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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스미기

백석 시 추일산조 읽기

by 빗방울이네 2023. 10.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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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 시인님의 시 '추일산조'를 만납니다. 가을날 산의 아침 풍경을 보여주는 시입니다. 이 시 속에서는 과연 어떤 일들이 펼쳐지고 있을까요? 시인님이 시의 행간 깊숙이 감춰놓은 상황을 하나하나 밝혀보면서 마음도 밝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백석 시 '추일산조' 읽기


秋日山朝
 
- 백석(1912~1995, 평북 정주)
 
아츰볓에 섭구슬이한가로히익는 곬작에서 꿩은울어 山울림과작난을한다
 
山마루를탄사람들은 새ㅅ군들인가
파 란한울에 떨어질것같이
웃음소리가 더러 山밑까지들린다
 
巡禮중이 山을올라간다
어제ㅅ밤은 이山절에 齋가들었다
 
무리돌이굴어날이는건 중의발굼치에선가


- 백석 시집 「사슴」 복원본(도서출판 소와다리, 2016년) 중에서
 

2. 1936년 발표 당시 원본으로 감상하는 '추일산조'


시의 원본입니다. 1936년 발간된 백석 시인님 시집 사슴에 실린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오늘날에 비추어보면 오탈자로 보여도 시의 발표 당시엔 맞춤법에 맞는 것이겠지요?

백석 시인님이 직접 쓰고, 또 시집을 엮을 때 꼼꼼히 교정을 본 그대로입니다. 띄어쓰기를 오늘의 어법에 맞게 정돈하려 하다가 이 또한 시인님의 의도이자 '시의 얼굴'이라는 생각에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감상해 봅니다.

제목 '추일산조(秋日山朝)'는 ‘가을날 산의 아침’ 정도로 새깁니다.

아츰볓에 섭구슬이한가로이익는 곬작에서 꿩은울어 山울림과작난을한다

- 백석 시 ‘추일산조’ 중에서


첫 행이 아주 깁니다. 2개의 행으로 나누어도 될 길이이고 호흡인데 시인님은 한 개의 행으로 길게 두었네요. 

이 기다란 첫 행은 마법 같은 행이랄까요? 꿩의 울음소리가 섭구슬(작은 열매)이 익는 산골짜기를 타고 이 기다란 첫 행처럼 길게 쭈욱 이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각적으로 꿩의 울음소리를 '볼 수 있게' 되었네요. 
 
특히 꿩이 산울림과 작난(장난)을 한다는 구절에서 이 시각적 마법은 한 번에 그치지 않고 계속되고 있습니다. 신비롭네요.

山마루를탄사람들은 새ㅅ군들인가 / 파 란한울에 떨어질것같이 / 웃음소리가 더러 山밑에까지들린다

- 백석 시 ‘추일산조’ 중에서


우리는 여기서 시의 화자, 즉 시인님이 ‘산밑’에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나무꾼들은 산마루에 올라가 자기들끼리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면서 즐겁게 웃고 있습니다. 지금도 그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듯하네요.

가을날의 아침, 산밑을 거닐던 시인님은 얼마나 오랫동안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던 걸까요? 하늘을 오래 쳐다보고 있으면 하늘 속으로 뛰어들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위쪽 아래쪽 구분이 없어지고요. 그래서 시인님은 나무꾼들의 웃음소리가 ‘파란 하늘에 떨어질 것’ 같다고 합니다. 시인님은 카메라를 180도 빙그르 회전하여 세상을 뒤집어놓았네요. 영화의 한 장면 같습니다.
 
또 한 가지, '파 란'. 얼마나 파랗고 깊은 하늘이었기에 이렇게 '파'와 '란' 사이 한 글자를 띄웠을까요? 다른 시구들은 대부분 다닥다닥 붙여둔 점에 비추어 이 이례적 띄움이 매우 선연하게 우리 눈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巡禮중이 山을올라간다 / 어제ㅅ밤은 이山절에 齋가들었다

- 백석 시 ‘추일산조’ 중에서

 
'순례중'. 순례를 하고 있는 스님입니다. 이 아침에 산을 올라가고 있네요. 산밑에 서성이고 있는 시인님을 스쳐 갔겠네요. 그리고 시인님은 어젯밤에 이 산에 있는 절에 재가 있었다고 합니다. 전혀 관계가 없을 듯한 두 에피소드를 나란히 배치해 놓았네요. 두 에피소드, 과연 관계가 없을까요?
 

백석시추일산조중에서
백석 시 '추일산조' 중에서.

 

 

3. 이 시의 마지막 행에 숨겨진 풍경은 무엇일까요?

 
무리돌이굴어날이는건 중의발굼치에선가

- 백석 시 '추일산조' 중에서


'무리돌'은 산에 있는 작은 돌들을 말합니다. 그 작은 돌들이 굴러내린다고 합니다. 굴러내린다고 하니 작은 돌들이 경사진 비탈에서 굴러내린다는 말이네요. 그렇게 돌들이 굴러내리는 원인이 스님의 발꿈치에서 비롯된 것인가 하고, 시인님은 묻고 있네요.
 
이 구절에 바짝 다가가기 위해 우리는 바로 앞 3연을 다시 읽습니다.
 
巡禮중이 山을올라간다 / 어제ㅅ밤은 이山절에 齋가들었다 

- 백석 시 '추일산조' 중에서

 
'순례중'은 진리를 찾기 위해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니며 수행하는 스님입니다. 그리고 어젯밤에 이 산에 있는 절에 '재(齋)'가 들었다고 합니다. '재'는 성대한 불공이나 죽은 이의 넋을 위로하기 위한 법회를 말합니다. 이 '재'를 지낸 절에는 음식이 많을 것입니다. 어젯밤에 재를 지냈다고 하니 오늘 아침까지는 아직 음식이 남아 있겠네요.
 
그렇습니다. '순례중'은 재가 있었던 절에 가기 위해 이 가을날의 아침에 산을 올라가고 있습니다. 기나긴 순례길에 허기지고 지친 스님을 떠올려봅니다. 시인님은 스님의 허기를 드러내놓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재를 지낸 절'과 '산으로 올라가는 순례 중'이라는 두 개의 에피소드를 나란히 배치만 해두고 팔짱을 끼고 있는 시인님은 얼마나 엄전하고도 다정한 마음인지요?
 
무리돌이굴어날이는건 중의발굼치에선가

- 백석 시 '추일산조' 중에서

 
우리는 다시 마지막 연으로 돌아왔습니다. 앞의 정황을 이해하고 나니 비로소 이 마지막 행의 의미가 환하게 드러나네요. '순례중'은 지금 매우 서두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순례중'은 사람들이 평소 다니는 산길로 가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름길로 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지름길은 비탈일 것입니다. 조금이라도 빨리 그 절에 도착하기 위해 길을 질러가고 있는 것입니다. 질러가기 위해 비탈진 곳을 밟았으니 거기 발꿈치 아래 모여있던 돌들이 우르르 쏟아져 내렸겠네요.
 
시인님은 산밑에서 이 광경을 다 느끼고 있습니다. 조금 전 '순례중'이 시인님 곁을 스쳐 산으로 들어갔는데 '무리돌'이 우르르 쏟아지는 소리가 났네요. 그 소리만 듣고도 시인님은 다 알 수 있습니다. 길을 질러가느라 몸을 바짝 웅크린 채 비탈을 바삐 오르는 스님의 모습을요.
 
이 짧은 한 줄에 많은 사연을 숨겨놓고 백석 시인님은 눈을 지그시 감고만 있는 것 같습니다.
 
산울림과 장난하는 꿩, 파란 하늘이 울리도록 파안대소하는 산마루의 나무꾼들, 절로 바쁘게 가는 순례중. 이 일곱 행짜리 짧은 시 속에 생동감이 넘치는 가을날 산의 아침, 평범해서 더 정답고 따뜻한 우리네 삶의 풍경을 담아놓았네요.
 
이제는 볼 수 없는 풍경, 가끔씩 이 시를 꺼내 그 옛적의 평화로운 풍경 속으로 들어가 마음을 헹궈야겠습니다.
 
글 읽고 마음목욕하는 블로그 '독서목욕'에서 백석 시인님의 시 '고방'을 만나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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