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읽고 쓰고 스미기

정호승 시 묵사발

by 빗방울이네 2024. 12. 2.
반응형

정호승 시인님의 시 '묵사발'을 만납니다. 무너지지 않으려 하고 부서지지 않으려 애쓰는 우리에게 무너지고 부서짐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시입니다. 함께 읽으며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정호승 시 '묵사발' 읽기

 

묵사발

 

정호승(1950년~ , 경남 하동 출생 대구 성장)

 

나는 묵사발이 된 나를 미워하지 않기로 했다

첫눈 내린 겨울산을 홀로 내려와

막걸리 한잔에 도토리묵을 먹으며

묵사발이 되어 길바닥에 내동댕이쳐진 나를 사랑하기로 했다

묵사발이 있어야 묵이 만들어진다는 사실에 비로소

나를 묵사발로 만든 이에게 감사하기로 했다

 

나는 묵을 만들 수 있는 내가 자랑스럽다

묵사발이 없었다면 묵은 온유의 형태를 잃었을 것이다

내가 묵사발이 되지 않았다면

나는 묵의 온화함과 부드러움을 결코 얻지 못했을 것이다

당신 또한 순하고 연한 묵의

겸손의 미덕을 지닐 수 없었을 것이다

내가 묵사발이 되었기 때문에 당신은 묵이 될 수 있었다

굴참나무에 어리던 햇살과 새소리가 묵이 될 때까지

참고 기다릴 수 있었다

 

▷정호승 시선집 「내가 사랑하는 사람」(김영사, 2021년) 중에서.

 

2. '묵사발'이 되어본 적이 있나요?

 

정호승 시인님의 시 '묵사발'은 시선집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 실린 시입니다.

 

첫 행이 매우 도발적이네요.

 

'나는 묵사발이 된 나를 미워하지 않기로 했다'

 

'묵사발이 된 나'라고 합니다. 지금 자신은 처참히 부서진 상태라고 합니다.

 

하고 있는 일이 뜻대로 안 풀려 크게 망한 상태라고 합니다.

 

그런데도 '묵사발이 된 나를 미워하지 않기로 했다'라고 하네요.

 

이 낯선 시작이 우리를 시 속으로 바짝 끌어당기네요.

 

'첫눈 내린 겨울산을 홀로 내려와 / 막걸리 한잔에 도토리묵을 먹으며

묵사발이 되어 길바닥에 내동댕이쳐진 나를 사랑하기로 했다'

 

'묵사발이 된 나'는, 그래서 생각이 많아진 나는 '겨울산을 홀로' 올랐다 내려왔네요.

 

그렇게 터덜터덜 하산하여 '막걸리 한잔에 도토리묵'을 먹는 순간 불현듯 머릿속이 환해졌나 봅니다.

 

도토리묵을 접하는 순간이 바로 이 시가 발아된 지점이네요. 

 

도토리묵과 만나는 순간, '나'는 '묵사발이 된 나를 미워하지 않기'로 하고 '사랑하기로 했다'라고 합니다.

 

왜 그런 마음이 들었을까요?

 

'묵사발이 있어야 묵이 만들어진다는 사실에 비로소

나를 묵사발로 만든 이에게 감사하기로 했다'

 

갑자기 '묵사발'이라는 단어가 번쩍 하고 빛을 발합니다.

 

'처참히 뭉개진 상태'를 뜻하는 '묵사발'이 '묵을 담는 사발'을 뜻하기도 한다는 것을 발견했네요.

 

그래서 '묵사발'이라는 단어가 두 가지 빛을 발하면서 '나'를 새로운 인식의 경지로 인도합니다.

 

묵은 그 재료가 되는 도토리가 완전히 뭉개어져 그 형태가 사라진 상태입니다.

 

'묵사발이 된 나'도 그 형태를 몰라볼 정도로 처참히 뭉개진 상태입니다.

 

그런 '나'와 '묵사발'은 같은 신세입니다.

 

그러면서 '나'는 '묵사발'의 효용성에 대해, 내가 처한 '묵사발'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네요.

 

내가 처한 비참의 뜻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네요.

 

'나'의 비참도 다 뜻이 있었겠구나!

 

"내가_묵사발이_되지_않았다면_나는_묵의_온화함과_부드러움을_결코_얻지_못했을_것이다"-정호승_시_'묵사발'_중에서.
"내가 묵사발이 되지 않았다면 나는 묵의 온화함과 부드러움을 결코 얻지 못했을 것이다" - 정호승 시 '묵사발' 중에서.

 

 

3. 묵사발이 되어야 얻게 되는 것에 대하여

 

'내가 묵사발이 되지 않았다면 / 나는 묵의 온화함과 부드러움을 결코 얻지 못했을 것이다'

 

처참히 부서져 밑바닥을 쳤을 때 얻을 수 있는 것에 대하여 생각합니다.

 

'묵의 온화함과 부드러움'을 말입니다.

 

그 '묵의 온화함과 부드러움'이란 것은 폭주하는 기관차 같은 욕망과 미움, 이기심과 질투심에 얽매어 살 때는 얻을 수 없는 것들이네요. 

 

이 구절에서 시인님의 다른 시 '산산조각'이 떠오릅니다.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을 얻을 수 있지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으로 살아갈 수 있지

- 정호승 시 '산산조각' 중에서.

 

조금이라도 부서지지 않으려고 애쓰는 우리에게 자유를 주는 시입니다.

 

산산조각이 나면 얻을 수 있는 것, 묵사발이 되면 얻을 수 있는 것에 대해 곰곰 생각하게 되네요.

 

고통은 이렇게 고통을 감싸주고 치유해주는 걸까요?

 

'당신 또한 순하고 연한 묵의 / 겸손의 미덕을 지닐 수 없었을 것이다'

 

'나'의 묵사발로 인해 '당신'에게도 변화가 생겼습니다.

 

'나'의 부서짐으로 인해 '당신'은 '순하고 연한 묵의 겸손의 미덕'을 지니게 되었다고 하네요.

 

'나'의 큰 비참을 보면서 '당신'은 당신의 작은 비참을 견디게 되겠지요?

 

'내가 묵사발이 되었기 때문에 당신은 묵이 될 수 있었다'

 

한 해가 저무는 시간, '나'는 어떤 '묵사발'이 되었는지 생각해 봅니다.

 

지난 한 해 동안의 크고 작은 실패와 좌절들을 생각해 봅니다.

 

어떤 '묵사발'이 되어 세상의 아픈 '당신'을 품어주었는지 생각해 봅니다.

 

무너지고 뭉개짐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을 생각합니다.

 

무너지고 뭉개져야만 보이는 것을, 얻게 되는 것을 생각합니다.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목욕'에서 정호승 시인님의 시를 더 만나 보세요.

 

정호승 시 그리운 부석사 해설

정호승 시인님의 시 '그리운 부석사'를 만납니다. 저마다의 사랑 자리를 돌아보게 하는 시입니다. 함께 읽으며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정호승 시 '그리운 부석사' 읽기 그리운 부

interestingtopicofconversation.tistory.com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