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랑 시인님의 첫 시집 「영랑시집」에 실린 작품번호 1번,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를 만납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반짝이는 강물을 흐르게 하는 시입니다. 함께 읽으며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김영랑 시 '1' 읽기
1
- 김영랑(본명 김윤식, 1903~1950, 전남 강진 출생)
내마음의 어듼듯 한편에 끗업는
강물이 흐르네
도처오르는 아츰날빗이 빤질한
은결을 도도네
가슴엔듯 눈엔듯 또 피ㅅ줄엔듯
마음이 도른도른 숨어잇는곳
내마음의 어듼듯 한편에 끗업는
강물이 흐르네
- 초판본 「永郞詩集」(김윤식 지음, 시문학사 발행, 1935년) 중에서
2. 김영랑 시인님 첫 시집의 첫 시는?
김영랑 시인님의 첫 시집 「永郞詩集」(초판본)을 펼칩니다. 맨 뒷장 판권을 보니 발행인이 '소화 10년'이라고 되어 있네요. 1935년입니다.
이 시집에는 53편의 시가 실렸습니다. 모두 시 제목이 없습니다. 순서대로 번호가 붙어 있습니다. 1번부터 53번까지요.
그중 1번이 바로 오늘 만나는 시입니다.
2번은 우리가 사랑하는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입니다. 김영랑 시인님의 대표 시로 사랑받는 '모란이 피기까지는'은 45번이네요.
오늘 만나는 시 '1'이 이런 쟁쟁한 시들을 뒤로한 채 첫 시가 되었네요.
어떤 시인님에게라도 첫 시집의 첫 시는 각별한 시입니다. 그 시집의 대표선수이니까요. 첫 시에서 그 시인님의 생각, 그 시집의 색깔이 담겨있으니까요.
위에 적은 시 '1'은 1935년 발행된 시집의, 당시 시인님 숨결이 스며있는 표기대로 옮긴 것입니다.
이 시는 1930년 3월 「시문학」 창간호에 첫 시로 실린 시이기도 합니다. 그때 시의 제목이 '동백닙에 빗나는 마음'이었습니다. 5년 후 1935년 시집에 실릴 때 제목 대신 번호가 붙었네요.
왜 그랬을까요? 시의 제목이 감상에 어떤 '가이드라인'을 제시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을까요? 시 제목의 프레임에 갇혀 독자의 상상력이 제한되는 측면도 있겠지요? 1번부터 53번까지 읽어나가면서 독자 나름의 감정의 강물을 타며 시를 음미하도록 하겠다는 시인님의 생각도 들어있었을 것 같습니다.
이 시 '1'은 나중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라는 제목이 붙었습니다. 우리도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로 읽습니다.
3. 마음에 은빛 물결의 강물이 흐르고 있나요?
먼저 시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의 전체 행 배치를 봅니다. 모두 8개의 행인데 2, 4, 8행은 한 칸씩 오른쪽으로 들여쓰기로 되어 있네요.
「영랑시집」의 53편 중 들여쓰기로 된 시는 이 시와 8번 시 등 2편뿐입니다. 그 외는 아무리 긴 행이라도 행 갈이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모란이 피기끼지'의 경우 마지막행('나는 아즉 기둘리고잇슬테요 찰란한슬픔의 봄을')이 가장 긴 행인데, 행을 바꾸지 않고 하나의 행으로 배치했습니다.
이 점에서 이 시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의 행 배치는, 지면이 모자라 한 칸씩 들여쓰기를 한 것이 아니라 시인님의 의중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시문학」에 이 시를 발표했을 당시는 행갈이 없이 이어져 모두 5행이었습니다. 그 후 시인님이 이 시를 자신의 첫 시집에 첫 시로 실으면서 행 배치를 새롭게 한 것입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요?
읽을 때 한 호흡 더 쉬고 읽어달라는 시인님의 당부이겠습니다. 노래할 때 코러스 하듯 들여쓰기된 행을 다른 선율로, 다른 느낌으로 읊어달라는 부탁요. 이 얼마나 섬세한 부탁인지요. 그 바람대로 그렇게 한번 읽어보렵니다.
내마음의 어듼듯 한편에 끗업는
강물이 흐르네
도처오르는 아츰날빗이 빤질한
은결을 도도네
가슴엔듯 눈엔듯 또 피ㅅ줄엔듯
마음이 도른도른 숨어잇는곳
내마음의 어듼듯 한편에 끗업는
강물이 흐르네
위에 소개된 시는 1930년 당시의 표기지만 이해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습니다. 어듼듯 → 어딘듯, 끗없는 → 끝없는, 도처오르는 → 돋아오르는, 아츰날빗 → 아침햇빛, 도른도른 → 도란도란.
과연 이 시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요?
내마음의 어듼듯 한편에 끗업는 / 강물이 흐르네
도처오르는 아츰날빗이 빤질한 / 은결을 도도네
- 김영랑 시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중에서
시의 화자는 우리의 마음 속에 강물이 흐른다고 합니다. 그것도 끝없이 흘러가는 강물입니다. 그래놓고는, 3, 4행에서 돋아오르는 아침 햇빛에 빤질한 은빛 물결을 돋운다고 하네요. 무슨 말일까요?
이 시가 「시문학」을 통해 처음 세상에 나올 때 제목이 '동백닙에 빗나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시인님은 동백잎에 빛나는 햇빛에 영감을 받아 이 시를 썼다는 뜻입니다. 그러고 보니 시 전반부는 동백잎에 빛나는 아침 햇빛을 선명하게 떠올리게 합니다.
진초록 동백잎이 아침햇빛을 받으면 유난히 빤질거리며 반짝입니다. 시의 화자는 그런 동백꽃잎의 반짝임에서 강물의 은빛 물결을 떠올렸네요. 이것이 연상작용을 일으켜 시의 화자의 마음에 흐르는 강물이 반짝이는 양상으로 이어지네요. 그러니 지금 시의 화자의 마음 한 구석이 매우 밝고 경쾌하게 빛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겠습니다.
가슴엔듯 눈엔듯 또 피ㅅ줄엔듯 / 마음이 도른도른 숨어잇는곳
내마음의 어듼듯 한편에 끗업는 / 강물이 흐르네
- 김영랑 시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중에서
마음은 어디에 있을까요? 어딘지는 모르지만 시의 화자의 말처럼, 마음은 나지막한 소리로 정답게 이야기하며 도란도란 숨어있는 것만 같네요. 그 마음의 한쪽에서 강물이 흐른다고 합니다. 그 강물은 은빛 물결로 흐르는 강물입니다. 몸속 어디에 있는지 모르지만 쉴 새 없이 흘러나오고 있는 강물입니다.
이 반짝이는 은빛 물결의 강물은 시의 화자를 기쁨과 설렘으로 눈부시게 하는 내면의 흐름이겠지요. 시인에게 그것은 시심(詩心)이겠습니다.
그대에게도 그대만의 은빛 강물이 끝없이 흐르고 있겠지요?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목욕'에서 김영랑 시인님의 시 '모란이 피기까지는'을 만나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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