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승 시인님의 시 '봄길'을 따라가 봅니다. 시인님은 그 길에 무엇을 심어 두었을까요? 그 길에서 우리는 무엇을 만나게 될까요? 저마다 가고 있는 '나의 길'을 염두에 두고, 이 시의 울림에 마음을 씻으며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정호승 시 '봄길' 읽기
봄길
- 정호승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강물은 흐르다가 멈추고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은 흩어져도
보라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 정호승 시선집 「내가 사랑하는 사람」(비채) 중에서
2021년에 나온 위 시선집의 맨앞에 '시인의 말'이 있습니다. 거기에 정호승 시인님은 이렇게 써 두었습니다.
시는 쓴 사람의 것이 아니고 읽는 사람의 것이다.
시는 어느 한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고 만인을 위한 것이다.
- 정호승 시선집 「내가 사랑하는 사람」(비채) '시인의 말' 중에서
이 다정한 시인의 말에 기대어 우리 함께 '봄길'을 걸어보십시다.
2. 길의 끝에서 길이 되는 사람
지난겨울, 그 긴 겨울 속에서 우리는 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겨울 속에서, 몸을 움츠리고 저마다의 고통을 참아야했습니다. 그 겨울이 끝나는 곳에서 이렇게 봄이 왔네요.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 길이 있다
- 정호승 시 '봄길' 중에서
겨울 속에서 모든 것이 멈춘다면 얼마나 절망적일까요? 우리에게 봄이 오지 않는다면, 봄길이 없다면요. 그러나 정호승 시인님은 '길이 있다'라고 합니다. 그 길이 '봄길'이네요.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 정호승 시 '봄길' 중에서
우리를 둘러싼 고통 속에서 모든 것이 멈춘다면 얼마나 까마득할까요? 우리의 고통이 끝나지 않는다면, 치유되지 않는다면요. 그러나 정호승 시인님은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그 사람은 겨울의 장막을 헤치고 나타난 '봄길 같은 사람'이네요.
엊그제 3월 26일이 안중근 의사 순국 113주기여서일까요? 이 구절에서 문득 우리의 영웅 안중근 의사님(1879~1910)이 떠오릅니다. 안중근 의사님은 1909년 하얼빈역에서 조선 침략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뒤 중국 대련 여순감옥에서 돌아가셨습니다. 1910년 3월 26일이 일본에 의해 사형이 집행된 날인 것입니다. 아, 30세였습니다.
보라 /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 정호승 시 '봄길' 중에서
우리가 일제 치하에서 사랑이 끝났다고 절망하고 있을 때 사랑의 불씨를 피워 주셨네요. 자신의 생애에서 만나게 될 크고 작은 수많은 사랑을 다 접고 커다란 사랑의 불씨를 남겨 주셨네요.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 즉 / 딴 맘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 비겁하게 삶을 구걸하지 말고 /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 조마리아 여사가 아들 안중근 의사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빗방울이네는 이 같은 어머니의 편지를 생전 본 적이 없습니다. 이 뜨거운 편지, 사형집행을 앞둔 아들에게 어머니가 보낸 편지라고 믿을 수 있겠는지요?
스스로 사랑이 되어 / 한없이 봄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 정호승 시 '봄날' 중에서
우리는 이렇게 봄길 같은 큰 사람들이 있어 이 화창한 봄날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이네요.
3. 실낱 같은 길이라도 열고 있는지 묻는 시
빗방울이네는 이 시를 읽으며 또 사랑하는 사람들이 떠오릅니다. 아버지 어머니 말입니다. 봄길 같은 분들요. 지금은 세상에 안 계시지만 삶의 길을 열어준 분들요. 그 아버지의 아버지, 그 어머니의 어머니도 떠오릅니다. 아련한 이 봄길 가득 차오르는 분들이네요.
또 떠오릅니다. 삶의 길. 나는 지금 어떤 삶의 길을 가고 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스스로 봄길이 되어 /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 정호승 시 '봄길' 중에서
이렇게 봄길이 되어, 아니 봄같이 커다란 것이 아니라 아주 아주 작은 온기라도 품은 길을 열어가고 있는지, 삶에서 실낱 같은 길 하나 이어가고 있는지, 이 시는 자꾸 묻고 있는 것만 같은 봄밤입니다.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목욕'에서 정호승 시인님의 시를 더 읽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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