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주 시인님의 시 '국화 옆에서'를 만납니다. 무엇이 국화꽃을 피어나게 했을까요? 시인님이 건네주는 더운 사유의 목욕물로 저마다의 마음을 씻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서정주 시 '국화 옆에서' 읽기
국화 옆에서
- 서정주(1915~2000, 전북 고창)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 서정주 시집 「질마재로 돌아가다」(미래문화사, 2001년 1쇄, 2002년 3쇄) 중에서
2. 국화꽃 한 송이에서 '볼 수 있는 것'들에 대하여
우리 모두 사랑해서 즐거이 낭송하는 시, 서정주 시인님의 '국화 옆에서'는 시인님 33세 때 쓰였습니다. 「서정주문학앨범」(웅진출판, 1993년)에 따르면, 이 시는 1947년 11월 9일 경향신문에 발표돼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 봄부터 소쩍새는 / 그렇게 울었나 보다
- 서정주 시 '국화 옆에서' 중에서
방심하고 있던 어떤 이는 이 첫 구절에서 살짝 당황합니다. 국화꽃과 소쩍새가 무슨 관계이지요?라고요. 왜 소쩍새가 국화꽃을 위해 그렇게 처절하게 울어요?라고요. 바로 이 점이 이 시의 가장 큰 매력이겠습니다. 국화꽃과 소쩍새를 짝지어준 시인님의 따뜻한 상상력 말입니다.
국화꽃이라는 생명을 탄생시키기 위해 소쩍새-자연-우주가 참여하고 있다는 시인님의 상상력은 얼마나 깊고 넓은지요? 가을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처절한 소리로 소쩍새가 울었다는 발상 앞에서 우리는 생명과 자연에 대하여 깊은 경외심을 느끼게 됩니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 서정주 시 '국화 옆에서' 중에서
앞의 1연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한 봄의 참여였다면 이 2연은 여름의 참여입니다. 봄의 소쩍새에 이어 여름의 천둥도 그렇게 울었다고 하네요.
이 시에 바짝 다가가기 위해 아래의 문장을 함께 읽습니다.
우리는 꽃 한 송이가 햇빛, 흙, 물, 시간, 공간 같은
꽃 아닌 요소들만으로 이루어졌음을 알고 있지요.
우주에 가득 한 모든 것이 한 송이 꽃을 피어나게 하는데,
그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조건들을
우리는 '꽃 아닌 요소들'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 「틱낫한의 사랑법」(틱낫한 지음, 이현주 옮김, 나무심는사람, 2002년)
이제 우리는 국화꽃 한 송이를 보면서 '아, 예쁘다.'라고만 말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국화꽃 안에 있는 봄의 소쩍새 울음과 여름의 천둥소리를 떠올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나아가 국화꽃에 스며있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인연을 상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시인님이 건네주신 시 구절로 우리는 우주의 신비, 생명의 존엄성에 대해 생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어마어마한 일인지요?
3.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 서정주 시 '국화 옆에서' 중에서
그동안 국화는 덕과 학식 높은 군자(君子)의 상징이었는데, 이 구절로 인해 국화가 누님의 꽃이 된 일은 얼마나 멋진 일인지요? 고결한 존엄으로 다가가기 어려운 군자의 꽃이 아니라 우리 가까이 있는 친근한 누님의 꽃이 된 것은 참 좋은 일이 아닌지요?
그런데요, 왜 시인님은 국화를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라고 했을까요?
시인님이 33세에 이 시를 썼으니 누님이라면 그 이상의 나이, 30대 후반이나 40대의 여인일 것입니다.
이 누님은 젊은 날의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시간을 건넜습니다.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은 불안과 실패, 좌절과 방황의 길이었습니다. 그 시련의 시간 속에서 모서리는 둥글어지고 무른 것은 단단해졌습니다. 반짝이기만 하던 눈은 깊어졌습니다. 인고(忍苦)의 세월은 성숙으로 이어졌을 것입니다.
그런 세월을 지나온 누님의 성숙은 고요하고 은은한 아름다움이겠습니다. 바로 국화꽃처럼요. 국화꽃은 가을꽃입니다. 봄날의 꽃과는 달리 국화꽃은 겨울과 봄과 여름의 어려운 여건을 견뎌내고 피어납니다.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을 헤쳐온 누님처럼요.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거울을 보는 행위는 성찰(省察)을 상징합니다. 누님은 거울 앞에서 자신을 비춰보면서 지나온 세월의 자신을 돌아보고 있습니다. '내 누님 같이 생긴 꽃이여'. 화려하지 않고 소박하고 단아한 자태, 강하지 않고 은은한 향. 바로 국화꽃과 누님입니다.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 서정주 시 '국화 옆에서' 중에서
봄의 소쩍새(1연), 여름의 천둥(2연)에 이어 가을의 무서리 등장입니다. 국화꽃이 피는 데 참여한 공로자들이네요. 특히 이 마지막 4연에서는 시의 화자도 국화꽃 개화 공로자로 등장합니다. 어쩐지 지난밤 잠이 안 오더라니, 국화꽃이 피려고 그랬군!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이 구절로 인해 '나'는 국화꽃의 개화가 멀고 높은 곳에서 일어나는 남의 일이 아니라 나에게 가까운 일, 바로 나의 일이기도 한 것이었다는 자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나도 국화꽃의 개화에 기여했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답고 신비로운 기분을 주는지요.
이 시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네요. 국화꽃의 개화에 소쩍새와 천둥과 무서리와 '나'라는 '과정'이 있었고, 거울 앞에 선 아름다운 누님에게는 시련으로 점철된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이라는 '과정'이 있었네요. 아름다움에 이르는 과정 말입니다.
지금의 '나'는 어떤 '과정'의 총체인지를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지금의 이 '과정'은 어떤 결과로 이어지게 될지를요. 그리하여 어떤 아름다움으로 자성(自省)의 거울 앞에 서게 될 지도요.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목욕'에서 서정주 시인님의 시 '자화상'을 만나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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