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병 시인님의 시 '나의 가난은'을 만납니다. 가난과 욕망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시입니다. 시인님이 건네주시는 햇빛 같은 무욕의 시어들을 마음에 쏟아부어 마음의 얼룩을 씻으며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천상병 시 '나의 가난은' 읽기
나의 가난은
- 천상병(1930~1993, 일본 출생, 창원 성장)
오늘 아침을 다소 행복하다고 생각는 것은
한 잔 커피와 갑 속의 두둑한 담배,
해장을 하고도 버스 값이 남았다는 것.
오늘 아침을 다소 서럽다고 생각는 것은
잔돈 몇 푼에 조금도 부족이 없어도
내일 아침 일도 걱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가난은 내 직업이지만
비쳐 오는 이 햇빛에 떳떳할 수가 있는 것은
이 햇빛에도 예금통장은 없을 테니까 ···
나의 과거와 미래
사랑하는 내 아들딸들아,
내 무덤가 무성한 풀섶으로 때론 와서
괴로왔음 그런대로 산 인생. 여기 잠들다. 라고,
씽씽 바람 불어라 ···
- 「천상병 시선」(천상병 지음, 박승희 엮음, 지식을만드는지식, 2012년) 중에서
2. '이 햇빛에도 예금통장은 없을 테니까'
천상병 시인님의 시 '나의 가난은'은 1970년 7월 「시인」을 통해 세상에 발표됐습니다. 시인님 41세 때네요.
오늘 아침을 다소 행복하다고 생각는 것은 / 한 잔 커피와 갑 속의 두둑한 담배, / 해장을 하고도 버스 값이 남았다는 것
- 천상병 시 '나의 가난은' 중에서
내가 부유하다는 것은 어떤 상태일까요?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이 별로 없는 상태가 아닐까요?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이 별로 없는 상태는 욕망하는 것이 많지 않은 상태일 것입니다. 결국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은 욕망의 크기를 줄이는 것인가 봅니다.
시인님은 오늘 아침에 커피도 한 잔 마셨습니다. 담뱃갑 속에는 담배가 아직 두둑하게 남았습니다(담배가 15개비 이상 남았을 때의 이 만족감은 애연가 또는 애연가 출신이 아니면 절대 모르리!). 속풀이로 아침에 막걸리도 한 병 마셨네요. 그러고도 버스 차비(집으로 갈? 또 친구에게 돈 꾸러 갈?)가 남았다고 합니다.
커피와 담배와 막걸리와 버스 차비만 있으면 '다소 행복'하다는 시인님입니다. 시인님은 그 이상 다른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새로 나온 스마트폰 소식에 자꾸 들뜨던 빗방울이네 마음이 이 구절에서 스르르 주저앉아 버리네요.
오늘 아침을 다소 서럽다고 생각는 것은 / 잔돈 몇 푼에 조금도 부족이 없어도 / 내일 아침 일도 걱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 천상병 시 '나의 가난은' 중에서
시인님은 '나는 가난하지만 불행하지 않다'고는 말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가난이 마냥 만족한 일은 아니라고 합니다. 잔돈 몇 푼에도 행복한 오늘이지만 내일 아침 일은 모르니까요.
그래서 내일 아침 일이 은근히 걱정되어 '다소 서럽다'라고 합니다. 오늘 이 순간은 만족스럽지만 내일을 걱정해야 하는 시인님의 불안한 마음이 훤히 보이는 것만 같습니다. 얼마나 투명한 마음인지!
그런데요, 전후 문맥으로 보아 시인님에게 내일 아침에 필요한 것은 '잔돈 몇 푼'입니다. '그것 때문에 걱정'이라는 고백 앞에서 우리 마음 스르르 주저앉아 버리네요.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을 욕망하는지 돌아보게 되네요.
가난은 내 직업이지만 / 비쳐 오는 이 햇빛에 떳떳할 수가 있는 것은 / 이 햇빛에도 예금통장은 없을 테니까 ···
- 천상병 시 '나의 가난은' 중에서
'가난은 내 직업'이라고 합니다. 가난은 주어진 것이겠지만 시인님은 이를 자신이 '선택'한 일로 생각합니다. 직업처럼요. 가난과의 동행이네요. 시인님에게 가난을 넘어설 수 있는 방법은 가난을 긍정하고 함께 가는 일이었네요.
가난을 긍정하고 물질적 욕망에서 자유로워지면 이런 사유가 나오는 걸까요?
이 햇빛에도 예금통장은 없을 테니까 ···
- 천상병 시 '나의 가난은' 중에서
햇빛 예금통장!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이 구절이 우리 정신의 어두운 계곡을 환하게 비추어 주는 것만 같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는 햇빛입니다. 시인님에 따르면, 그러나 하늘은 그 소중한 햇빛을 만인 만물에게 골고루 비추어줄 뿐 소중하다고 쌓여두지 않는군요. '햇빛 예금통장'의 발명으로 시인님은 자신의 가난을 한순간에 무화(無化)시켜버렸네요.
이 같은 동화적인 상상력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오늘날 우리는 '햇빛에 떳떳'하지 못한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일까요? 불빛을 쫓아가는 불나방처럼 욕망을 쫓아가는 삶의 한가운데에 있기 때문일까요? 문득 '월든'의 문장이 떠오르네요.
여러분은 병들 때에 대비하여 무언가를 저축해 두기 위해,
낡은 궤짝이나 벽장 뒤의 양말 속에, 또는 벽돌로 지은 은행에
- 장소가 어디든, 액수에 상관없이 -
무언가를 챙겨두려다가 오히려 몸을 병들게 하고 있다
- 「월든」(헨리 데이비드 소로 지음, 김석희 옮김, 열림원, 2017년 1쇄, 2012년 9쇄) 중에서
시인님의 시를 읽고 '월든'의 문장도 읽으니 왠지 자유로운 느낌이 듭니다. 아니 지금보다 더 자유로워져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하여 지금의 삶이 너무 쌓아두려 하는 삶은 아닌지, 그로 인해 스스로 결박당하여 옴짝달싹하지도 못하고 있는 건 아닌지, 너무 무거워진 삶은 아닌지 돌아보게 되네요.
3. '씽씽 바람 불어라'
나의 과거와 미래 / 사랑하는 내 아들딸들아 / 내 무덤가 무성한 풀섶으로 때론 와서
괴로왔음 그런대로 산 인생. 여기 잠들다. 라고, / 씽씽 바람 불어라 ···
- 천상병 시 '나의 가난은' 중에서
이 시의 마지막 4연에 도달했습니다. '나의 과거와 미래 사랑하는 내 아들딸들아'라고 호명하네요. 이 시를 쓴 때는 1970년 시인님 41세 때입니다. 시인님은 아직 결혼(1972년 목순옥 님과 결혼)하기 2년 전의 노총각이네요. 나중에 결혼해서 아들딸 낳고 알콩달콩 살고 싶었겠지요? 그 자신의 '과거와 미래'인 아이들에게 자신의 삶에 대해 말하네요.
괴로왔음 그런대로 산 인생. 여기 잠들다. 라고,
- 천상병 시 '나의 가난은' 중에서
이 구절은 '괴로왔음'이 마침표나 쉼표 없이 '그런대로'에 이어져 있습니다. 이 시는 「천상병 시선」(지식을만드는지식) 8쪽과 「천상병 전집·시」(평민사) 88쪽에 각각 실려있는데요, 그 표기 그대로 옮긴 것이 위의 구절입니다.
시인님 연보(「천상병 전집·시」, 평민사, 1996년 1쇄, 2007년 12쇄)에 따르면, 시인님은 1967년 동백림 사건에 억울하게 연루되어 약 6개월 간 옥고를 치렀습니다. 그때 받은 고문의 후유증과 심한 음주로 인한 영양실조로 시인님은 1971년 거리에서 쓰러졌습니다. 그리고 보호자 없는 행려병자로 취급되어 서울시립정신병원에 입원됩니다.
거리에 쓰러지기 1년 전에 쓰인 시가 바로 '나의 가난은'입니다. 병마와 가난 속에서 어려운 생활이 계속되던 때였네요. 얼마나 괴로운 나날이었을까요?
괴로왔음 그런대로 산 인생. 여기 잠들다. 라고,
- 천상병 시 '나의 가난은' 중에서
이 4연 4행의 비문(非文)은 내면의 울음을 참고 있는 시인님의 거친 숨소리인 것만 같습니다. 시인님은 고단한 삶을 견디면서 자신의 과거이자 미래인 아이들에게 자신의 삶을 비문(碑文)처럼 집약해 알려주고 싶었던 걸까요?
'괴로왔음'이라고 자신의 삶을 솔직하게, 그러나 너무 거칠게 요약한 시인님은 '그런대로 산 인생'이라고 스스로 위로하듯 덧붙였던 걸까요. 더듬거리면서요. 그렇게 시인님과 함께 더듬거리면서 시에 빠져들다 보니 이 구절에서 시인님의 맑고 청순한 성정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것만 같습니다. 그리고 시인님은 느닷없이 말합니다.
씽씽 바람 불어라 ···
- 천상병 시 '나의 가난은' 중에서
이 마지막 구절은 슬픔에 빠져있던 우리를 건져내어 자유롭게 풀어줍니다. 씽씽 부는 바람이 시인님의 불행했던 생애의 어두움과 외로움, 아픔과 슬픔을 모두 날려주는 것만 같습니다. 시의 마지막에 이르러 특유의 천진난만이 발동한 시인님은 이 구절에서 맑은 샘물 같은 영혼의 눈으로 '가난'마저 씻어 저 아득한 하늘로 날려버리네요. 씽씽!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목욕'에서 천상병 시인님의 시 '소릉조'를 만나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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