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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스미기

정호승 시 선암사 읽기

by 빗방울이네 2023. 9.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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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승 시인님의 시 ‘선암사’를 만납니다. 시인님은 우리에게 눈물이 나면 선암사로 가라 하시네요. 왜 그럴까요? 마음의 옷을 벗고 저마다의 설움을 씻으며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정호승 시 ‘선암사’ 읽기


선암사

- 정호승(1950~ , 경북 대구)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로 가서 실컷 울어라
해우소 앞에 쭈그리고 앉아 울고 있으면
죽은 소나무 뿌리가 기어다니고
목어가 푸른 하늘을 날아다닌다
풀잎들이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주고
새들이 가슴속으로 날아와 종소리를 울린다
눈물이 나면 걸어서라도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 앞
등 굽은 소나무에 기대어 통곡하라

- 정호승 시집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창작과비평사, 1999년 초판) 중에서

2. ‘선암사 해우소로 가서 실컷 울어라’


정호승 시인님의 시 ‘선암사’는 1999년에 나온 시집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에 실려 있습니다. 시인님 나이 50 즈음에 쓰인 시입니다. 삶의 반환점쯤일까요? 온갖 희로애락을 거쳐 여기까지 왔을 것입니다. 그런 시인님이 우리에게 건네는 보석 같은 말씀을 만나봅니다. 이 시의 첫 행을 시집 제목으로 썼을 만큼 시인님이 아끼는 시네요.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

- 정호승 시 ‘선암사’ 중에서


삶에서 막다른 골목에 있다고 느껴질 때 시인님은 선암사로 가라고 합니다. 전남 순천 조계산에 있는 태고종 천년고찰 선암사로요. 시인님의 하명을 받들어 언제나 눈물 가득한 우리 기차를 탑니다. 그곳에 무엇이 있을까요?

선암사 해우소로 가서 실컷 울어라

- 정호승 시 ‘선암사’ 중에서


왜 하필 선암사 해우소일까요? 해우소는 화장실(뒷간)인데, 선암사에 있는 해우소는 뒷간 같지 않은 우아한 뒷간이네요. 아주 특별한 전통양식의 건축물입니다. 사진으로 보니 입구가 팔자로 펼쳐진 기와지붕이 인상적이네요. 언뜻 보면 이게 화장실인가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집이네요.

시를 보니 선암사 해우소가 시인님만의 ‘울음터’였네요. 그대도 이런 울음터가 있지요?

삶의 어떤 일이 하염없이 가볍다고 느껴질 때, 삶의 어떤 일이 하염없이 무겁다고 느껴질 때 아무도 몰래 찾아가 울고 싶은 곳 말입니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펑펑 아이처럼 울 수 있는 곳 말입니다.

이런 곳은 마음의 무장을 모두 해제하여 나를 내려놓을 수 있는 곳이네요. 어머니 품속 같은 곳이네요. 토닥토닥 어머니가 등을 두드려주실 것 같은 곳이네요.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요?

‘해우소(解憂所)’라는 단어는 참 신기합니다. 불교에서 변소를 말하는 곳인데, 변소가 ‘대소변’이라는 나에게 밀어닥친 바로 이 순간의 막중한 걱정(憂)을 푸는(解) 곳(所)이니, 해우소란 말은 얼마나 절묘한 말인지요. 그러니 우리 이 말 곰곰이 생각해 볼밖에요.

그중에서 ‘근심’ ‘걱정’의 뜻을 나타내는 ‘우(憂)’라는 글자를 자세히 들여다봅니다.

이 글자는 머리 혈(頁), 덮을 멱(冖), 마음 심(心), 올 치(夂)로 구성되어 있네요. 올 치(夂)는 뒤쳐져 오다, 또는 천천히 걷는 모양이라는 뜻이니 발이 포함되어 있네요. 그러니 ‘우(憂)’는 머리끝에서 발끝까지를 형상화하고 있습니다. 그 사이에 마음(心)이 끼어 큰 머리에 짓눌리고 있으니 ‘근심’ ‘걱정’을 뜻하게 되었네요.

그런데 이 말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걱정투성이인 것이 바로 인간이라는 뜻이기도 하겠습니다. 부처님은 그것을 ‘고(苦)’, 괴로움이라고 하셨네요.

이로써 ‘해우소’가 이 시의 중요한 소재가 된 이유가 드러났네요.

대소변을 몸 밖으로 버리듯이, 우리 마음속의 근심 걱정을 덜어내 버리라는 소중한 말을 우리에게 전하려고 시인님은 ‘해우소’를 빌려왔네요. 그래서 뒷간 중의 뒷간으로 꼽히는 멋진 공간 ‘선암사 해우소’를 시에 데려왔네요.
 

정호승시선암사중에서
정호승 시 '선암사' 중에서. 사진은 선암사 해우소 전경.

 

 

3. ‘해우소 앞에 쭈그리고 앉아 울고 있으면’ 어떻게 되나요?


해우소 앞에 쭈그리고 앉아 울고 있으면 / 죽은 소나무 뿌리가 기어다니고
목어가 푸른 하늘을 날아다닌다 / 풀잎들이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주고
새들이 가슴속으로 날아와 종소리를 울린다

- 정호승 시 ‘선암사’ 중에서


도대체 이 문장들은 어떤 의미일까요? 해우소 앞에서 울게 되면 눈앞에 저러한 환상이 보이는 걸까요?

이렇게 울어본 적이 있는지요?

시인님처럼 쭈그리고 앉아서요. 세상에서 받은 이런저런 설움이 몸에 가득 쌓였을 때, 그런 감정이 가득 차 임계점에 다다랐을 때, 우리는 시인님처럼 쭈그리고 앉게 되네요. 어머니의 품속의 태아가 그러듯이요. 우리는 서러울 때 그럴 때 어머니 품속의 바로 그 순간으로 돌아가고 싶은 걸까요? 아주 저절로요.

이때의 울음은 뭐랄까요, 세상을 향하던 이 울음이 점점 나를 향하게 되는 울음이랄까요? 세상을 원망하는 마음은 이상하게도 슬픔 속에서 천천히 녹아서 나를 돌아보는 마음으로 바뀌게 된달까요? 이런 과정은 마음이 비워지는 시간일 것입니다. 마음속에 온갖 번뇌와 망상이 옅어지는 시간일 것입니다.

이 ‘독서목욕’에서 함께 읽었던 김현승 시인님의 시 ‘슬픔’, 그 시의 이 구절 생각나지요?

슬픔은 나를 / 어리게 한다

- 김현승 시 ‘슬픔’ 중에서


슬픔은 우리를 어리게 한다네요. 어리게 한다는 말은 마음을 아이 같아지게, 순수하게 한다는 뜻이네요. 슬픔은 사람 마음을 아이처럼 맑고 깨끗해지도록 만들어준다는 의미입니다.

자, 이로써 이 시의 속살이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낮은 것들이 ‘눈물의 렌즈’를 통해 이제야 그렁그렁 눈에 들어왔네요. 이때의 마음은 아이처럼 순수한 마음의 눈이겠네요.

땅 위를 기어 다니는 것만 같은 ’죽은 소나무 뿌리‘도 보이고요, 푸른 하늘에서 춤추는 목어도 보이네요. 풀잎들의 여린 몸은 어찌나 여린지 보기만 해도 마음이 다정해지네요. 이제 새소리도 마음속 깊이 들어옵니다. 생명의 소리, 짝을 부르며 열심히 사랑하며 간절하게 살아가는 소리 말입니다. 그동안 왜 이런 것이 눈에 보이지 않았을까요? 욕심 때문이겠지요?

세상을 그렁그렁하게 눈으로 볼 수 있게 해주는, ‘눈물의 렌즈’를 만들어 주는 이런 울음은 명약이네요. 마음을 치유하는 명약이네요.

눈물이 나면 걸어서라도 선암사로 가라 / 선암사 해우소 앞 / 등 굽은 소나무에 기대어 통곡하라

- 정호승 시 ‘선암사’ 중에서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 목욕‘에서 정호승 시인님의 시 ’풍경 달다‘를 만나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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