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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스미기

김종길 시 성탄제

by 빗방울이네 2024. 1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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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길 시인님의 시 '성탄제(聖誕祭)'를 만납니다. 
 
아버지가 그리워지는 시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곰곰 생각하게 되는 시입니다.
 
함께 읽으며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김종길 시 '성탄제(聖誕祭)' 읽기

 
성탄제(聖誕祭)
 
김종길(1926~2017, 경북 안동)
 
어두운 방 안엔
빠알간 숯불이 피고,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
애처로이 잦아드는 어린 목숨을 지키고 계시었다.
 
이윽고 눈 속을
아버지가 약(藥)을 가지고 돌아오시었다.
 
아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 오신
그 붉은 산수유(山茱萸) 열매 -
 
나는 한 마리 어린 짐생,
젊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에
열(熱)로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는 것이었다.
 
이따금 뒷문을 눈이 치고 있었다.
그날밤이 어쩌면 성탄제(聖誕祭)의 밤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느새 나도
그때의 아버지만큼 나이를 먹었다.
 
옛것이라곤 찾아볼 길 없는
성탄제(聖誕祭) 가까운 도시(都市)에는
이제 반가운 그 옛날의 것이 내리는데,
 
서러운 서른 살 나의 이마에
불현듯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을 느끼는 것은,
 
눈 속에 따 오신 산수유(山茱萸) 붉은 알알이
아직도 내 혈관(血管) 속에 녹아흐르는 까닭일까.
 
▷김종길 시집 「황사현상(黃沙現象)」(민음사, 1986년) 중에서.
 

2. 아버지 서느런 옷자락에 뜨거운 볼을 부비고 싶습니다

 
시의 제목인 '성탄제(聖誕祭)'는 12월 24일부터 1월 6일까지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명절을 말합니다.
 
성탄제의 키워드는 사랑이네요.
 
김종길 시인님의 시 '성탄제'의 사랑은 어떤 사랑일까요?
 
'어두운 방 안엔 / 빠알간 숯불이 피고'
 
방안에는 불도 켜지 않았네요.
 
그렇게 '어두운 방'에 피워놓은 '빠알간 숯불'이 눈에 보이는 것만 같고요,
 
어둠 속에 빛나는 '빠알간 숯불'은 어떤 위험을 알리는 비상등인 것만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 도입부부터 긴장하게 되네요.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 / 애처로이 잦아드는 어린 목숨을 지키고 계시었다'
 
'어린 목숨'이 '애처로이 잦아드는' 위급상황이네요.
 
'어린 목숨'이라는 구절에서 위급함과 안타까움이 더해집니다.
 
아이가 홍역이라도 앓았을까요?
 
병원도 없고 약국도 없는 시골인가 봅니다.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에서 우리는 할아버지 없이 외로이 살아온 할머니의 기구한 삶을 떠올리게 되네요.
 
'어린 목숨'의 어머니도 이 시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삶의 고단함과 외로움도 느껴지고요.
 
'이윽고 눈 속을 / 아버지가 약(藥)을 가지고 돌아오시었다'
 
아버지는 아픈 자식을 위해 약을 가지러 갔었군요.
 
'이윽고'라는 단어 속에 약을 가지러 간 아버지를 기다리던 화자와 할머니의 긴 기다림이 들어있네요.
 
'눈 속을 아버지가'. 이 구절은 참으로 많은 이야기를 함축하고 있네요.
 
목숨이 위태로워진 어린 자식을 건지기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라도 할 수 있는 아버지입니다.
 
발이 푹푹 빠지는 '눈 속을' 거침없이 달릴 수도 있는 아버지입니다.
 
손발 꽁꽁 얼리는 시린 바람도 아랑곳하지 않는 아버지입니다.
 
'약(藥)을 가지고 돌아오시었다'에서 시 속의 화자와 할머니, 그리고 우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게 되네요.
 
'아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 오신 / 그 붉은 산수유(山茱萸) 열매 -'
 
이 4연은 얼마나 아름다운 장면인지!
 
눈 속에서 산 속에서 아버지는 얼마나 약을 찾아 헤맸을까요?
 
'어린 목숨'을 위한 약을 찾아 헤매던 아버지의 눈빛은 얼마나 형형하였을까요?
 
그 절박한 눈빛으로 눈발 치는 그 컴컴한 겨울의 산 속에서 찾아낸 약이 붉은 산수유 열매였네요.
 
아, 드디어 찾았다!
 
어둠 속의 아버지의 안도의 혼잣말이 들리는 것만 같네요.
 
그래서 '붉은 산수유 열매-'라는 구절에서 우리 마음도 붉게 뜨겁게 물드는 것만 같습니다. 
 
'나는 한 마리 어린 짐생 / 젊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에 / 열(熱)로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는 것이었다'
 
이 5연은 또 얼마나 더 아름다운지요!
 
눈 오는 한 데서 헤매다 방으로 들어온 아버지의 옷자락은 '서느런 옷자락'입니다.
 
'서느런'에서 한기가 훅 끼쳐오네요.
 
그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에 아이가 '열로 상기한 볼'을 부비는 이 장면, 이 시의 백미로 꼽고 싶습니다.
 
그 기분 좋은 차가움이 느껴지는 것만 같습니다.
 
우리도 아이가 되어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에 '상기한 볼'을 마구 부비고만 싶습니다.
 
아무것도 저어함 없이 부끄러워함 없이 그저 '한 마리 어린 짐생'의 몸짓으로요.
 
세상의 온갖 어둠을 다 헤쳐온 아버지의 거친 숨결도 느껴집니다.
 
언제나 마음을 안정시켜 주는 아버지의 냄새도 나네요.
 
이 '서느런 옷자락'도 아이에게 얼마나 효험 좋은 약이었겠는지요?
 

"나는 한 마리 어린 짐생 젊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에 열로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는 것이었다" - 김종길 시 '성탄제' 중에서.

 

3. 내 몸속 알알이 붉게 흐르는 아버지 사랑

 
'이따금 뒷문을 눈이 치고 있었다 / 그날밤이 어쩌면 성탄제(聖誕祭)의 밤이었을지도 모른다'
 
이 6연부터는 현재로 돌아왔네요.
 
'이따금 뒷문을 눈이 치고 있었다'라는 구절에서 우리는 화자가 '그날밤'을 얼마나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어린 목숨'이던 화자는 이제 아버지의 나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어린 시절, 화자의 아버지가 붉은 산수유 열매를 따오던 '그날밤'을 마치 어젯밤의 일처럼 기억하고 있었네요.
 
'빠알간 숯불'과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와 '붉은 산수유 열매'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
 
이런 장면들은 얼마나 강렬한 것인지, 화자의 몸속에 마음속에 깊이깊이 각인되어 버렸나 봅니다.
 
그 장면들을 하나로 꿰어 엮고 있는 것은 뜨거움, 바로 뜨거운 사랑이겠지요?
 
'그날밤이 어쩌면 성탄제의 밤이었을지도 모른다'에서 '그날밤'의 사랑이 어떤 사랑인지 느껴지는 것만 같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아무런 조건 없는 사랑, 목숨과도 바꾸는 사랑, 저가 없어도 된다는 성스러운 사랑이겠습니다.
 
'어느새 나도 / 그때의 아버지만큼 나이를 먹었다'
 
'어린 목숨'이 이제는 그때의 아버지만 한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아버지처럼은 살지 않겠다는 세상의 아들들입니다.
 
그러다가 언제가 불쑥 거울 속에서 아버지를 발견하는 세상의 아들들입니다.
 
그즈음부터는 '눈을 헤치고' 붉은 산수유 열매를 따오는 '서느런 옷자락'의 아버지가 되는 것일까요?
 
'옛것이라곤 찾아볼 길 없는 / 성탄제(聖誕祭) 가까운 도시(都市)에는 / 이제 반가운 그 옛날의 것이 내리는데'
 
'옛것이라곤 찾아볼 길 없는'. 30여 년이 흐른 지금, 모든 것이 다 변했습니다.
 
그런데 '반가운 그 옛날의 것'이 내리네요.
 
눈 말입니다.
 
꺼져가던 '어린 목숨'을 살리기 위해, 아버지가 붉은 산수유 열매를 찾아내기 위해 헤쳐야 했던 그 눈 말입니다. 
 
세상 다 변해도 그 눈만은 변하지 않았다고 하네요.
 
그 하얀 눈처럼, 세상 다 변해도 그 아버지 사랑만은 변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도 같고요.
 
아득한 밤하늘에서 내려온 눈처럼 우리를 아늑하게 덮어주는 아버지의 사랑이네요.
 
'서러운 서른 살 나의 이마에 / 불현듯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을 느끼는 것은'
 
세상 서러운 일들을 아버지에게 다 일러바치고 싶은 '서른 살'입니다.
 
그런 서러운 '나의 이마'에 눈이 닿으면서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이 불현듯 떠올랐네요.
 
그때처럼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에 볼을 부빌 수 있다면요.
 
세상에 차이고 뒹굴다 '상기한 볼'을 비빌 수 있다면요.
 
'눈 속에 따 오신 산수유(山茱萸) 붉은 알알이 / 아직도 내 혈관(血管) 속에 녹아흐르는 까닭일까'
 
'산수유 붉은 알알이'와 '내 혈관'이 연결되면서 순식간에 과거와 현재가 연결되는 것만 같습니다.
 
'산수유 붉은 알알이'는 아버지의 사랑이겠지요?
 
그러니 아버지의 사랑은 내 몸 구석구석을 데우며 흐르고, 내 자식 또 그 자식의 자식에게로 이어지겠지요?
 
영원히 말입니다.
 
시집을 덮으며, 내 혈관 속에 녹아흐르고 있는 아버지의 뜨거운 사랑을 느껴봅니다.
 
아버지에게 전화해야겠습니다.
 
이제는 저 하늘 오솔길을 걷고 계실 아버지에게 편지해야겠습니다.
 
그 '서느런 옷자락'에 볼을 부비고 싶은 성탄제입니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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