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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스미기

백석 시 추야일경

by 빗방울이네 2024. 1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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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 시인님의 시 '추야일경(秋夜一景)'을 만납니다. 밤을 새워 김장을 하는 풍경 속에 풍요롭게 이어지는 생명의 숨소리가 들리는 시입니다. 함께 읽으며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백석 시 '추야일경(秋夜一景)' 읽기

 

추야일경(秋夜一景)

 

백석(1912~1995, 평북 정주)

 

닭이 두 홰나 울었는데

안방 큰방은 홰즛하니 당등을 하고

인간들은 모두 웅성웅성 깨여 있어서들

오가리며 석박디를 썰고

생강에 파에 청각에 마눌을 다지고

 

시래기를 삶는 훈훈한 방안에는

양염 내음새가 싱싱도 하다

 

밖에는 어데서 물새가 우는데

토방에선 햇콩두부가 고요히 숨이 들어갔다

 

▷「정본 백석 시집」(백석 지음, 고형진 엮음, 문학동네, 32쇄 2019년) 중에서.

 

2. 밤새 김장 담그는 평화롭고 풍요로운 풍경 

 

백석 시인님의 시 '추야일경(秋夜一景)'은 1938년 「삼천리문학」에 발표된 시입니다.

 

시인님 26세 즈음이네요.

 

제목 '추일야경(秋夜一景)'은 '가을밤의 한 풍경'으로 새겨봅니다.

 

어떤 풍경일까요? 

 

'닭이 두 홰나 울었는데' 

 

'홰'는 새벽에 닭이 올라앉은 나무 막대를 말하기도 하고 그 홰를 치면서 우는 차례를 세는 단위이기도 합니다. 

 

닭이 그렇게 두 차례나 울었으니, 지금 시 속의 시간은 새벽이 밝아오는 시간이네요.

 

'안방 큰방은 홰즛하니 당등을 하고'

 

'안방 큰방'은 집안에서 중심이 되는 안방으로 쓰이는 큰방이라는 의미로 새깁니다.

 

'홰즛하니'는 국어사전에 안 나오네요. 뒤에 꾸미고 있는 '당등'에서 그 뜻을 헤아려봅니다.

 

'당등'은 장등(長燈)을 뜻합니다(「평북방언사전」, 김이협 편저). 장등은 밤새도록 켜두는 등을 말하고요. 그렇게 밤새도록 등을 오래 켜두는 일을 '당등하다'라고 표현하네요.

 

밖에서 멀찌감치 보는 안방의 느낌일까요?

 

새벽이 오도록 당등하고 있는 안방의 분위기가 홰즛하다고 합니다.

 

그러니 '홰즛하니'는 어쩐지 희부연하고 적막한 느낌이 드는 부사 같습니다. '호젓하니'의 어감이 느껴지기도 하고요.

 

'인간들은 모두 웅성웅성 깨여 있어서들'

 

시인님의 카메라가 밖에서 안방으로 쑥 들어온 느낌이네요.

 

밖에서 보니 '홰즛'했는데, 안에 들어와 보니 '웅성웅성 깨여' 있다고 하고요.

 

위에 언급된 같은 사전에 보면, '인간'은 '식구'의 평북 방언입니다. 

 

백석 시인님의 다른 시 '박각시 오는 저녁'에도 이 '인간들'이 나옵니다.

 

잠시 볼까요?

 

당콩밥에 가지냉국의 저녁을 먹고 나서

바가지꽃 하이얀 지붕에 박각시 주락시 붕붕 날아오면

집은 안팎 문을 횅하니 열젖기고

인간들은 모두 뒷등성으로 올라 멍석자리를 하고 바람을 쐬이는데

- 백석 시 '박각시 오는 저녁' 중에서.

 

'식구'를 '인간'이라고 부르는 점이 특별하게 다가옵니다.

 

일반적인 언어관습에 비추어서는, 좀 낮잡아 보는 느낌이 드는 것도 같고요.

 

다른 한편으로는 그만큼 허물없이 아주 친한 느낌이 드는 것도 같고요.

 

아무튼 밤새도록 그 '인간들은 웅성웅성 깨여' 무얼 하고 있을까요?

 

다시 '추야일경'으로 돌아옵니다.

 

'오가리며 석박디를 썰고 / 생강에 파에 청각에 마눌을 다지고'

 

'오가리'는 무나 호박 따위를 길게 오리거나 썰어서 말린 것을, '섞박지('석박디')'는 배추와 무, 오이를 버무려 담은 김치를 말합니다.

 

여기서는 그렇게 김치를 만들기 위해 무와 배추 등속을 길거나 넓적하게 썰고 있다는 뜻이겠네요.

 

청각은 해조류입니다. 한자로 '靑角'인데, 짙은 녹색의 아주 자그마한 사슴뿔 모양 같기도 합니다. 김장 김치에 고명으로 넣어 먹는데 아주 향긋한 맛을 냅니다.

 

그러니 이 풍경은 김장을 하는 장면이네요.

 

늦가을밤 식구들이 웅성웅성 깨어서들 밤새도록 김장을 하고 있었네요.

 

탁탁탁 톡톡톡 쓱쓱쓱···. 도마에 무얼 칼질하는 소리, 절구에 무얼 빻는 소리 들리고요,

 

생강과 파와 마늘 냄새가 안방 가득하고요,

 

식구들 이야기, 이웃 이야기 사이로 웃음꽃도 피어나고요.

 

겨울 내내 먹어야 하는 김장 담그는 일은 중요한 연중행사이자 집안의 작은 축제이기도 했겠습니다.

 

'시래기를 삶는 훈훈한 방안에는 / 양염 내음새가 싱싱도 하다'

 

김장 담그는 무와 배추에서 골라낸 무청이나 배춧잎을 시래기로 삶고 있네요.

 

이 시래기도 처마에 걸어 말려서 겨울 동안 먹는 이 집안의 중요한 먹거리입니다.

 

그 많은 시래기를 삶고 있으니 불기운과 뜨거운 증기로 꽉 찬 방안의 그 훈훈함이 느껴지는 것만 같네요.

 

'싱싱하다'는 '시들거나 상하지 않고 생기가 있다' '힘이나 기운 따위가 왕성하다' '빛깔 따위가 맑고 산뜻하다' 같은 의미가 있습니다.

 

'양염 내음새가 싱싱도 하다'. 누구라도 김장 양념('양염') 냄새를 맡으면 침이 꿀꺽 넘어가면서 몸에 기운이 솟구치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 벌건 양념에 갓 버무린 배추 한쪽을 수육에 둘둘 말아 막걸리 한 사발 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양염 내음새가 싱싱도 하다'의 의미가 쑤욱 들어오네요.

 

"밖에는_어데서_물새가_우는데_토방에선_햇콩두부가_고요히_숨이_들어갔다"-백석_시 '추야일경'_중에서.
"밖에는 어데서 물새가 우는데 토방에선 햇콩두부가 고요히 숨이 들어갔다" - 백석 시 '추야일경' 중에서.

 

 

3. '햇콩두부가 고요히 숨이 들어갔다'에 담긴 뜻

 

'밖에는 어데서 물새가 우는데'

 

안방에 있던 시인님의 카메라는 다시 밖으로 나온 걸까요?

 

지금 시인님은 눈을 감고 있을까요?

 

어디서 우는지 물새 울음소리가 들린다고 하네요.

 

물새도 잠에서 깨어나는 희부연한 새벽녘입니다. 

 

다들 잠들어 있는 이런 새벽녘은 무척 고요하였겠습니다.

 

그 고요를 뚫고 물새가 울었으니, 사방이 얼마나 고요한 지를 확인시켜 주는 물새 울음이었겠습니다.

 

'토방에선 햇콩두부가 고요히 숨이 들어갔다'

 

안방이 아니라 이젠 '토방'의 정경입니다.

 

'토방'은 마루를 놓을 수 있게 된 처마 밑의 땅바닥을 말합니다. 거기에 놓인 댓돌을 토방돌이라고 하고요.

 

그러니 '토방'은 추운 곳이네요.

 

시인님이 안방에서 밖으로 나와보니 처마 밑 토방에서 굳어가는 두부를 발견했네요.

  

이번 가을에 거둔 햇콩으로 만든 두부라고 합니다.

 

'토방에선 햇콩두부가 고요히 숨이 들어갔다'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배추를 절일 때 어머니가 어린 빗방울이네에게 하시던 말씀이 생각나네요.

 

- 배추 숨 죽었는지 한번 보고 와라.

 

김치를 담글 때 배추에 소금을 뿌려 덮어둡니다. 그래서 배추가 알맞게 절여졌는지 중간중간 확인해야 합니다.

 

어린 빗방울이네는 붉고 커다란 고무 대야의 덮개를 살포시 열어 배추를 봅니다.

 

- 아직 펄펄하다 엄마!

 

어린 빗방울이네는 배추가 자꾸 숨이 들어가는 애연 해서 얼른 덮개를 닫습니다.

 

'토방에선 햇콩두부가 고요히 숨이 들어갔다'

 

이 구절에서 '숨이 들어갔다'라는 표현은 두부 제조과정에서 흐물흐물하던 순두부가 단단하게 엉겨드는 현상을 말한 것입니다.

 

두부가 응고되는 것을 숨이 들어간다고 부르는 일은 참으로 살가운 일이네요.

 

두부를 생명이 없는 사물이 아니라 아직 살아있는 햇콩으로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게 합니다. 

 

그래서 이 구절에서 '햇콩'과 '숨이 들어갔다'가 유난히 눈에 밟히게 되네요.

 

'햇콩'은 '숨이 들어갔다'라고 합니다. 그것도 '고요히'요.

 

'햇콩'의 '숨'은 어디로 들어가는 걸까요?

 

그 생명력은 어디로 이어지는 걸까요?

 

'웅성웅성' 깨어 밤새 김장을 하고 있는 '인간들'의 '숨'으로 이어지겠지요? 

 

그러니 '햇콩두부가 고요히 숨이 들어가는 일'은 얼마나 애연하고 고마운 일인지요?

 

이렇게 '숨'은 이 세상에 커다란 동그라미를 그리며 이어져 있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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