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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만영 시 달, 포도, 잎사귀 읽기

by 빗방울이네 2023. 6.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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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만영 시인님의 시 '달, 포도, 잎사귀'를 만납니다. 달빛 가득하고, 포도향기도 가득하고, 바닷물도 가득한 신비로운 뜰을 만날 수 있답니다. 시인님이 그려주는 아름다운 풍경화에 마음을 맑히며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장만영 시 '달, 포도, 잎사귀' 읽기

달, 포도(葡萄), 잎사귀
 
- 장만영
 
순이(順伊) 버레 우는 고풍(古風)한 뜰에
달빛이 조수(潮水)처럼 밀여왔고나!
 
달은 나의 뜰에 고요히 앉었다
달은 과일보다 향(香)그럽다
 
동해(東海) 바다 물처럼
푸른
가을

 
포도(葡萄)는 달빛이 스며 고읍다
포도(葡萄)는 달빛을 먹음고 읶는다
 
순이(順伊), 포도(葡萄) 넝쿨 밑에 어린 잎새들이
달빛에 젖어 호젓하고나!
 

- 「장만영 시선」(송영호 엮음, 지식을만드는지식) 중에서

 
장만영 시인님(1914~1975)은 황해도 연백 출신으로 1932년 김억 시인님의 추천으로 시 '봄노래'가 「동광」지에 발표되면서 문단에 데뷔했습니다. 1937년 첫 시집 「양(羊)」 「축제」 「유년송」 「밤의 서정」 「저녁 종소리」 등 시집 7권과  「장만영시선집」, 자작시 해설집 「이정표」, 수필집 「그리운 날에」, 그 밖의 저서로 「현대시 감상」「중학문예독본」, 번역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등이 있습니다.
 

2. 포도향기 나고 파도소리 들리는 시

 
장만영 시인님이 누구냐고요? 최헌 가수님이 부른 '순아'의 노랫말이 된 '사랑'이라는 시를 쓴 시인님입니다. 바로 이 노래입니다.
 
서울 어느 하늘 아래 / 낯설은 주소인들 어떠랴 / 아담한 집 하나 짓고 순아 단둘이 살자 ~
 
오늘은 그의 시 '달, 포도, 잎사귀'를 만납니다. 장만영 시인님이 23세 때 쓴 시네요. 1936년 12월 「시건설」 창간호를 통해 세상에 나왔으니까요. 그 후 시인님의 첫 시집 「양(羊)」(1937년)에 실렸는데, 지금 그대는 그 원본 그대로의 시를  보고 계십니다. 빗방울이네가 한자만 괄호 속에 넣었답니다.
 
이 시는 장만영 시인님이 가장 아끼던 대표작이라고 합니다. 어떤 느낌이 드는지요? 참으로 고요하고도 향기롭지 않은지요? 시 속에 이미지만 가득한데 거기서 향기도 나고 소리도 나는 신비한 시입니다. 이는 특별한 메시지 없이 오로지 이미지를 통해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시의 특징입니다.
 
순이(順伊) 버레 우는 고풍(古風)한 뜰에 / 달빛이 조수(潮水)처럼 밀여왔고나!

- 장만영 시 '달, 포도, 잎사귀' 중에서

 
'순이(順伊)'는 누구일까요? 장만영 시인님의 시 중에 '순이'가 자주 등장합니다. 수더분하고 정다운 누이 같고, 순수하고 예쁜 연인 같은 느낌을 주네요. 화자는 그런 사랑하는 이의 이름을 호명하면서 지금 자신이 있는 곳의 풍경을 스케치해 전해줍니다. 벌레가 우는 예스러운 뜰에 달빛이 밀물처럼 밀려왔다고요. 그래서 이 고풍한 뜰은 달빛으로 가득 차올랐습니다. '달빛이 조수(潮水)처럼' 밀려왔다는 표현 때문에 지금 '버레 우는 고풍(古風)한 뜰에' 초대된 우리는 숨이 턱 막히는 느낌입니다. 달빛이 바닷물처럼 차올랐다고 했으니까요.
 
달은 나의 뜰에 고요히 앉었다 / 달은 과일보다 향(香)그럽다

- 장만영 시 '달, 포도, 잎사귀' 중에서

 
달빛이 밀물처럼 밀려와 가득 차오른 나의 뜰은 그 자체로 달이 되었네요. 그래서 달은 나의 뜰에 고요히 앉았다고 합니다. 그런데요, 이때 화자의 코끝으로 향기로운 과일향이 스칩니다. 달빛에 정서적으로 고무된 화자의 감각은 매우 민감해져 있네요.
 
동해(東海) 바다 물처럼
푸른
가을

- 장만영 시 '달, 포도, 잎사귀' 중에서

 
화자는 뜰에 달빛이 밀물처럼 가득 차올라 있는 풍경을 이렇게 입체적으로 보여주네요. 그 깊이를 말입니다. '푸른' '가을' '밤'을 별도의 행으로 배치해서 '동해(東海) 바다 물처럼' 깊고 푸른 가을밤의 달빛 뜰을 형상화합니다. 깊고 푸른 달빛의 심연(深淵), 참으로 아름답네요.
 
포도(葡萄)는 달빛이 스며 고읍다 / 포도(葡萄)는 달빛을 먹음고 읶는다

- 장만영 시 '달, 포도, 잎사귀' 중에서

 
아까 2연에서 풍겼던 과일향의 주인공이 등장했네요. 포도입니다. 달빛은 포도에 스몄고, 그리하여 포도는 달빛을 머금고 익는다고 합니다. 그대가 이런 경이로운 포도 한 알을 먹는다면, 그대는 달을 먹는 거네요. 우주를 먹는 거네요. 
 

장만영시달포도잎사귀중에서
장만영 시 '달, 포도, 잎사귀' 중에서.

 

 

3. 고요하고 쓸쓸하고 외로워서 아름다운!

 
순이(順伊), 포도(葡萄) 넝쿨 밑에 어린 잎새들이 / 달빛에 젖어 호젓하고나!

- 장만영 시 '달, 포도, 잎사귀' 중에서

 
이 마지막 연에서 화자는 사랑하는 '순이(順伊)'를 다시 호명합니다. 그러면서 카메라 앵글을 옮겨 포도 넝쿨의 아래를 보여줍니다. 순이를 호명하면서 하필 왜 그곳을 비추었을까요? 왜 그곳을 바라보았을까요? 거기, '포도(葡萄) 넝쿨 밑에' 어떤 아련한 추억이 있었을까요?
 
화자는 그 사연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다만 '어린 잎새들이 달빛에 젖어 호젓'하다고 하네요. 그렇게만 말해도 우리는 그 포도 넝쿨 밑에서 훅 끼쳐 올라오는, 고요하고 쓸쓸하고 외로운 낌새를 맡았네요. 고요히 눈을 내리깔고 멀리 있는 연인을 생각하는 화자의 뒷모습이 보이네요. 이런 풍경화는 고요하고 쓸쓸하고 외로워서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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