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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스미기

김영랑 시 오매 단풍들것네

by 빗방울이네 2024. 10.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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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랑 시인님의 시 '오매 단풍들것네'를 만납니다. 마음속에 단풍처럼 붉은 기운이 훅 퍼지는 시입니다. 함께 읽으며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김영랑 시 '오매 단풍들것네' 읽기

 
오매 단풍들것네

김영랑(본명 김윤식, 1903~1950, 전남 강진)

「오-매 단풍들것네」 
장광에 골불은 감닙 날러오아
누이는 놀란듯이 치어다보며
「오-매 단풍들것네」 

추석이 내일모레 기둘니리
바람이 자지어서 걱졍이리
누이의 마음아 나를보아라
「오-매 단풍들것네」 

▷「영랑시집(永郞詩集)」(김윤식 지음, 1935년 시문학사 발행. 문학사상사에서 이 시집 영인본을 '한국 현대시 원본 전집'의 하나로 발간) 


2. 누이가 말한 '오메 단풍들것네'의 뜻은?


시 '오매 단풍들것네'는 '모란이 피기까지는'의 시인 김영랑 시인님의 또 다른 대표 시입니다.

'오매 단풍들것네'는 1930년 「시문학」 창간호에 처음 발표된 시입니다. 시인님 20대 후반 즈음의 시네요.

그 후 이 시는 1935년 시문학사에서 발간된 시인님의 시집 「영랑시집(永郞詩集)」에 실렸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영랑시집」에 실린 시 원문 그대로를 만납니다.

위에 소개된 시 본문은 이 시집에서 띄어쓰기와 철자를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영랑시집」은 53편의 시가 실렸는데, 모두 제목이 없고 시마다 일련번호가 붙어있습니다.

'오매 단풍들것네'는 5번입니다. 현재 이 시는 '오매 단풍들것네'라는 제목으로 애송되고 있습니다.

어떤 시일까요? 야금야금 조금씩 파 들어가 보십시다.

「오-매 단풍들것네」 / 장광에 골불은 감닙 날러오아
누이는 놀란듯이 치어다보며 / 「오-매 단풍들것네」 

이 시의 제1 연입니다.

가장 유명한 첫 행 '「오-매 단풍들것네」'라는 구절은 이 시에서 모두 3번 등장하는데 그때마다 시인님이 홑낫표(「」)를 딱 붙여두었습니다.

여기서의 홑낫표는 말의 직접 인용을 나타내는 용도로 쓰였는데 요즘의 큰따옴표("") 역할을 하네요. 큰따옴표로 옮겨봅니다.

"오-매 단풍들것네" 

말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네요.

'오매'는 뜻밖의 일에 깜짝 놀라는 말로 전라도 방언입니다. '어머'라는 표준어로는 느낄 수 없는 진득한 맛이 나는 방언이네요.

시인님은 거기다가 '오-매'라고 가운데에 하이픈(-)까지 넣어두었네요. 놀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길게 늘여 읽어달라는 시인님의 다정한 눈짓입니다.

'들것네'도 '들겠네'의 전라도 방언이네요. 그러니까 '단풍들것네'는 아직 단풍이 든 게 아니라 '조만간 단풍이 들겠구나'라는 뜻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앞에 '오-매'라는 감탄사까지 넣어서 "어머머머, 조만간 단풍이 들겠는걸"이라는 뉘앙스를 줍니다.

이 말은 어떤 상황에서 누가 한 말일까요?

'장광에 골불은 감닙 날러오아‘

2행입니다. '장광'은 '장독대'의 전라도 방언입니다. 간장 된장을 뜻하는 '醬(장)'에 곳간을 뜻하는 우리말 '광'이 붙은 말이네요.

'골불은'은 '짓붉은' '골 붉은' '고루 붉은' '살짝 붉은' 등 여러 가지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과연 ’골불은‘은 어떤 뜻일까요?

이 시는 정겹고 따뜻한 전라도 방언의 맛이 잘 녹아있는 시라는 점에 주목합니다.

'골다'는 '곯다'의 전라도 방언입니다. '불다'는 '버리다'의 전라도 방언입니다.

그래서 '독서목욕'에서는 이 '골불은'을 '곯아버린'으로 새겨봅니다.

'곯다'는 '은근히 해를 입어 골병이 들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감닙'은 '감잎', '감 이파리'입니다. 이파리가 곯아버렸다는 것은 시들어버렸다는 의미겠네요.

'날아와'의 뜻일 텐데, 시인님이 그보다 길게 늘어뜨린 '날러오아'는 감잎 하나가 곡선을 그리며 천천히 땅에 내리는 모습이 눈에 보이는 것만 같은 시어이네요.

'장광에 골불은 감닙 날러오아'를 표준어로 풀어쓰면 '장독대에 곯아버린, 또는 시들어버린 감잎 하나 날아와'의 의미이겠습니다.
 
이파리는 왜 곯아버렸을까요? 왜 시들어버렸을까요?

이 시의 계절은 시에 나온 정보로 보아 추석 전이니 늦여름에서 가을로 접어드는 시간입니다. 

이 때는 서늘하고 건조한 서풍(하늬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는 시간입니다. 습기 많은 여름의 동남풍에 익숙해 있던 감나무가 점점 차가워지는 메마른 서풍에 까칠까칠 움츠러들기 시작하는 시간입니다.

그중 약한 감잎 하나가 찬바람에 '골불어', 즉 시들어버려 감나무에서 휘익 떨어졌네요. '골불은 감입'이란 시어에서 누르스름하게 말라가는 감잎이 보이는 것 같고요.

'누이는 놀란듯이 치어다보며 / 「오-매 단풍들것네」'.

그러니까 장독대에 갔던 누이(여동생)가 때마침 장독대에 떨어진 그 누르스름한 감잎을 쳐다보며 한 말이 '오-매 단풍들것네'였네요. ’놀란듯이 치어다보며‘요.
 
떨어진 나뭇잎 하나에 누이는 왜 이렇게 놀랐을까요?

가을에 나뭇잎 떨어지는 일은 다반사(茶飯事)지만, 가을이 아닌데도 포르르 떨어지는 나뭇잎은 매우 특별한 느낌을 줍니다.
 
여름 내내 나뭇가지에 씩씩하게 붙어있던 진녹색 잎이었는데, 이것이 툭 떨어지는 일은 하나의 커다란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나무에게 또 우리에게요.
 
그래서 그 첫 낙엽은 우리 고요한 마음의 호수에 떨어져 파문을 일으킵니다.
 
그 첫 낙엽은 이제 찬바람이 들고 있고, 그래서 나무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는 신호, 가을이 오고 있다는 신호입니다.

바삐 사느라 계절이 바뀌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는 우리입니다. 누이도 그랬겠지요?
 
그런 누이의 눈에 들어온 올해 첫 낙엽 하나. 그것이 누이의 마음 호수에 떨어져 파문이 일면서 감탄사가 자동 발사됩니다. 반사적으로 이렇게요.

"오-매 단풍들것네"

그러니 이 구절에는 많은 그림이 들었겠네요.

그대는 이런 때 어떤 생각을 하겠는지요? 가을의 알람 같은, 가을의 전초병 같은 첫 낙엽을 만난다면요. 혹시 이런 생각일까요?

아, 벌써 가을이 오네. 지난여름은 정말 더웠는데. 선선한 가을이 오면 이제 숨 좀 쉬겠네. 가을에는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그 좋은 사람과 단풍구경 갈 수 있을까?

시인님이 20대 후반에 쓴 시이니 20대 초중반의 누이는 가을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이 얼마나 많겠는지요?

'오-매 단풍들것네' 하고 탄성을 내뱉은 누이도 그런 낭만적인 기분에 빠져 마음이 불그레해졌겠지요?
 
얼마나 마음 불그레해졌으면 '오-매 단풍들것네' 했겠는지요?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오매 단풍들것네" - 김영랑 시 '오매 단풍들것네' 중에서.

 

 

3. 오빠가 말한 '오매 단풍들것네'의 뜻은?

 
시 '오매 단풍들것네'의 제2연을 만나봅니다.

추석이 내일모레 기둘니리 / 바람이 자지어서 걱졍이리
누이의 마음아 나를보아라 / 「오-매 단풍들것네」 

2연의 1, 2행입니다.

‘추석이 내일모레 기둘니리 / 바람이 자지어서 걱졍이리’

‘기둘리다’는 ‘기다리다’의 전라도 방언, ‘자지이다’는 ‘잦다’의 전라도 방언이네요.

이 두 구절은 모두 ‘~리’로 끝납니다. ‘~하리’의 뜻일 텐데요, ‘~하겠느냐’의 뉘앙스가 풍깁니다.

그래서 이 두 구절은 ‘추석이 내일모레인데 기다리겠느냐 / 바람이 잦아서 걱정이겠느냐‘의 뜻으로 다가오네요.
 
내일모레 지나면 자동적으로 오게 될 추석을 기다릴 필요도, 어찌할 수 없이 잦아지는 바람을 걱정할 필요도 없다는 뜻이겠습니다.
 
그러면 그 대신 무얼 하는 게 좋겠다는 권유의 말이 뒤따라 나올 것 같습니다.

화자는 누이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2연의 3, 4행입니다.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 오-매 단풍들것네‘

그러니까 이 맨 마지막의 ’오-매 단풍들것네‘는 시의 화자, 즉 누이의 오빠가 한 말입니다.

오빠는 앞에서 한 여동생의 말을 받아 그대로 따라 하고 있네요.

이런 상황은 우리에게 아주 익숙하네요. 누가 한 말을 그대로 따라 하면서 짓궂게 놀리는 상황요.

그래서 맨 마지막의 ’오-매 단풍들것네‘는 이런 느낌이 드네요.

’가을이 오는 걸 보니, 오-매 우리 여동생 마음에도 불그레한 단풍물 들겠네‘ 이런 느낌요. 그 뒤에 ’얼레리꼴레리~‘라는 감탄사도 붙었을 것 같네요.

추석이 가까워졌으니 누이는 명절 음식 준비도 해야겠지요? 그런데 차가운 가을바람이 자주 불어서 과일이나 곡식이 떨어질까 그것도 걱정이겠지요?

’오-매 단풍들것네‘

오빠는 단풍 이불 같은 이 한 마디로, 누이의 이리저리 끄달리는 마음을 덮어 붉게 물들여 주는 것만 같네요. 명절 기다리고, 또 바람 잦아 걱정이기도 한 복잡한 누이의 심사를 말입니다.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 오-매 단풍들것네‘

'누이의 마음아'라는 구절에서 우리는 '누이'와 '누이의 마음'이 따로 있는 걸 느낍니다.
 
'누이'는 일상 속의 질감이고 '누이의 마음'은 일상을 벗어난 영역의 질감으로 다가오네요. 
 
그래서 이 두 구절에는 이런 문장들이 들어있는 것 같습니다.
 
누이야, 마음속의 그런 일상일랑은 잠시 접어두고, 일상에 찌들지 않은 맑은 서정의 마음으로 나를 보아라, 오-매 단풍들것네, 우리 누이 올가을 연애하겠네, 우리 누이 올가을 단풍들것네, 경사가 날 지도?

누이는 오빠의 그 말에 눈을 흘겼겠지요? 피이-.
 
참으로 다정한 오누이의 불그레한 교감이네요.

이 시 속에는 불그레한 가을이 오고 있네요.

그래서 만나는 사람마다 이렇게 놀리고 싶은 시간이네요.

“오~~~매 단풍들것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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