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우 시인님의 시조 '개화'를 만납니다. 꽃이 피는 순간을 노래하고 있는 이 시조는 어떤 삶의 비의를 품고 있을까요? 함께 읽으며 마음을 맑히며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이호우 시조 '개화' 읽기
개화(開花)
- 이호우
꽃이 피네 한 잎 한 잎
한 하늘이 열리고 있네
마침내 남은 한 잎이
마지막 떨고 있는 고비
바람도 햇볕도 숨을 죽이네
나도 아려 눈을 감네.
- 오누이 시조집 「비가 오고 바람이 붑니다 - 휴화산 편」(이호우 지음, 중앙출판공사, 1968년) 중에서
이호우 시조시인님(1912~1970)은 경북 청도 출신으로 1940년 「문장」지에 시조 '달밤'으로 등단(이병기 님 추천)했습니다.
1955년 첫 시조집 「이호우 시조집」을 낸 것을 비롯, 1968년 오누이 시조집으로 기획된 「비가 오고 바람이 붑니다 - 휴화산 편」을 발간했습니다. 시인님의 누이동생이 바로 시조시인 이영도 님입니다. 고향 청도군은 두 사람을 기려 '오누이 시조문학제'를 열고 있습니다. 이호우 시조전집 「삼불야」, 편저로 「고금시조정해」가 있습니다. 영남시조문학회를 설립하고 대구매일신문 편집국장 등을 역임했으며 제1회 경상북도문화상 등을 수상했습니다.
2. 이 시의 솟대 '한 하늘이 열리고 있네'
이호우 시인님의 시조 '개화'는 1962년 「현대문학」을 통해 세상에 나왔습니다. 1968년 이호우·이영도 오누이시집 「비가 오고 바람이 붑니다」의 이호우 시인님 편인 「휴화산」이 나왔는데, '개화'가 첫 시조로 실려 있네요.
이 시조집에 실린 행갈이와 표기법 그대로의 '개화'를 만나봅니다. 마지막 행이 '나도 그만 눈을 감네'로 많이 알려졌는데, 실제 시집을 보니 '나도 아려 눈을 감네'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당시 '시조'라고 하면, 선입견이 있었습니다. 영탄조나 지나간 일을 돌아보는 회고풍 말입니다.
그러나 이호우 시인님은 이런 레트로풍에서 벗어나 현대시조를 현대시의 경지로 올린 시인이라는 평가를 받는 시인입니다. 오늘 만나는 시조 '개화'가 그 정점에 있는 시조로 꼽힙니다.
꽃이 피네 한 잎 한 잎 / 한 하늘이 열리고 있네
- 이호우 시조 '개화' 중에서
꽃이 피는 모습을 보고 '한 하늘'이 열리고 있다고 합니다. '한 하늘이 열리고 있네'. 이 구절이 오늘 우리를 저 높은 곳으로 올려주는 이 시의 솟대입니다. 꽃이 피는 일은 하나의 하늘이 열리는 일이고 세상이 열리는 일이고 우주가 열리는 일이라 하네요.
하늘이나 세상이나 우주라는 말은 공간의 개념은 아닐 것입니다. 사물의 본질에서 만나는 하늘, 세상, 우주이네요. 시간과 만물을 포함하는 무한의 총체 말입니다. 선지자들은 사물을 깊이 들여다보면 우주를 볼 수 있다고 합니다. 그 속에 우주가 다 들었다는 것인데, 이는 참으로 어마어마한 일이 아닐 수 없네요.
마침내 남은 한 잎이 / 마지막 떨고 있는 고비
- 이호우 시조 '개화' 중에서
꽃씨 속에 잠겨 있던 우주가 바야흐르 꽃이 피면서 열리고 있네요. 그 마지막 고비, 시의 화자처럼 우리 가슴도 떨리면서 긴장감이 고조되네요. 어떻게 이처럼 섬세하게 포착했을까요? 시인님은 지금 꽃을 향하여, 열리는 우주를 향하여 경건히 무릎을 꿇었겠습니다.
바람도 햇볕도 숨을 죽이네 / 나도 아려 눈을 감네.
- 이호우 시조 '개화' 중에서
꽃이 피는 일은 이렇게 신비롭고 경건한 일이네요. 시인님은 바람도 햇볕도 숨을 죽인다고 느낄 만큼 개화의 순간에 몰입되어 있네요. 그리하여 눈을 감았다고 합니다. '나도 아려'이라는 구절에서, 우리는 시인님 자신이 이 순간에 압도되어 어찌할 수 없이 눈을 감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위대하고 황홀한 개화의 순간에 접속되어 시인님은 무한한 희열 속으로 빠져든 걸까요? 법열(法悅), 진리를 깨닫고 느끼게 된다는 황홀 말입니다. 이렇게 이 시는 꽃이 피어나는 순간을 통해 진리에 대한 깨달음을 노래하고 있다는 점도 새겨봅니다.
3. '우주는 감수성 예민한 사람 편이다'
이제 시조 '개화'를 빠져나와 생각해봅니다.
많은 사람들은 꽃이 피는 일에 대해 시인님처럼 섬세한 눈으로 보지 않습니다. 아, 꽃이 피네, 배롱나무꽃이 피네, 다홍색의 꽃이네! 이렇게 대수롭지 않게 '구경'하게 됩니다. 꽃과 거리를 두고요.
문득 「월든」의 문장이 떠오르네요.
우주의 법칙은 어떤 경우에도 무관심해지지 않고 항상 감수성 예민한 사람들 편에 서 있다.
- 「월든」(헨리 데이비드 소로 지음, 김석희 옮김, 열림원, 2021년) 중에서
우리가 생명에 대하여, 또는 생명이 없는 것에 대하여 끊임없이 관찰하고 질문하고 대화할 때 우주의 법칙은 작동한다는 말이겠습니다. 그리하여 시인님은 꽃이 피는 모습에서 '한 하늘'이 열리는 위대한 여정과 조우할 수 있었네요.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 목욕'에서 꽃이 대한 시 한 편 더 만나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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