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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스미기

황지우 시 늙어가는 아내에게 읽기

by 빗방울이네 2023. 9.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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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지우 시인님의 시 ‘늙어가는 아내에게’를 만납니다. 아내나 남편, 또는 어머니 아버지가 생각나 가슴 먹먹해지는 시입니다. 마음의 옷을 벗고, 이 뜨거운 저녁 목욕물 같은 구절들을 마음에 천천히 쏟아부으며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황지우 시 ‘늙어가는 아내에게’ 읽기


늙어가는 아내에게 
 
- 황지우(1952~, 전남 해남)
 
내가 말했잖아
정말, 정말, 사랑하는, 사랑하는,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들은,
너, 나 사랑해?
묻질 않어
그냥, 그래,
그냥 살어
그냥 서로를 사는 게야
말하지 않고, 확인하려 하지 않고,
그냥 그대 눈에 낀 눈곱을 훔치거나
그대 옷깃의 솔밥이 뜯어주고 싶게 유난히 커 보이는 게야
생각나?

지금으로부터 14년 전, 늦가을,
낡은 목조 적산 가옥이 많던 동네의 어둑어둑한 기슭,
높은 축대가 있었고, 흐린 가로등이 있었고
그 너머 잎 내리는 잡목숲이 있었고
그대의 집, 대문 앞에선
이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바람이 불었고
머리카락보다 더 가벼운 젊음을 만나고 들어가는 그대는
내 어깨 위의 비듬을 털어주었지
그런 거야, 서로를 오래오래 그냥, 보게 하는 거
그리고 내가 많이 아프던 날
그대가 와서, 참으로 하기 힘든, 그러나 속에서는
몇 날 몇 밤을 잠 못 자고 단련시켰던 뜨거운 말:
저도 형과 같이 그 병에 걸리고 싶어요

그대의 그 말은 에탐부톨과 스트렙토마이신을 한알 한알
들어내고 적갈색의 빈 병을 환하게 했었지
아, 그곳은 비어 있는 만큼 그대 마음이었지
너무나 벅차 그 말을 사용할 수조차 없게 하는 그 사랑은
아픔을 낫게 하기보다는, 정신없이,
아픔을 함께 앓고 싶어하는 것임을
한밤, 약병을 쥐고 울어버린 나는 알았지
그래서, 그래서, 내가 살아나야 할 이유가 된 그대는 차츰
내가 살아갈 미래와 교대되었고

이제는 세월이라고 불러도 될 기간을 우리는 함께 통과했다
살았다는 말이 온갖 경력의 주름을 늘리는 일이듯
세월은 넥타이를 여며주는 그대 손끝에 역력하다
이제 내가 할 일은 아침 머리맡에 떨어진 그대 머리카락을
침 묻힌 손으로 집어내는 일이 아니라
그대와 더불어, 최선을 다해 늙는 일이리라
우리가 그렇게 잘 늙은 다음
힘없는 소리로, 임자, 우리 괜찮았지?
라고 말할 수 있을 때, 그때나 가서
그대를 사랑한다는 말은 그때나 가서
할 수 있는 말일 거야

- 황지우 시집 「게 눈 속의 연꽃」(문학과지성사, 1990년 초판, 2005년 15쇄) 중에서

2. 정말 사랑하면 ‘너, 나 사랑해’라고 묻지 않는다고요?


내가 말했잖아 / 정말, 정말, 사랑하는, 사랑하는, 사람들, / 사랑하는 사람들은,
너, 나 사랑해? / 묻질 않어 / 그냥, 그래 / 그냥 살어

- 황지우 시 ‘늙어가는 아내에게’ 중에서


맞지요? 시인님! 세상 어느 아내가 남편에게 ‘나 사랑해?’ 하고 확인하면서 산다던가요? ‘정말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런 거 묻지도 않는 거 맞지요? 오늘 이 시 아내에게 보여줘야겠어요.

그런데 시인님. 왜 목소리가 그리 떨리시나요? 왜 그렇게 따옴표를 많이 찍으며 더듬, 더듬거리시나요? 흥분을 그만 가라앉히시고 차분히 하고 싶은 말씀을 해보세요.

그냥 서로를 사는 게야 / 말하지 않고, 확인하려 하지 않고,
그냥 그대 눈에 낀 눈곱을 훔치거나 / 그대 옷깃의 솔밥이 뜯어주고 싶게 유난히 커 보이는 게야

- 황지우 시 ‘늙어가는 아내에게’ 중에서


시인님! 왜 이러시는지요? 아까는 ‘나 사랑해?’ 이런 거 묻지 않고 ‘그냥’ 산다면서요, ‘정말 사랑하는 사람들은’요.

그런데 ‘그대 눈에 낀 눈곱을 훔치거나’ ‘그대 옷깃의 솔밥을 뜯어주고 싶게 유난히 커 보이는’ 거라고요? ‘나 사랑해?’ 이런 거 묻지 않고 무심히 사는 이들 눈에 그런 게 보인다고요?

그런 게 보일 정도라면, 아니, 시인님, 그럴 정도라면 얼마나 아내를 사랑해야겠는지요? 얼마나 상대를 자세히 보아야겠는지요? 아침에 거울 속 나를 보듯이 곰곰이 아내를 들여다보아야겠는지요? 그것도 매시 매분 매초, 아무튼 그만큼 자주 그렇게 보아야 할 텐데요.

(아, 그런데 방금 쓱 지나온 이 구절은 뭐지?)

그냥 서로를 사는 게야

- 황지우 시 ‘늙어가는 아내에게’ 중에서


서로를 산다고요? 각자 사는 게 아니고요? 서로를 사는 것은, 남편이 아내로 살고 아내가 남편으로 산다는 말일 텐데요, 내가 너로 살고 네가 나로 산다는 말일 텐데요, 그러면 도대체 나는 왜 사는 건가요? 나는 나로 살기 위해 열심히 살고 있는 중인데 ‘너’로 살아라고요?

시인님, 그러니까 그게 부부라는 말씀인가요? 서로를 사는 것!

서로를 산다면 그것은 하나의 삶이네요. 두 개의 삶이 하나의 삶으로 합쳐지는 것이네요. 리트머스시험지에 색물이 번지듯이 서로에게 스며드는 거네요. 부부는 하나의 나룻배를 저어 가는 두 사람의 사공이네요. 똑같은 마음으로 똑같은 방향으로 노를 저어야겠네요. 나는 너에게로, 너는 나에게로 마음이 합쳐져야겠네요. 참말로요.

그것도 그냥요, 아무 이유 없이 그냥요. 부부니까요. 아이 걱정, 집안 어른 걱정에 같은 마음, 하나의 마음이 되어 젖어들어야겠네요. 그냥요. 여기 무슨 이유가 필요하겠는지요.

그대의 집, 대문 앞에선 / 이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바람이 불었고
머리카락보다 더 가벼운 젊음을 만나고 들어가는 그대는 / 내 어깨 위의 비듬을 털어주었지
그런 거야, 서로를 오래오래 그냥, 보게 하는 거

- 황지우 시 ‘늙어가는 아내에게’ 중에서


결혼하기 전의 두 사람, 남자는 여자를 집까지 바래다주었네요. 우리 결혼할까? 데이트에서 그렇게 남자가 힘들게 고백한 날이었을까요? 맨손이며 미래가 불투명한 청년, ‘머리카락보다 더 가벼운 젊음’에게 여자는 자기 집 대문 쪽으로 가다 문득 돌아서서 다시 다가왔네요. 그리고 남자의 ‘어깨 위의 비듬을’ 털어주었네요. 이 행동은 수많은 뜨거운 문장보다 더 뜨겁네요. 남자는 얼마나 힘이 났을까요? 이때 어깨에 얹힌 우주의 무게를 다 덜어낸 듯, 아니 그 우주를 온몸에 다 안은 듯한 마음이었겠지요?

시인님은 그렇게 ‘서로를 오래오래 그냥, 보게 하는 거’라고 하네요. 사랑 말이에요. 이 길들여지지 않는 짐승 같은 사랑은 ‘서로를 오래오래 그냥 보게 하는 거‘라서 ’서로를 오래오래 그냥 보게‘ 되면 온순해지고 다정해지는 것일까요?

그리고 내가 많이 아프던 날 / 그대가 와서, 참으로 하기 힘든, 그러나 속에서는
몇 날 몇 밤을 잠 못 자고 단련시켰던 뜨거운 말: / 저도 형과 같이 그 병에 걸리고 싶어요

- 황지우 시 ’늙어가는 아내에게‘ 중에서


’저도 형과 같이 그 병에 걸리고 싶어요.’ 이런 말은 얼마나 천둥처럼 나의 혼을 울리는 말인지요? 그래, 약 먹고 잘 쉬면 나을 거야.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이런 말도 좋지만, ‘저도 형과 같이 그 병에 걸리고 싶어요’라는 말은 얼마나 아뜩한지요? 나는 네가 되고 너는 내가 되어 섞이려는 말, 얼마나 우리를 자부룩하게 하는 말인지요? 만병을 치료할 명약 중의 명약이네요.
 

황지우시늙어가는아내에게중에서
황지우 시 '늙어가는 아내에게' 중에서.

 

 

3. ‘그대와 더불어 최선을 다해 늙는 일이리라’


이제는 세월이라고 불러도 될 시간을 우리는 함께 통과했다 / 살았다는 말이 온갖 경력의 주름을 늘이는 일이듯
세월은 넥타이를 여며주는 그대 손끝에 역력하다 / 이제 내가 할 일은 아침 머리맡에 떨어진 그대 머리카락을
침 묻힌 손으로 집어내는 일이 아니라 / 그대와 더불어, 최선을 다해 늙는 일이리라

- 황지우 시 ‘늙어가는 아내에게’ 중에서


그대는 지금 아내가, 또는 남편이 불현듯 나이 들어 보이던 순간을 떠올리겠지요? 아, 이제 내 아내도, 내 남편도 늙었구나! 이런 슬픈 인식이 처음 왔을 때 우리는 얼마나 망연해지는지요? 그이의 늙음은 바로 이 늙음이며 그이의 세월은 바로 나의 세월이니 얼마나 아득해지겠는지요?

그대와 더불어, 최선을 다해 늙는 일이리라

- 황지우 시 ‘늙어가는 아내에게’ 중에서


‘이제 내가 할 일은‘ ’그대와 더불어 최선을 다해 늙는 일’이라고 합니다. 아, 최선을 다해 늙는 일이라고 하네요.

나 혼자만 너무 빨리 또는 천천히 늙지 않기, 최선을 다해 똑같이 늙기!

과거를 그리워하지 않고 미래를 걱정하지 않으며 최선을 다해 지금 이 순간을 늙기!

그리하여 최선을 다해 천진하게 어리게 늙기!

우리가 그렇게 잘 늙은 다음 / 힘없는 소리로, 임자, 우리 괜찮았지?
라고 말할 수 있을 때, 그때나 가서
그대를 사랑한다는 말은 그때나 가서 / 할 수 있는 말일 거야

- 황지우 시 ‘늙어가는 아내에게’ 중에서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목욕’에서 황지우 시인님의 시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를 만나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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