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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스미기

정호승 시 국화빵을 굽는 사내 읽기

by 빗방울이네 2023. 10.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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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승 시인님의 시 '국화빵을 굽는 사내'를 만납니다. 거리의 모퉁이에서 만나는 국화빵처럼 향기롭고 따뜻한 시입니다. 시인님이 건네주는 국화빵을 음미하며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정호승 시 '국화빵을 굽는 사내' 읽기

 
국화빵을 굽는 사내

- 정호승(1950~ , 경남 하동)
 
당신은 눈물을 구울 줄 아는군
눈물로 따끈따끈한 빵을 만들 줄 아는군
오늘도 한강에서는
사람들이 그물로 물을 길어 올리는데
그 물을 먹어도 내 병은 영영 낫지 않는데
당신은 눈물에 설탕도 조금 넣을 줄 아는군
눈물의 깊이도 잴 줄 아는군
구운 눈물을 뒤집을 줄도 아는군


- 정호승 시선집 「내가 사랑하는 사람」(비채, 2021년) 중에서
 

2. '당신은 눈물을 구울 줄 아는군'


시 '국화빵을 굽는 사내'가 실린 정호승 시인님의 시선집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 시인님이 직접 쓰신 사인이 있습니다. 이렇게 쓰셨네요.

'시는 인간을 이해하게 합니다. 정호승'

오늘 만나는 시인님의 시 '국화빵을 굽는 사내'도 그렇네요. 이 '사내'를, 이웃을, 인간을 이해할 수 있는 시입니다.

그 '사내', 만나볼까요?

당신은 눈물을 구울 줄 아는군

- 정호승 시 '국화빵을 굽는 사내' 중에서


이 첫 줄에서 우리의 눈동자는 동그래집니다. 뭐라고요? 눈물을 굽는다고요? 하면서요.
 
그러나 이내 우리는 저절로 이 구절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왜냐하면 국화빵이 품고 있는 의미를 우리는 이미 너무나 잘 알고 있으니까요. 고단하게 살아가는 삶을, 눈물 그렁그렁 품은 삶 말입니다. 그 뜨거운 눈물을, 고단한 사연을 향기롭게 '구울 줄' 아는 사내라고 합니다.
 
'구울 줄 아는군'. 이 구절에서 우리는 구워지는 눈물은 절망이 아니라 따뜻한 희망을 품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눈물로 따끈따끈한 빵을 만들 줄 아는군

- 정호승 시 '국화빵을 굽는 사내' 중에서

 
여름이 끝나고 날씨가 쌀쌀해지면 국화빵 장사들이 하나둘씩 거리에 나타납니다. 거리의 모퉁이에, 잘 안 보이는 구석에요. 그리고 고소한 국화빵 냄새를 거리에 가득 풍기기 시작합니다. 얼마나 반가운지요. 이 황량하고 차가운 콘크리트의 도시에 이렇게 따뜻한 온기를 품은 국화빵 장사들이 없다면 얼마나 쓸쓸할까요? 

이 도시의 한복판에서 이 값에 이만한 온기를 다른 데서 살 수 있겠는지요? 그 따끈따끈한 빵 속에서 눈물을 발견한 시인님은 매우 다정한 눈길로 그 '사내'를 바라보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오늘도 한강에서는 / 사람들이 그물로 물을 길어 올리는데

- 정호승 시 '국화빵을 굽는 사내' 중에서


이 구절에서 우리는 잠시 멈칫하게 됩니다. '그물로 물을 길어 올리는데'? 어떤 풍경이 담긴 말일까요?
 
이 구절의 첫 인상은 하염없이 허망한 일이라는 느낌이 드네요. '한강'은 서울을 상징하겠네요. 나아가 우리가 사는 도시, 생존경쟁이 치열한 삶터이기도 하겠고요. 남을 앞서야 살아남을 수 있는 살벌한 곳입니다. 삶의 가치가 사랑과 공존보다는 돈과 욕망에 집중되어 있는 곳입니다. 
 
그런 사막 같은 곳에서 끝내 채워지지 않을 욕망을 채우기 위한 일상은 반복됩니다. 그렇게 열심히 살아가지만 거의 원하는 삶을 살아가지 못하는,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그물로 물을 길어 올리듯 허망하고 슬픈 일이네요.
 
이 구절의 두번째 인상은 시인님이 만들어놓은 만화경이 아닌가 하는 생각요. 그래서 '그물로 물을 길어 올리는데'를 '그 물 물을 길어 올리는데'로 띄어쓰기를 바꿔 읽으면 의미가 더 확장되는 느낌을 받습니다. 반복되는 일상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삶, 돈이 돈을 버는 자본의 수레바퀴에 깔려 늘 제자리인 삶들 말입니다.
 

정호승시국화빵을굽는사내중에서
정호승 시 '국화빵을 굽는 사내' 중에서.

 

 

3. '나는 눈물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 물을 먹어도 내 병은 영영 낫지 않는데

- 정호승 시 '국화빵을 굽는 사내' 중에서

 
그래서 시인님은 '그물'로 길어 올린 '그 물'을 먹어도 자신의 병은 낫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것도 영영요. 시인님이 앓고 있는, 아니 우리가 앓고 있을 마음의 병은 ‘한강’에서 길어 올린 ‘그 물’로는 낫지 않는다고 하네요. ‘그 물’에는 사랑이 없기 때문이겠지요. 따뜻함이, 눈물이 아니고는 고독과 허무라는 이름의 병은 치유되기 어렵다고 합니다. 그런 병은 돈으로만 치료되는 것이 아니니까요.

당신은 눈물에 설탕도 조금 넣을 줄 아는군

- 정호승 시 '국화빵을 굽는 사내' 중에서


이 6행을 앞 5행과 이어 보면 이렇습니다. ‘그 물을 먹어도 내 병은 영영 낫지 않는데 / 당신은 눈물에 설탕도 조금 넣을 줄 아는군’. '한강'에서 그물로 길어 올린 물로는 낫지 않던 병이, 이 6행에서 낫는다는 것을 알 수 있네요. ‘사내’가 눈물로 구운 빵, 눈물에 설탕을 조금 넣어 구운 빵으로는 시인님의 병이 낫는다고 합니다. 
 
시인님의 다른 시에서 몇 구절을 잠시 읽습니다.

나는 눈물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 나는 눈물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방울 눈물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 기쁨도 눈물이 없으면 기쁨이 아니다

- 정호승 시 '내가 사랑하는 사람' 중에서

 
시인님은 눈물의 의미, 고통의 의미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눈물/고통이 더 참된 삶, 따뜻한 삶의 자양분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눈물의 깊이도 잴 줄 아는군 / 구운 눈물을 뒤집을 줄도 아는군

- 정호승 시 '국화빵을 굽는 사내' 중에서


눈물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만이 눈물의 삶을 살아가는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있겠지요. 삶의 바닥까지 가본 사람들은 서로를 선뜻 감싸 안을 수 있겠지요. 사람에 대한 이런 이해와 공감과 사랑은 ‘한강’이라는 삭막한 삶의 들판에서는 만나기 어려운 것입니다.
 
시인님을 생각합니다. 거리의 모퉁이에서 국화빵을 주문해 놓고 '국화빵을 굽는 사내'를 지긋이 바라보고 있었을 시인님을요. 밤이 깊어지기 전에 국화빵이 많이 팔려야 할 텐데 걱정도 하고, 이 자리에서 쫓겨나지 않고 올 겨울 내내 장사를 할 수 있어야 할 텐데 하며 불안해하기도 하면서요.
 
시 '국화빵을 굽는 사내'를 읽으니 따뜻하고 향기로운 국화빵 같은 시인님 마음이 전해지는 것만 같네요. 오늘 퇴근길 거리에서 국화빵이 보이면 큰 봉지로 한가득 사야겠어요!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 목욕'에서 정호승 시인님의 시 '선암사'를 만나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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