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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스미기

조지훈 시 아침 화체개현

by 빗방울이네 2024. 8.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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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훈 시인님의 시 '아침'(화체개현·花體開顯)을 만납니다. 사물의 본질적 실체에 대한 깨달음을 지향하는 시입니다. 함께 읽으며 마음을 씻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조지훈 시 '아침'(화체개현·花體開顯) 읽기


아침(화체개현·花體開顯)
 
조지훈(1920~1968, 경북 영양)
 
실눈을 뜨고 벽에 기대인다 아무것도 생각할수가 없다
 
짧은 여름밤은 촛불 한자루도 못다녹인 채 살아지기 때문에 섬돌 우에 문득 자류(柘榴)꽃이 터진다
 
꽃망울 속에 새로운 우주(宇宙) 열리는 파동(波動)! 아 여기 태고(太古)쩍 바다의 소리없는 물보래가 꽃잎을 적신다
 
방안 하나 가득 자류(柘榴)꽃이 물들어 온다 내가 자류(柘榴)꽃 속으로 들어가 앉는다 아무것도 생각할수가 없다
 
▷조지훈 시집 「풀잎단장(斷章)」(창조사, 단기 4285년) 중에서.
 
※ 한자에 독음을 단 것 말고는 띄어쓰기 등은 원본과 동일합니다(독서목욕 註)


2. 사물이 실체가 열려 드러난다는 '화체개현(花體開顯)'

 
시 '아침'은 1952년에 나온 조지훈 시인님의 첫 개인시집 「풀잎단장(斷章)」에 실린 첫 시입니다.
 
이후 이 시는 1956년에 나온 「조지훈 시선」에 '화체개현(花體開顯)'이라는 제목으로 변경되어 다시 수록됐습니다.

 

첫 시집에서는 첫 시로, 두번 째 시집서는 이름을 바꿔 다시 실었을 정도로 시인님이 애지중지했던 시인 것 같습니다.
 
'개현(開顯)'이란 열어서 나타내거나 드러남을 뜻합니다.

 

'화체(花體)'는 꽃을 말할 텐데, 그냥 '화(花)'라고 하지 않고 '화체(花體)'라고 한 것을 보니 꽃의 실체, 즉 사물의 실체라는 점을 강조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화체개현(花體開顯)'은 '꽃의 실체, 사물의 실체가 열려 드러나다'라는 뜻이겠습니다.
 
처음 발표 당시 제목인 '아침'과 '화체개현(花體開顯)'은 어떤 연관이 있을까요?
 
'아침'은 어둠을 걷고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고, '꽃이 피는 일'도 어떤 어둠을 걷고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네요. 
 
이렇게 '아침'과 '화체개현'의 뜻을 새기다 보니, 이 시는 진리에 어두운 무명(無明)을 걷고 참된 실체를 찾는 일, 깨달음에 대한 시라는 생각이 듭니다.
 
첫 개인시집의 첫 시로 이 시를 걸어둔 이유를 알 것만 같네요.
 
시인님에게 시의 길이란, 진리를 찾아가는 여정이라는 시인님의 눈짓 말입니다.
 
시로 가는 창은 여러 개일 것입니다. 여기서는 책 「원효의 '금강삼매경론' 읽기」라는 창을 통해 시 '아침'을 만나러 갑니다.

첫 행부터 만납니다.
 
‘실눈을 뜨고 벽에 기대인다 아무것도 생각할수가 없다’
 
이 첫 행은 시인님이 반개(半開)한 눈으로 깊은 명상에 든 상태로 새깁니다.
 
사물의 실재(實在)를 인식하기 위한 구도(求道)의 시간일까요?
 
근원적 존재 환각을 직접 자각으로 꿰뚫어
실체라는 환각이 걷힌 '하나로 만나는 지평'
고스란히 대면하는 마음자리에 서게 하려 함이라는 것 -
이것이 원효 선관(禪觀)의 한 요목(要目)이다.
▷「원효의 '금강삼매경론' 읽기」(박태원 지음, 세창미디어, 2014년) 중에서.
 
이 문장에 나오는 '근원적 존재 환각'이란 무얼까요?
 
위 책에 따르면, 중생들은 '유무형의 사물에 고유한 불변의 본질이나 실체가 담겨 있다'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무지에 오염된 인식에 의해 왜곡되고 가려졌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실재에 다가가지 못하는 가장 큰 걸림은 무얼까요?

 

그것은 '유·무형의 것들을 분류하고 지시하는 개념그릇인 언어세계'라고 합니다.
 
인간의 언어는 '관계 속에 변화하는 존재·현상'을
'독자적이고 불변하는 동일의 존재·현상'으로 착각하게 하는 속성을 지녔다.
▷'언어를 음미하는 두 가지 원칙', 박태원, 「고경」 (2024년 8월) 중에서.
 
이 문장을 통해 우리는 유·무형의 사물, 즉 대상을 인식할 때 언어가 규정한 개념으로 일방적으로 포획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사물의 실재에 다가가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이 시의 제목이 꽃의 실체가 열려 드러난다는 ‘화체개현(花體開顯)’이라는 점을 상기합니다.

첫 행은 시인님의 자아와 세계가 대등한 입장에서 사물의 실재를 인식하기 위해 정진하는 시간으로 새겨집니다.

 

"꽃-속으로"-조지훈-시-'아침'-'화체개현'-중에서.
"꽃 속으로" - 조지훈 시 '아침'(화체개현) 중에서.

 

 

3. 오염된 인식을 벗고 하나로 보는 마음자리의 무념무상

 
‘짧은 여름밤은 촛불 한자루도 못다녹인 채 살아지기 때문에 섬돌 우에 문득 자류(柘榴)꽃이 터진다’
 
'자류(柘榴)꽃이 터진다'. 이는 사물의 실재에 다가서는 순간, 진리를 깨닫는 순간을 묘사한 구절로 다가옵니다.
 
사물의 실재에 다가선다는 말은 무슨 말일까요?
 
위의 책 「원효의 '금강삼매결론' 읽기」에 따르면, 그것은 ‘하나로 보는 마음자리’를 말합니다.

‘하나로 보는 마음자리’란 '언어와 개념으로 지시되는 존재들이 상호 격리와 배제가 아니라 상호 개방과 포섭으로 만나고 있는 지평을 고스란히 대면하는 마음'입니다.
 
그런 '하나로 보는 마음자리'를 만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사물에 대한 우리의 인식 내용이 오염되어 있다는 자각이 전제되어야 할 것입니다.

 
'짧은 여름밤은 촛불 한자루도 못다녹인 채 살아지기(사라지기) 때문에'. 그동안 진리를 가리고 있던 ‘여름밤’일까요? 우리가 어둠을 벗고 사물을 올바르게 인식하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정진한다면 그 '여름밤'은 '촛불 한자루도 못다녹인 채' 사라진다는 의미로 새깁니다.
 
‘꽃망울 속에 새로운 우주(宇宙) 열리는 파동(波動)! 아 여기 태고(太古)쩍 바다의 소리없는 물보래가 꽃잎을 적신다’
 
대상을 '하나로 보는 마음자리'가 열리는 순간의 환희입니다.

아래 문장을 함께 읽으며 3행에 다가갑니다.

객관과 주관에 대한 상(相)분별이 해체되어,
환각과 오해의 분별을 일삼던 ‘오염 인식(알음알이/분별심/분별지)’이
참모습을 그대로 보는 ‘지혜 인식(무분별지)’으로 바뀐다.
그리하여 공성인 존재의 참모습(진여)을 비로소 대면하게 된다.
▷ 위의 같은 책 「원효의 '금강삼매경론' 읽기」 중에서

‘꽃망울 속에 새로운 우주가 열리는 파동’. 지금까지 ‘꽃망울’에 대한 '환각과 오해의 분별을 일삼던 오염 인식'을 벗고 '참모습을 그대로 보는 지혜 인식'의 순간에 ‘새로운 우주의 파동’을 만나게 된다고 합니다.

‘태고적 바다의 소리없는 물보라’. 이 구절은 위 문장에 나오는 ‘공성인 존재의 참모습’과 연결되네요. 위 책에 따르면, 존재의 참모습은 항상 그대로 있지만, 우리의 ‘무지에 오염된 인식에 의해 왜곡되고 가려졌을 뿐’이라고 합니다.
 
‘방안 하나 가득 자류(柘榴)꽃이 물들어 온다 내가 자류(柘榴)꽃 속으로 들어가 앉는다 아무것도 생각할수가 없다’
 
‘내가 자류꽃 속으로 들어가 앉는다’. ‘물아일체(物我一體 )’의 상태, 즉 ‘외물(外物)과 자아, 객관과 주관, 또는 물질계와 정신계가 어울려 하나가 된 상태’입니다.

이 순간은 그동안의 ‘오염 인식’을 벗고 ‘지혜 인식’을 획득한 상태, 즉 ‘하나로 보는 마음자리’로 사물의 실재를 보는 상태일 것입니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다’. 탐진치(貪瞋癡)가 소멸되어 온갖 분별 망상과 번뇌가 끊어진 무위(無爲)의 상태입니다. 인연의 지배를 받지 않는 무념무상(無念無想) 말입니다.

시 '아침'(화체개현)을 읽고 나니 오염된 인식인 줄 모르고 지내던 사물의 실체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헹궈주네요. 이 시는 우리에게 본질에 앞서 언어로 규정된 개념들에 의한 인식, 오해와 편견에 의한 인식들을 경계하고 다시 보라고 하는 것만 같습니다.

 

이 시가 쓰인 때는 시인님 32세 즈음입니다.

첫 개인시집에 맨 첫 장에 이 시를 걸어놓고 무지에서 벗어나 언제나 사물의 실재에 다가서는 삶을 지향했을 시인님의 맑고 고운 마음을 떠올려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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