 성장)
외롭게 살다 외롭게 죽을,
내 영혼(靈魂)의 빈터에
새날이 와, 새가 울고 꽃잎 필 때는,
내가 죽는 날
그 다음 날.
산다는 것과
아름다운 것과
사랑한다는 것과의 노래가
한창인 때에
나는 도랑과 나무가지에 앉은
한 마리 새.
정감(情感)에 그득찬 계절(季節),
슬픔과 기쁨의 주일(週日),
알고 모르고 잊고 하는 사이에
새여 너는
낡은 목청을 뽑아라.
살아서
좋은 일도 있었다고
나쁜 일도 있었다고
그렇게 우는 한 마리 새.
- 천상병 시집 「새」(1971년 간행된 시집의 번각본, 도서출판 답게, 2020년) 중에서
2. 천상병 시인이 29세에 발표한 시 '새'
천상병 시인님의 생애를 요약한 문장부터 만나 봅니다.
'온몸으로 자유로운 삶과 시를 쓰다 간 시인'
'상업주의나 물질만능과 불화하며
가난 속에서 행복을 말하며
아이 같은 동심 속에서 한 시대를 살다간 시인'
- 「천상병 시선」(박승희 엮음) 중에서.
시인님 삶(1930 ~ 1993)의 키워드는 '자유'와 '가난'과 '순수'이네요.
시 '새'는 1959년 5월 「사상계」에 발표된 시입니다.
천상병 시인님 29세 때입니다.
시인님은 1952년 「문예」지 추천으로 등단한 이후 1954년 서울대 상과대학을 수료하고 시와 평론, 외국서적 번역 등 창작활동을 활발하게 펼쳤습니다.
시 '새'는 이 즈음에 발표된 초기 작품입니다.
평생 '자유와 가난과 순수'의 삶을 살다간 시인님의 청년시절에는 삶이란 어떤 것이라고 생각했을까요?
'새'를 만나러 가는 길을 여러 갈래이겠지만, 오늘은 독서목욕이 낸 오솔길을 따라가 봅니다.
'외롭게 살다 외롭게 죽을 / 내 영혼(靈魂)의 빈터에
새날이 와, 새가 울고 꽃잎 필 때는 / 내가 죽는 날 / 그 다음 날'
'외롭게 살다 외롭게 죽을' 것이라는 삶의 정의에 가슴이 찡해지네요.
우리네 삶이 결국 외로운 것일 수밖에 없다는 이 구절은, 생(生)은 바로 '고(苦)'라는 부처님의 문장을 떠올리게 합니다.
'새가 울고 꽃잎 필 때'란 살아서는 없을 것이라는 청년 천상병의 예감은 너무나 담담하기에 더욱 아프게 다가오네요.
시인님이 생각하는 '새가 울고 꽃잎 필 때'란 어떤 시간일까요?
삶의 고통에서 해방될 때일까요? 생로병사(生老病死)로 점철된 삶의 시간에서 벗어나는 때 말입니다.
그런 자유로운 날은 '내가 죽는 날'이라고 하네요.
이승에서의 삶을 끝내고 오욕칠정(五慾七情)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순간이라고 하네요.
'그 다음 날'은 어떤 날일까요?
죽음 이후에 새롭게 시작되는 '새날'일 것입니다.
그 '새날'에 '내 영혼'은 맑게 씻겨 그 '영혼의 빈터'에 새가 날아온다고 하네요.
이 새는 새로운 차원으로 거듭난, 얽매임 없는 시인님의 자유로운 영혼일 것입니다.
'산다는 것과 / 아름다운 것과 / 사랑한다는 것과의 노래가 / 한창인 때에
나는 도랑과 나무가지에 앉은 / 한 마리 새'
우리에게 '산다는 것', '아름다운 것', '사랑한다는 것'을 객관화시켜 바라보게 하는 구절입니다.
그런 것들과 거리가 떨어져 있는 '도랑과 나뭇가지에 앉은 한 마리 새'처럼 말입니다.
세상에서 소외된 존재의 아득히 깊은 고독이 느껴지기도 하도, 삶에 대한 고요한 관조(觀照)의 자세가 느껴지기도 합니다.
새라는 존재는 언제나 사람 사는 세상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집착 없는 삶, 자유로운 삶에 대해 생각하는 시인님의 담담한 마음이 전해져 오는 것만 같습니다.
3. 슬프고 고단한 삶에서 자유롭고 행복한 영혼으로
'정감(情感)에 그득찬 계절(季節) / 슬픔과 기쁨의 주일(週日),
알고 모르고 잊고 하는 사이에 / 새여 너는 / 낡은 목청을 뽑아라'
'새여 너는 / 낡은 목청을 뽑아라'라는 구절이 애연하게 다가오네요.
'나는 도랑과 나뭇가지에 앉은 한 마리 새'라고 했으니, 이 구절은 '나' 자신에게 하는 말입니다.
'목청을 뽑아라'라는 말은 큰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라는 뜻입니다.
'슬픔과 기쁨'이 때때로 번갈아 출몰하는 삶입니다.
'새'는 그런 세속의 슬픔과 기쁨에 관계없이 노래합니다.
'외롭게 살다 외롭게 죽을' '나'이기에 당당하게 나의 길을 가리라고 다짐하는 것만 같습니다.
슬픔과 기쁨, 괴로움과 즐거움을 평등하게 바라보면서 아우르며 가는 길 말입니다.
'살아서 / 좋은 일도 있었다고 / 나쁜 일도 있었다고 / 그렇게 우는 한 마리 새'
좋은 일과 나쁜 일, 슬픔과 기쁨에 애욕하지 않고 '새'처럼 자유롭게 살고 싶어 하는 시인님의 내면이 느껴집니다.
자신이 죽은 후 새라는 존재를 통해 현재 삶을 바라보는 29세 시인님의 깊은 눈이 보이는 시입니다.
이 같은 삶에 대한 초월적인 태도는 그만큼 외롭고 고단하고 슬픈 삶의 현실을 더 진하게 투영해주는 것만 같습니다.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목욕'에서 천상병 시인님의 시를 더 만나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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