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길 시인님이 시 '성탄제(聖誕祭) 1955'를 만납니다.
성탄의 의미, 자비와 사랑의 의미를 새겨보게 되는 시입니다.
함께 읽으며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김종길 시 '성탄제(聖誕祭) 1955' 읽기
성탄제(聖誕祭) 1955
김종길(1926~2017, 경북 안동)
가슴에 눈물이 말랐듯이
눈도 오지 않는 하늘
저무는 거리에 발걸음을 멈추고
동(東)녘 하늘에 그 별을 찾아본다.
베드레햄은 먼 고장
이미 숱한 이날이 거듭했건만
이제 나직이 귓가에 들리는 것은
지친 낙타(駱駝)의 울음소린가?
황금(黃金)과 유향(乳香)과 몰약(沒藥)이
빈 손가방 속에 들었을 리 없어도
어디메 또다시 그런 탄생(誕生)이 있어
추운 먼 길이라도 떠나고 싶은 마음 -
나의 마리아는
때 묻은 무명옷을 걸치고 있어도 좋다.
호롱불 켠 편자집이나 대합실(待合室) 같은 데라도
짚을 깐 오양깐보다는 문명(文明)되지 않는가?
- 허나 이런 생각은 부질없는 것,
오늘 하룻밤만의 감상(感傷)을 위해서라도
차라리 잠 오듯 흰 눈이라도 내리렴,
함박꽃처럼 선의(善意)의 흰 눈이라도 내리렴!
▷김종길 시집 「황사현상(黃沙現象)」(1986년, 민음사) 중에서.
2. 2024번의 성탄, 삶은 좀 나아졌을까요?
김종길 시인님은 한국전쟁 때 피난했던 대구에 경북대와 청구대학의 교수로 머물렀던 적이 있습니다.
그 대구 생활 때 매년 성탄절마다 '성탄제'라는 시를 신문에 발표했다고 합니다.
모두 4편이었는데, 오늘은 1955년 발표된 시 '성탄제'를 만나봅니다.
가슴에 눈물이 말랐듯이 / 눈도 오지 않는 하늘
저무는 거리에 발걸음을 멈추고 / 동(東)녘 하늘에 그 별을 찾아본다.
'가슴에 눈물이 말랐듯이'라는 구절에서 삭막하고 쓸쓸한 현실이 느껴집니다.
'눈도 오지 않는 하늘'. 성탄절 축복의 상징인 흰 눈이 내리지 않는다고 하고요.
그만큼 이 땅에 사랑과 자비가 메말라가고 있다는 느낌이 드네요.
그래서 화자는 '그 별을 찾아본다'라고 합니다.
구세주의 탄생을 알리는 'wondering star'입니다. 어떤 별보다 밝게 빛나는 별입니다.
동방박사들도 그 별을 따라 베들레헴까지 가서 아기 예수를 만났습니다.
시대의 아픈 상처를 보듬어주고 사람들에게 사랑을 전해줄 '그 별'을 찾아보는 화자의 심정이 느껴지네요.
베드레햄은 먼 고장 / 이미 숱한 이날이 거듭했건만
이제 나직이 귓가에 들리는 것은 / 지친 낙타(駱駝)의 울음소린가?
이 시가 1955년 쓰였으니 그때는 성탄절이 1955번이나 거듭됐네요.
그때마다 우리는 이 삭막한 땅에 사랑과 자비를 희구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지구촌 곳곳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고 굶주림과 질병, 환경오염과 기후변화로 인류는 고통 속에서 신음하고 있습니다.
동방박사를 태운 '지친 낙타의 울음소리'가 들린다고 하네요.
멀고 메마른 사막을 건너 참된 구원을 찾아가던 동방박사들이었습니다.
'귓가에 들리는 것은 지친 낙타의 울음소리'.
그 성탄의 정신, 자비와 사랑의 정신을 오늘의 우리에게 전해주기 위해 오는 길은 더 멀고 험난한 길인가 봅니다.
황금(黃金)과 유향(乳香)과 몰약(沒藥)이 / 빈 손가방 속에 들었을 리 없어도
어디메 또다시 그런 탄생(誕生)이 있어 / 추운 먼 길이라도 떠나고 싶은 마음 -
'황금과 유향과 몰약'은 아기 예수에게 바친 동방박사들의 가장 소중한 보물이었습니다.
화자는 '빈 손가방'이라고 하네요.
그렇지만 '그런 탄생'이 있다면 화자는 '추운 먼 길이라도' 구세주를 찾아 나서도 싶다고 합니다.
현실 삶의 팍팍함과 구원을 향한 화자의 간절함이 느껴집니다.
성탄을 2024번 맞은 오늘의 우리 심정은 어떠한지요?
3. 문명 속에서 훼손되지 않고 지켜져야 할 사랑의 순수성
나의 마리아는 / 때 묻은 무명옷을 걸치고 있어도 좋다.
호롱불 켠 편자집이나 대합실(待合室) 같은 데라도 / 짚을 깐 오양깐보다는 문명(文明)되지 않는가?
'문명(文明)'이라는 단어의 뜻을 새겨봅니다.
인류가 이룩한 물질적, 기술적, 사회 구조적인 발전을 말합니다.
그러나 문명화와 삶의 본질적인 행복과는 비례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물질문명의 발달은 그 혜택이 물질을 가진 소수에게 편중됩니다.
그래서 문명화될수록 더 많은 사람들은 행복으로부터 단절되고 소외되어 고독한 삶을 살게 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간구하는 자비와 사랑과는 점점 멀어지게 되었을까요?
자비와 사랑의 원천은 예수님을 낳은 마리아였습니다.
마리아는 갓난아기예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은 네게 큰 시련을 줄 거야.
네 심장을 뚫을 거야.
하지만 결국 사랑이 세상을 구할 거야.
- 영화 '마리아'(D.J. 카루소 감독) 대사 중에서
이처럼 위대한 힘을 가진 사랑의 근원은 '때 묻은 무명옷'을 걸친 마리아였습니다.
우리는 지금 정보화사회를 지나 인공지능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문명이 발달하여도, 아니 문명이 발달하면 할수록 그 순수성이 훼손되지 않고 지켜져야 할 것은 사랑일 것입니다.
- 허나 이런 생각은 부질없는 것,/ 오늘 하룻밤만의 감상(感傷)을 위해서라도
차라리 잠 오듯 흰 눈이라도 내리렴,/ 함박꽃처럼 선의(善意)의 흰 눈이라도 내리렴!
'허나 이런 생각은 부질없는 것'이라는 구절에서 성탄의 정신을 잃어가고 있는 현실의 냉혹함이 느껴집니다.
'감상(感傷)'은 쓸쓸하고 슬퍼져서 아픈 마음을 말합니다.
'부질없는 것'이라 하더라고 화자는 성탄의 밤인 '오늘 하룻밤만'은 쓸쓸하고 슬픈 마음이고자 합니다.
그런 마음으로 화자는 삶의 의미를 돌아보고자 합니다.
화자의 그 쓸쓸한 마음에 흰 눈이 내려 쓸쓸함을 덮어주기를.
성탄을 맞은 마음마다 '선의(善意)의 흰 눈'이 내려 어리석은 마음들을 차갑게 희게 일깨워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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