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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스미기

유치환 시 생명의 서 읽기

by 빗방울이네 2023. 10.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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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환 시인님의 시 '생명의 서 일장'을 만납니다. 참다운 '나'를 찾아 나선 시인님의 결연한 의지, 그 뜨거운 기운으로 저마다 마음을 씻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유치환 시 '생명의 서 일장' 읽기

 
생명의 서 일장(一章)
 
- 유치환(1908~1967, 경남 통영)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를 구하지 못하고
내 또한 삶의 애증을 다 짐 지지 못하여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낄 때
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으로 나는 가자
 
거기는 한번 뜬 백일(白日)이 불사신같이 작열하고
일체가 모래 속에 사멸한 영겁의 허적(虛寂)에
오직 아라-의 신만이
밤마다 고민하고 방황하는 열사(熱沙)의 끝
 
그 열렬한 고독 가운데
옷자락을 나부끼고 호올로 서면
운명처럼 반드시 「나」와 대면케 될지니
하여 「나」란 나의 생명이란
그 원시의 본연한 자태를 다시 배우지 못하거든
차라리 나는 어느 사구(沙丘)에 회한(悔恨) 없는 백골을 쪼이리라


- 유치환 시선 「생명의 서」(미래사, 1991년 1쇄, 1996년 10쇄) 중에서
 

2. '나는 어떤 존재인가' 끊임없이 '나'를 찾아 나서다 

 
유치환 시인님은 '나란 무엇인가?' '나는 어떤 존재인가'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던진 시인님이었습니다. 그것은 자아탐구를 통해 더 높은 마음의 경지에 닿으려는 몸부림이었습니다.
 
그 뜨거움을 표현한 작품이 시 '생명의 서'입니다. 이 시는 32세 때인 1939년 동아일보에 발표돼 처음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30대 초반의 시인님의 '나'에 대한 치열한 탐구정신을 느낄 수 있는 시입니다.
 
시인님은 1947년 두 번째 시집(「생명의 서」)을 내면서 이 시의 제목을 시집 제목으로 정했습니다. 그만큼 시인님에게도 중요한 시라는 뜻입니다. 
 
'생명의 서'에서 '서'는 한자로 '書'인데, 이 뜻은 '글' '문장' '기록' 등으로 풀이되지만 '사서삼경(四書三經)'의 경우에서처럼 '경전'을 뜻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제목이 주는 의미망이 매우 넓어져 우리는 그 속에서 저마다의 느낌으로 자유로이 시 속을 거닐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를 구하지 못하고 / 내 또한 삶의 애증을 다 짐 지지 못하여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낄 때 / 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으로 나는 가자

- 유치환 시 '생명의 서 일장' 중에서

 
'독한 회의(懷疑)'란 무얼까요? 회의의 뜻은 마음속에 품고 있는 의심입니다. 이 '독한 회의'는 '나는 무엇인가'라는, 해답을 얻기가 매우 어려운 존재론적 질문일 것입니다. 시인님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파고 있습니다. 또한 사랑과 미움(애증; 愛憎) 같은 감정의 휘둘림에서 벗어나기 위해 단련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참으로 험난한 여정일 것입니다.
 
시인님도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끝내 답을 찾지 못하여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낄 때 아라비아의 사막으로 가겠다고 합니다.
 
거기는 한번 뜬 백일(白日)이 불사신같이 작열하고 / 일체가 모래 속에 사멸한 영겁의 허적(虛寂)에
오직 아라-의 신만이 / 밤마다 고민하고 방황하는 열사(熱沙)의 끝

- 유치환 시 '생명의 서 일장' 중에서

 
'아라비아의 사막'이 어떤 공간인지를 묘사하고 있네요. 그곳은 내가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했던 극한 환경입니다. 불처럼 이글이글 타오르는 뜨거운 태양, 모래 속으로 명멸해 버린 영겁의 텅 빈 고독, 아무리 가도 가도 뜨거운 모래뿐 생명이라고는 만날 수 없는 황야, 그리하여 오로지 신만을 호명해야 하는 곳입니다. 이런 극한 상황으로 나를 몰고 갔을 때 내가 보일까요? '나는 무엇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의 답을 찾을 수 있을까요?  
 
그 열렬한 고독 가운데 / 옷자락을 나부끼고 호올로 서면
운명처럼 반드시 「나」와 대면케 될지니 

- 유치환 시 '생명의 서 일장' 중에서

 
'그 열렬한 고독 가운데' '호올로 서면' ‘「나」와 대면케 될’ 것이라 합니다. '나'에 홑낫표(「」) 기호까지 둘러서 강조하고 있네요. 평범한 상황에서는, 안이한 자세로는 도무지 만날 수 없는 '나'입니다. '열렬한 고독'을 거치고서야 '운명처럼 반드시' '나'와 대면하게 된다고 하네요. 이는 진정한 나를 찾기 위한 혹독한 공부가 앞서야 한다는 말일 것입니다. '나'를 찾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 느껴지네요. 
 

유치환시생명의서중에서
유치환 시 '생명의 서 일장' 중에서.

 

 

3. '나란 나만으로써 있을 수 있는 내가 아니다'

 
'나'를 주제로 한, 유치환 시인님의 '단장(斷章; 몇 줄씩 토막을 지어 적은 산문)'에 흥미로운 글이 있습니다.
 
「나」란
빛이 그 빛을 응조(應照)하는 것 없고는 아무리 있어 비치기로 어둠과 다를 바 없겠듯이,
「나」란 오직 나 아닌 모든 「너」와의 상관의 반사(反射) 위에서만 성립되는 너에의 인식(認識)인 것.

-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고」(김광회 편저, 지문사, 1984년) 중에서

 
시인님의 '나'에 대한 정의입니다. '나'는 오직 나 아닌 모든 '너'와의 관계에 있다고 하네요. '나'라는 외따로이 존재하는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로지 '너'와의 반사 위에서만 성립되는 '너'의 인식이 '나'라고 하네요. 그러므로 타자는 나를 존재하게 하는 은인이네요. 이 말은 나는 오로지 나 아닌 것으로 존재한다는 말, 'you are without self'라는 문장(틱낫한)을 떠올리게 합니다.
 
다시 「나」란
백만 어를 씨부렁거려도 마침내 나는 나를 표백(表白)하기에 시원할 수 없느니!
아무리 길어 내기로 바닷물이 그대로이듯이 -
비쳐도 비쳐도 밤 어둠은 가실 수 없듯이 - 

- 위 같은 책 중에서

 
시인님은 이렇게 '나'에 대한 숙고를 거듭합니다. '표백(表白)'은 생각이나 태도를 드러내어 밝히는 것을 말합니다. '나'에 대해 아무리 많은 말을 해도 나는 '나'를 시원하게 표현할 수 없다는 말이네요. 그만큼 나에 대한 깨달음이 어렵다는 의미로 새깁니다. 퍼낸다고 바닷물이 없어지지 않는 것처럼요, 아무리 빛을 비추어도 어둠을 없앨 수 없는 것처럼요.
 
시 '생명의 서'를 계속 읽습니다. 마지막 구절입니다.
 
하여 「나」란 나의 생명이란 / 그 원시의 본연한 자태를 다시 배우지 못하거든
차라리 나는 어느 사구(沙丘)에 회한(悔恨)없는 백골을 쪼이리라

- 유치환 시 '생명의 서 일장' 중에서

 
그렇게 '열렬한 고독 가운데'에서 자신을 단련해도 '나'를 찾지 못한다면 차라리 모래 언덕에서 죽겠다고 합니다. 죽어서 까마귀에게 백골을 쪼이더라고 후회하지 않겠다고 하네요. 얼마나 결연한 의지인지요? 이는 ‘나’에 대해서보다 시선이 늘 타인을 향해 있는 우리에게 하는 말이기도 할까요?
 
이처럼 깨달음을 향해 정진을 계속해온 시인님은 나중에 '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답을 찾았을까요?
 
유치환 시인님은 1955년 1월 경주고등학교 교장으로 부임해 5년간 근무했습니다. 이때 시인님 48세였네요. 교장으로 부임한 후 직접 만든 교훈이 '큰 나의 밝힘'입니다. 3개의 문장이 교훈을 받치고 있습니다. 이렇게요.
 

큰 나의 밝힘
- 나란 나의 힘으로 생겨난 내가 아니다
- 나란 나만으로써 있을 수 있는 내가 아니다
- 나란 나만에 속한 내가 아니다

-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고」(김광회 편저, 지문사, 1984년) 중에서

 

끊임없이 나를 탐구하고 나를 갈고닦으며 내면을 완성하려 치열하게 노력했던 시인님입니다. 그런 시인님이 교장이 되어 직접 지은 교훈입니다. 나란 나의 힘으로 생긴 것이 아니며, 홀로 존재할 수 없고, 나에게만 속해 있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런 교훈을 날마다 마음에 깊이 새기며  생활하는 학생들은 얼마나 행운인지요? 자신이 젊은날 치열하게 파고들어 알아낸 '나'에 대한 깨달음을 전해주고, 제자들을 더 높이 성장시키고 싶어했던 시인님의 뜨거운 애정이 느껴집니다. 사랑합니다, 시인님!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 목욕'에서 유치환 시인님의 시 '바위'를 만나 보세요.

 

유치환 시 바위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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