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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스미기

정현종 시 비스듬히 읽기

by 빗방울이네 2023. 2.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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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정현종 시인님의 시 '비스듬히'를 읽으려 합니다. 이 시는 신묘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힘든 일도 가볍게 여길 수 있는 마법을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어떤 숨은 뜻이 있을까요? 이 시에 모두 '비스듬히' 생각을 기대어 독서목욕을 해봅시다. 

1. 정현종 시인 '비스듬히' 읽기

 
비스듬히
 
- 정현종
 
생명은 그래요.
어디 기대지 않으면 살아갈 수 있나요?
공기에 기대고 서 있는 나무들 좀 보세요.
 
우리는 기대는 데가 많은데
기대는 게 맑기도 하고 흐리기도 하니
우리 또한 맑기도 하고 흐리기도 하지요.
 
비스듬히 다른 비스듬히를 받치고 있는 이여.
 
- 「시인의 사물이 있는 정현종 시선집」(정현종 지음, 문학판) 중에서
 
이 책은 시인이 가진 사물들의 사진과 시인의 시를 자필 원고와 함께 엮은 특별한 편집이 돋보입니다. 1972년에 나온 시인의 첫 시집 「사물의 꿈」 표지와 내지, 시인의 육필 원고들, 시인의 오래된 시계, 조각상, 음악과 예술책들이 책 중간중간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시인의 사물들 중에서 이 책의 앞부분에 소개된 니체의 책 20권이 눈이 띕니다. 시인의 손이 닿아 너덜너덜해진 책입니다. 그것도 모두 '원서'들입니다. 시인의 공부방 한 구석에 쌓여있다는 퇴계의 「성학십도」 「미당서정주시전집」 「노자타설」 「금강경강의」 같은 두꺼운 책들은 옆으로 누워 쌓여있네요.
 
연세대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국어국문학을 가르친 시인이 평생 어떤 책으로 독서목욕을 하며 마음을 씻고 시를 건져 올리며 살아왔는지 짐작이 됩니다. 멋진 시 '비스듬히'가 나온 시인의 그 사유의 우물이 얼마나 맑고 깊은 우물인지 상상해 봅니다.

2. 나무도 공기에 기대어 있다


이 시 '비스듬히'를 읽고 그 소중한 뜻을 우리의 마음속에 간직하기에 큰 어려움은 없을 듯합니다. 마지막 행('비스듬히 다른 비스듬히 를 받치고')에서 '비스듬히'라는 부사를 명사 역할로 치환시킨 점이 눈이 띕니다. '비스듬히'는 '비스듬이'로도 읽히겠네요. 그래서 '똑똑이' '뚱뚱이'처럼 속성에 '사람'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 '~이'를 붙인 것인 양 '비스듬히'를 명사화해 시의 맛을 더해줍니다. 
 
- 공기에 기대고  서 있는 나무들 좀 보세요.
 
우리는 이 구절에서 정신이 아득해지고 맙니다. 나무라는 생명도 공기에 비스듬히 기대고 있다는 발견은, 평소 나무가 주체적으로 서서 홀로 자란다는 우리의 고정관념을 흔들어 씻어주며 바르게 펴줍니다. 그러면서 시야가 확 넓어집니다.
 
빗방울이네가 이 시를 그대에게 읽혀드려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어떤 행사 때문이었습니다. 빗방울이네가 속해있는 조직이 어떤 이의 출판기념회를 열게 되었는데, 그 일을 빗방울이네가 챙기게 되었습니다. 워낙 미미한 재주인데, 기획부터 행사 진행까지 속속들이 준비하고 실현시키는 일은 긴장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런 때 이 시가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부이처럼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의 기슭에 이르러 어느덧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 행사는 나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다. 환영사를 해야 할 사람들, 무대에 올라갈 북토크 출연자들, 시 낭송자들, 심지어 행사에 참석하는 관객마저도 자신들에게 주어진 일정량의 긴장감을 나누어 들고 행사장에 온다. 나 혼자 긴장의 총량을 감당할 필요가 없다. 일은 서로 '비스듬히' 기대어 이루어진다!
 
내가 세상의 주체라는 생각은 얼마나 무거운지요. 나는 세상의 한 부분이며, 다른 사람에게 비스듬히 기대어 있다는 생각에 이르면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을 실감합니다. 사물과 사건들조차도 서로 비스듬히 기대어 자신의 본성에 따라 필연적으로 일어난다는 점을 인식했을 때 우리의 긴장이 누그러짐을 체감하게 됩니다.
 

공기에기대고서있는나무들좀보세요정현종시중에서
공기에 기대고 서 있는 나무들 좀 보세요 - 정현종 시 중에서

 

 

3. 요즘 누구에게 비스듬히 기대어 있나요?


- 어디 기대지 않으면 살아갈 수 있나요?
 
정현종 시인님은 생명은 기대지 않고 혼자로는 살아갈 수 없다고 합니다. 참으로 그렇습니다. 우리는 부모님, 형제들, 친구들, 직장 사람들, 이웃들에 많거나 적거나 비스듬히 기대어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기대는 게 맑기도 하고 흐리기도 하니 / 우리 또한 맑기도 하고 흐리기도 하지요
 
정현종 시인님은 우리가 비스듬히 기대고 있는 대상의 상황에 따라 우리도 영향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내가 기분이 좋으면 나에게 기대고 있는 이도 기분 좋을 것입니다.
 
제가 가끔씩 들리는 문학관이 있습니다. 정문을 들어서면 마당이 있고 거기에 큰 개가 있습니다. 이 녀석은 저만 보면 꼬리를 헬리콥터 날개처럼 돌립니다. 그 시간 저도 참 행복해집니다. 저도 할 수 있다면 그 녀석 앞에서 헬리콥터 날개 같은 무언가를 돌리고 싶습니다. 요즘 저는 이 녀석의 사랑에 기대어 있는 것만 같습니다.
 
그대는 요즘 많이 기대고 있는 이는 누구인가요? 또 유난히 그대에게 비스듬히 기대고 있는 이는 누구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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