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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스미기

송찬호 시 가을

by 빗방울이네 2023. 1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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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찬호 시인님의 시 '가을'을 만납니다. 스마트폰에 눈을 떼지 못하고, 사이버 세상을 하염없이 유영하는 우리의 건조해진 마음을 씻어주는, 유쾌 발랄하고 따뜻한 목욕물 같은 시라고 할까요? 함께 읽으며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송찬호 시 '가을' 읽기

 
가을
 
- 송찬호
 
딱! 콩꼬투리에서 튀어나간 콩알이 가슴을 스치자, 깜짝 놀란 장끼가 건너편 숲으로 날아가 껑, 껑, 우는 서러운 가을이었다
 
딱! 콩꼬투리에서 튀어나간 콩알이 엉덩이를 때리자, 초경이 비친 계집애처럼 화들짝 놀란 노루가 찔끔 피 한방울 흘리며 맞은편 골짜기로 정신없이 달아나는 가을이었다
 
멧돼지 무리는 어제 그제 달밤에 뒹굴던 삼밭이 생각나, 외딴 콩밭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지나치는 산비알 가을이었다
 
내년이면 이 콩밭도 묵정밭이 된다 하였다 허리 구부정한 콩밭 주인은 이제 산등성이 동그란 백도라지 무덤이 더 좋다 하였다 그리고 올 소출이 황두 두말 가웃은 된다고 빙그레 웃었다
 
그나저나 아직 볕이 좋아 여직 도리깨를 맞지 않은 꼬투리들이 따닥 따닥 제 깍지를 열어 콩알 몇 낱을 있는 힘껏 멀리 쏘아 보내는 가을이었다
 
콩새야, 니 여태 거기서 머하고 있노 어여 콩알 주워가지 않구, 다래 넝쿨 위에 앉아 있던 콩새는 자신을 들킨 것이 부끄러워 꼭 콩새만한 가슴만 두근거리는 가을이었다


- 송찬호 시집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문학과지성사, 2009년) 중에서

 
송찬호 시인님은 1959년 충북 보은 출신으로 1987년 「우리 시대의 문학」 6호에 '금호강' 등으로 등단했습니다. 시집 「10년 동안의 빈 의자」 「붉은 눈, 동백」 「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다」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 「분홍 나막신」 등이, 동시집 「저녁별」 「초록 토끼를 만났다」 등이 있습니다. 김수영문학상, 동서문학상, 대산문화상 등을 수상했습니다.


2. 콩알과 장끼와 노루와 멧돼지가 있는 가을 풍경


송찬호 시인님의 시 '가을'은 2008년 제8회 미당문학상 수상작품입니다. 시인님 40대 후반에 쓰인 시네요. 어떤 맛일까요?
 
딱! 콩꼬투리에서 튀어나간 콩알이 가슴을 스치자, 깜짝 놀란 장끼가 건너편 숲으로 날아가 껑, 껑, 우는 서러운 가을이었다

- 송찬호 시 '가을' 중에서

 
아, 콩꼬투리 '자동 소총' 이야기네요. 가을엔 매우 주의해야합니다. 누구라도 무엇이라도 자기를 살짝이라도 건드려주기를 바라는 애정 갈구형 가을 열매니까요. 건드리면요? '개봉 박두' 직전의 탱탱한 꼬투리 속에 있던 콩이 저렇게 '딱!' 튀어 그대의 가슴을 쏠 지 모릅니다.
 
하필 장끼(숫꿩)가 그 콩에 맞았네요. 까투리(암꿩)의 느닷없는 이별 통보로 그렇잖아도 서러웠던 장끼였을까요? 왜 나만 가지고 그러냐고요! '껑, 껑,' 울음보가 터져버린 장끼의 푸념이 들리는 듯 하지 않습니까?
 
딱! 콩꼬투리에서 튀어나간 콩알이 엉덩이를 때리자, 초경이 비친 계집애처럼 화들짝 놀란 노루가 찔끔 피 한방울 흘리며 맞은편 골짜기로 정신없이 달아나는 가을이었다

- 송찬호 시 '가을' 중에서

 
노루는 얼마나 예민한 아이인지요! 깊이 잠들지 못하고 자꾸  놀라 깨는 ‘노루잠’이라는 단어가 생각나네요. 그렇게 민감한 아이가 콩 탄환에 맞았네요. 그것도 엉덩이에요. '찔끔 피 한방울 흘리며'. 이 구절은 고향 충북 보은에 머물고 있는 시인님이 실제로 본 장면이겠습니다. 시인은 상상으로 이런 적나라한 구절을 쓰지 않으니까요. 정말 숨겨주고 싶은 노루네요. 도시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장면이기에 이 구절은 시의 울림의 동심원을 더 멀리 퍼뜨리네요.
 
멧돼지 무리는 어제 그제 달밤에 뒹굴던 삼밭이 생각나, 외딴 콩밭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지나치는 산비알 가을이었다

- 송찬호 시 '가을' 중에서

 
난 인삼 아니면 상대도 안 한다구! '달밤에 뒹굴던'. 멧돼지들은 힘이 넘쳤겠어요. 그 둥그런 달 아래 그 둥그런, 능글능글한 덩치들이 삼밭에서 뒹굴었네요(이 장면에서 삼밭 주인이 걱정되네요). 장난기 가득한 시인님 덕분에 우리는 흥미로운 동화 속으로 들어온 것만 같네요. 

 

송찬호시가을중에서
'딱, 콩꼬투리에서 튀어나간 콩알이' - 송찬호 시 '가을' 중에서.

 

 

3. 명랑 유쾌하고 천진난만한 가을 동화의 세계로

 

내년이면 이 콩밭도 묵정밭이 된다 하였다 허리 구부정한 콩밭 주인은 이제 산등성이 동그란 백도라지 무덤이 더 좋다 하였다 그리고 올 소출이 황두 두말 가웃은 된다고 빙그레 웃었다

- 송찬호 시 '가을' 중에서

 
이번이 마지막 농사네요. 이제 늙어서 콩농사도 못 짓는다 합니다. 이제 저승 가서 놀아야지. ‘허리 구부정한 콩밭 주인’의 담담한 혼잣말이 들리는 듯하네요. '백도라지 무덤'. 백도라지가 많이 피어있는 곳을 말하네요. 백도라지꽃처럼 하얀 꽃으로 피어나고 싶었을까요? 콩밭도 주인도 이렇게 자연의 품속으로 스며들게 되었네요. 
 
'소출(所出)', 논밭에서 나는 곡식의 양을 말합니다. 황두(노란콩) 두말 가웃. '가웃'은 앞말의 단위에 절반 정도를 더 보태는 말입니다. 그러니 두말 반이네요. 양이 조금이네요. 내년 내내 먹을 된장 담그면 되는 양일까요? 이 곡식을 얻기 위해 봄부터 여름까지 얼마나 수고로운 시간이었을까요.
 
그나저나 아직 볕이 좋아 여직 도리깨를 맞지 않은 꼬투리들이 따닥 따닥 제 깍지를 열어 콩알 몇 낱을 있는 힘껏 멀리 쏘아 보내는 가을이었다

- 송찬호 시 '가을' 중에서

 
'허리 구부정한 콩밭 주인'은 아직 남은 가을볕 더 쬐라고, 더 마르라고 콩을 그대로 두었네요. 그 사이 '꼬투리들의 공작(工作)'이 한창이네요. 콩밭 주인 몰래 '2세 퍼뜨리기 작전' 말예요. 내년에도 이 콩에서 싹이 나서 콩이 콩콩콩 열려 위대한 콩의 대를 잇게 말예요. 그래서 가능한 멀리 콩알을 쏘아대고 있어요. ‘있는 힘껏’, 주인 몰래, 쉿! '따닥 따닥'.
 
콩새야, 니 여태 거기서 머하고 있노 어여 콩알 주워가지 않구, 다래 넝쿨 위에 앉아 있던 콩새는 자신을 들킨 것이 부끄러워 꼭 콩새만한 가슴만 두근거리는 가을이었다

- 송찬호 시 '가을' 중에서

 
'코투리들의 공작'을 '허리 구부정한 콩밭 주인'도 잘 알고 있었겠지요. '콩알 몇 낱' 좀 빈다고 대수겠는지요. 콩새한테도 어서 콩알 주워가라고 하네요. '니 여태 거기서 머하고 있노 어여 콩알 주워가지 않구'. 인간이 콩새에게 건네는 이 대화, 사실은 농부들이 자연에게 아무 거리낌없이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런 문장은요, 뒤도 돌아보지 못하고 첨단정보화시대를 바삐바삐 살아가야만 하는 우리를 까무룩 자물시게 하네요. 얼마나 따뜻한지요.
 
아, 콩새의 반응에 우리는 또한번 '심쿵하게' 됩니다. 그렇잖아도 '다래 넝쿨 위에 앉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는데요, '허리 구부정한 콩밭 주인'은 그걸 다 알고 있었네요. 그래서 부끄럽다고 합니다. 그래서 '꼭 콩새만한 가슴만 두근거리는 가을이었다'고 합니다.

이는 모두 시인님의 마음일텐데요, 아, 얼마나 다정한 시인님인지요? 시인님은 이렇게 아름다운 가을을 떡 하니 차려두고 그 속에서 해맑게 사시네요.

이처럼 명랑 유쾌하고 천진난만한 동화 속의 세계로 우리를 초대해 마음을 씻겨주신 시인님, 감사합니다.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 목욕'에서 장석주 시인님의 '대추 한 알'을 만나 보세요.

 

장석주 시 대추 한 알 읽기

장석주 시인님의 시 '대추 한 알'을 만납니다. 이 시에서 우리는 어떤 삶의 비기를 발견할 수 있을까요? 시인님이 퍼올려주는 사유의 우물물로 마음을 맑히며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장석주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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