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 시인님의 시 '눈 오는 지도(地圖)'를 만납니다.
지금 가고 있는 '나의 길'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는 시입니다.
함께 읽으며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윤동주 시 '눈 오는 지도(地圖)' 읽기
눈 오는 지도(地圖)
윤동주(1917~1945, 중국 길림성 화룡현 명동촌)
순이(順伊)가 떠난다는 아침에 말못할 마음으로 함박눈이 나려, 슬픈 것처럼 창(窓)밖에 아득히 깔린 지도(地圖) 우에 덮인다. 방(房)안을 돌아다 보아야 아무도 없다. 벽(壁)과 천정(天井)이 하얗다. 방(房)안까지 눈이 나리는 것일까, 정말 너는 잃어버런 역사(歷史)처럼 홀홀이 가는 것이냐, 떠나기 전(前)에 일러둘 말이 있든 것을 편지를 써서도 네가 가는 곳을 몰라 어느 거리, 어느 마을, 어느 지붕밑, 너는 내 마음속에만 남아 있는 것이냐, 네 쪼고만 발자욱을 눈이 자꼬 나려 덮여 따라 갈 수도 없다. 눈이 녹으면 남은 발자욱자리마다 꽃이 피리니 꽃 사이로 발자욱을 찾어 나서면 일년(一年) 열두달 하냥 내 마음에는 눈이 나리리라.
▷윤동주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詩)」(1955년 정음사 발행본을 2016년 도서출판 소와다리가 오리지널 디자인으로 재발행) 중에서.
2. 첫시집 앞쪽에 '눈 오는 지도(地圖)'를 배치한 까닭은?
윤동주 시인님의 시 '눈 오는 지도(地圖)'는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詩)」의 네번째 시입니다.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시 '서시(序詩)'가 첫번째이고, 그다음이 '자화상(自畵像)', 이어 '소년(少年)'이, 그다음이 '눈 오는 지도(地圖)'입니다.
'별 헤는 밤' '새로운 길' 같은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시들은 그 뒤에 있습니다.
시인님은 생전에 첫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詩)」를 발간하려고, 19편의 시를 순서대로 미리 배치해 두었습니다.
그때가 1941년입니다.
19편의 시 중에서 네 번째 시, 시인님이 시로 넣지 않고 발문처럼 쓴 '서시(序詩)'를 빼면 세 번째 시가 '눈 오는 지도(地圖)'입니다.
모든 시가 시인님에게 소중한 시겠지만, 시인님은 그 중에서도 '눈 오는 지도(地圖)'에 무게를 두고 있다는 뜻이겠습니다.
어떤 시이기에 그랬을까요?
시 '눈 오는 지도(地圖)'라는 제목부터 범상치 않습니다.
이 제목에 걸린 자물쇠를 풀면 시가 가슴에 안겨올 것 같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지도(地圖)'라는 뜻에 경도되면 이 시가 도망갈지도 모릅니다.
그럼 이 시에 나오는 '지도'는 어떤 지도일까요?
'독서목욕'은 이 '지도'를 '발자국 지도'로 새깁니다.
눈이 내리면 온 세상이 하얗게 덮여 버립니다. 사람이 다니는 길도 덮여 버립니다.
그러면 어디로 가야할 지 모르는 상태가 됩니다.
그때 누군가 눈 위에 찍어둔 발자국이 있습니다.
길을 찾지 못할 때 누군가 먼저 찍어둔 발자국을 따라가면 길을 갈 수 있습니다.
그 발자국이 뒤에 가는 사람에게는 소중한 '지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발자국은 그냥 발자국이 아니라 바로 '발자국 지도'입니다.
'눈 오는 지도(地圖)'라는 제목에서 우리는 그 '발자국 지도' 위에 눈이 내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현재 진행형입니다. 눈은 그치지 않고 계속 내리고 있습니다.
그러면 눈 위의 발자국이 조만간 눈에 다 덮여 버리겠네요.
그렇게 눈밭의 발자국이 다 사라져 버리면 '나'는 어디로 가야 할까요?
'발자국 지도'가 덮여가고 있는 절망적인 순간을 노래한 시가 바로 '눈 오는 지도'였네요.
시 속에서 이 '발자국 지도'는 떠나간 순이가 낸 발자국입니다.
동시에 시 화자의 '삶의 좌표'이기도 할 것입니다.
'나'는 과연 어디로 가야 할까요?
이 시 아래에는 '一九四一, 三, 一二'라고 적혀있네요. 1941년 3월 12일에 이 시를 탈고했다는 뜻입니다.
그때는 윤동주 시인님이 연희전문학교 졸업반(1941년 12월 졸업) 시절입니다.
1941년은 우리나라 국민 모두에게 불안과 공포로 점철된 해였습니다.
일제의 창씨개명제가 강요되기 시작했고, 태평양전쟁(1941.12.8~1945.9.2)이 시작됐습니다.
국민 모두에게 앞이 보이지 않던 암울한 시간이었습니다.
청년 윤동주는 졸업 후 진로 문제 등으로 어느 때보다 고뇌가 깊었던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1941년 3월 12일, 시 '눈 오는 지도(地圖)'가 탈고되었을 즈음의 청년 윤동주를 생각합니다.
그즈음 연희전문 4학년, 25세의 청년 윤동주는 문득 어린 시절의 한 장면이 떠올랐네요.
'순이(順伊)'가 떠올랐네요.
'순이'는 시인님이 갈무리해 둔 시집에서 '눈 오는 지도(地圖)' 바로 앞의 시 '소년(少年)'도 등장합니다.
시 '소년'에는 '순이'가 이렇게 등장합니다.
강물 속에는 사랑처럼 슬픈 얼골 - 아름다운 순이(順伊)의 얼골이 어린다. 소년(少年)은 황홀히 눈을 감어 본다.
- 윤동주 시 '소년(少年)' 중에서.
그러니 '순이'는 소년 동주가 좋아했던 소녀였을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윤동주 시인님이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은, 우리 민족이 이주했던 백두산 북쪽의 옛 만주 일대 간도 명동촌이었습니다.
그 고장은 광활한 벌판이 있고, 겨울에는 눈이 많은 곳이었습니다.
눈 내리던 어느 겨울 아침, '순이'가 그 광활한 벌판의 눈길을 헤치고 고향을 떠나갔다고 합니다.
자, 시 '눈 오는 지도(地圖)' 속으로 들어가봅니다.
3. 겨울 아침 떠난 '순이'와 '잃어버린 역사'가 말하는 것은?
시 '눈 오는 지도(地圖)'의 첫 줄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순이(順伊)가 떠난다는 아침에 말못할 마음으로 함박눈이 나려, 슬픈 것처럼 창(窓)밖에 아득히 깔린 지도(地圖) 우에 덮인다.'
산문시인데, 첫 줄은 '순이'가 떠난 아침 풍경을 보여주네요.
'슬픈 것처럼 창밖에 아득히 깔린 지도'. 이 구절의 '지도'를, 우리가 앞에서 만나본 '발자국 지도'로 새깁니다.
방 안에서 보니 '창밖' 저 멀리 '아득히' 발자국들이 점점이 찍혀있네요.
사방팔방 하얗게 변해버린 세상인데 발자국들만 벌판 끝으로 사선처럼 끊임없이 이어져 있는 풍경이 보이는 것만 같습니다.
그 '발자국'이 순이네가 떠난 발자국입니다.
'슬픈 것처럼'. 좋아하는 순이가 떠난 발자국이니 슬픈 발자국입니다.
'말못할 마음으로 함박눈이 나려'. 말없이 고요히 내리는 눈이 화자의 먹먹한 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지도(地圖) 우에 덮인다'. 함박눈이 발자국을 덮어 점점 지워가고 있는 상황입니다.
화자가 느끼는, 앞이 안 보이는 암담한 상황이 느껴지는 것만 같습니다.
'방(房)안을 돌아다 보아야 아무도 없다. 벽(壁)과 천정(天井)이 하얗다. 방(房)안까지 눈이 나리는 것일까,'
'순이'가 떠나고 난 뒤 홀로 남게 된 화자입니다.
화자가 '순이'를 얼마나 좋아했던지, '순이'가 떠나니 '방안'에는 '아무도' 없는 것 같다고 합니다.
'벽(壁)과 천정(天井)이 하얗다'. 좋아하던 대상이 떠나면서 세상이 순식간에 증발해 버린 듯한 상황에 놓인 화자의 슬픔과 외로움이 느껴집니다.
'정말 너는 잃어버런 역사(歷史)처럼 홀홀이 가는 것이냐,'
이 시가 연시(戀詩)인 줄만 알고, 첫 줄부터 가벼운 마음으로 졸래졸래 따라온 우리는 이 구절에서 멈칫하지 않을 수 없네요.
'잃어버런 역사(歷史)'가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잃어버린'일텐데, 오자인지 아니면 당시엔 이렇게 표현했는지 '잃어버런'이라고 표기되어 있습니다.
'순이'가 떠나던 날은 시인님의 소년시절 일입니다.
지금 시를 쓰고 있는 때는 대학 4학년 25세 청년입니다.
이 청년 윤동주가 어린 시절의 추억을 회상하던 순간, 순이와의 느닷없는 이별이 나라를 잃어버린 처참과 오버랩되고 있습니다.
홀홀히('홀홀이')는 '문득 갑작스럽게'의 뜻입니다.
나라를 빼앗긴 일도, 순이가 떠나간 일도 그렇게 '홀홀이' 일어난 일이었네요.
어린 소년에게 세계의 전부였을 순이를 잃은 상실감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철이 들어 청년 세계의 기둥이었을 나라를 잃은 상실감을 생각해 봅니다.
그 두 가지 상실감 모두에서 화자가 얼마나 아파하고 힘들어했던가를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떠나기 전(前)에 일러둘 말이 있든 것을 편지를 써서도 네가 가는 곳을 몰라 어느 거리, 어느 마을, 어느 지붕밑, 너는 내 마음속에만 남아 있는 것이냐,'
'순이'와의 이별과 '잃어버린 역사'를 비유했다가 이어진 이 구절에서 우리는 이 이야기가 '순이'에 대한 것인지 '역사'에 대한 것인지 알지 못하는 혼돈스런 상태에 빠지게 되네요.
그러나 아무려면 어떻겠는지요? 그것이 어떤 사연에 대한 것인지는 이제 상관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네가 가는 곳을 몰라', '너는 내 마음속에만'. 여기 나오는 '너'가 '순이'여도, '잃어버린 역사'여도 우리는 같은 아픔 속에 스며들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
- 내 친구 '순이', 내 조국 대한민국은 어디에 있을까?
-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는 걸까?
- '내 마음속에만 남아 있는 것'일까?
'너는 내 마음 속에만 남아 있는 것이냐'. 이렇게 화자는 '내 마음 속에만 남아'있다고 합니다.
'네 쪼고만 발자욱을 눈이 자꼬 나려 덮여 따라 갈 수도 없다.'
시의 제목이 '눈 오는 지도(地圖)'라는 점을 상기해 봅니다.
'네 쪼고만 발자욱'이 찍힌 '발자국 지도'에 '눈이 자꼬 나려 덮여'간다고 합니다.
'발자국 지도'는 점점 지워지고 있네요.
구심점(求心点).
삶에서 나의 중심이 되는 대상이 점점 지워지고 있네요.
그래서 '따라갈 수도 없다'라고 합니다.
이제 화자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암흑 속에 빠졌습니다.
화자의 상실감, 절망감이 깊이 느껴지는 구절이네요.
'눈이 녹으면 남은 발자욱자리마다 꽃이 피리니 꽃 사이로 발자욱을 찾어 나서면 일년(一年) 열두달 하냥 내 마음에는 눈이 나리리라.'
이 시의 마지막 구절은 과연 희망일까요?
발자국이 눈에 덮여 '발자국 지도'가 끝내 지워졌습니다.
그 '눈이 녹으면' 발자국('발자욱')를 찾아 나선다고 합니다.
그 길은 무난할까요? 아니, 험난할 것입니다.
'발자욱을 찾아 나서면'. 험난할지라도 화자는 그 길을 찾아 나서겠다고 합니다.
지도가 없이 가는 삶입니다.
나침반 없이, 좌표 없이 가는 삶입니다.
화자가 가게 될 그 길, 일년 내내 어떻겠는지요?
'일년(一年) 열두달 하냥 내 마음에는 눈이 나리리라'
여기서 내리는 '눈'은 무얼까요? 행복일까요? 고난일까요?
'독서목욕'은 이 '눈'은 고난이라고 새깁니다. 자신의 '지도'를 덮어버린 '눈'입니다.
가지고 있었던 '지도'를 잃고 가야 하는 길, 괴로움과 어려움이 가득한 길일 것입니다.
화자는 알고 있습니다.
'일년(一年) 열두 달' 그 길이 얼마나 험난한 길이 될 것인가를요.
그래도 화자는 포기하지 않고, 그 길을 가리라 다짐하네요.
'내 마음에는 눈이 나리리라'
그래서 이 마지막 구절은 이렇게 읽힙니다.
'아무리 눈이 내려도 나의 길을 가리라'
우리 삶은 항상 '눈 오는 지도(地圖)'일까요?
그대도 '눈 오는 지도(地圖)' 위 그대만의 길을 애쓰며 찾아 가고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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