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벌레라는 벌레가 있습니다. 자벌레나방의 애벌레입니다. 자벌레일 때에는 바닥에 꼬물거리며 기어다니지만, 나중에 나방이 되어 훨훨 날아다니지요. 주변에 흔히 만나지만 지나치게 되는 자벌레, 자벌레는 우리에게 어떤 말을 하고 싶어할까요?
1. 자벌레를 만나게 된 사연
오늘 정말 신기한 일이 있었답니다. ‘꼬물탱’이라는 과자가 있어요. 일종의 젤리인데, 씹으면 쫄깃한 식감에 새콤달콤한 맛이 나지요. 짝지가 직장 사무실에서 어떤 이가 먹어보라고 준 것을 안 먹고 집으로 가져온 것입니다. 이걸 누가 먹는다고 가져왔노? 하면서 저는 그것을 고방의 과자상자에 넣어두었습니다.
그리고 잊고 있었어요. 집 뒤 동산에 있는 체육공원에서 운동을 하고 집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이었어요. 엘리베이터 안에는 저 혼자였고요, 어제 조용필 포스팅한다고 반복해서 들었던 ‘바람의 노래’ 가락이 몸에 남아서 흥얼거렸어요. 그러면서 잘도 생긴 얼굴 보며 폼 잡는다고 거울을 본 순간, 오른쪽 어깨에 무언가 꼬물거리며 거울 속의 잘도 생긴 그 남자의 목덜미 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거예요.
자벌레였어요. 저는 깜짝 놀라 목을 최대한 접어서 제 오른쪽의 실사 어깨를 재빨리 쳐다보았어요. 자벌레는 매우 느려서 녀석을 잡는 것이 그리 서두를 만한 일은 아니었지만요. 야구모자챙을 살며시 갖다 대니까 그 위에 특유의 몸짓으로 넙죽넙죽 기어왔어요.
2.자벌레라고 하는 이유
자벌레라고 하는 이유를 알겠어요. 꽁무니를 바짝 들어서 몸을 고리처럼 둥글게 만 다음 머리 쪽에 갖다 대고, 다시 머리를 길게 뻗어 앞으로 전진! 이걸 반복했어요.
자로 길이를 재듯이 말예요. 나중에 안 건데, 이 녀석의 영어이름은 얼마나 거창하게요? 자벌레는 영어로 ‘geometer’랍니다. 지구를 뜻하는 ‘geo’에 계량기로 재는 것을 뜻하는 ‘meter’가 붙었네요. 맙소사, 이 귀여운 녀석이 지구를 재고 있는 중이네요. 이름만으로는 지상 최대의 벌레가 아니고 뭐겠어요.
다른 영어이름은 measuring worm, inch worm, 또는 고리(loop)모양으로 이동하는 녀석이라고 해서 looper라고도 해요.
아, 엘리베이터 안에서 야구모자챙에 녀석을 태워서 어떻게 했냐고요? 네, 그렇게 녀석을 살며시 태우고요, 1층으로 다시 내려갔어요. 집에 거의 다 왔지만 어쩝니까, 14층에서 엘리베이터를 멈추고 다시 내려갔지요. 그리고 녀석을 화단의 영산홍 이파리에 연착륙 시켜주고 다시 엘리베이터를 탔지요. 올라가다 보니까 앗, 녀석과 소중한 기념사진이라도 찍어둘 걸, 깜박했네!
그래서 13층쯤에서 엘리베이터를 급히 멈춰 다시 내려갔지요. 아니나 다를까, 느려터진 녀석은 그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어디 도망가지도 못하고(가기는 가는 중이었지만), 아직 영산홍 맨 꼭대기 이파리를 어슬렁거리고 있었어요.
그런데요, 제가 살며시 다가가니까 얘가 어떻게 했을까요? 하늘을 향해 사선으로 몸을 쭉 뻗어 꼼짝도 하지 않는 거예요. 자신이 작은 나뭇가지라도 된다는 듯이, ‘나 자벌레 아니야’ 하는 듯이요.
나중에 백과사전을 찾아보니 자벌레는 그렇게 식물줄기로 위장해 자신을 은폐하는 습성이 있다는 거예요. 제가 사진을 여러 장 찍는 동안에도 전혀 미동도 없이 체조 선수처럼 서 있었어요. 그래 맞아, 너 자벌레 아니야. 나뭇가지야. 이렇게 저도 모른 척해주었지요.
사진을 찍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오는데, 아, 그 꼬물탱이 생각났어요. 그 쫄깃한 과자 말예요. 그 과자 생김새가 바로 자벌레였어요. 아침에 그 과자를 고방 과자상자에 넣어두었는데 체육공원에서 진짜 자벌레 한 마리가 제 어깨를 타고 엘리베이터까지 따라왔군요. 이런 우연이 어디 있을까요? 아, 자벌레는 저에게 무슨 하고 싶은 말이 있었을까요?
3. 자벌레가 몸을 구부리는 까닭은?
속담으로 소개되는 말로 이런 말이 있어요. ‘자벌레가 몸을 구부리는 것은 장차 곧게 펴려는 것이다’ 이 말은 주역에 나오는 문장이라고 합니다.
- 尺蠖之屈 以求伸也
문장에 나오는 척확(尺蠖)이 자벌레입니다. 자를 뜻하는 척(尺), 자벌레 확(蠖).
앞날을 도모하기 위해 현재의 어려움을 참으며 자기를 낮추는 자세를 말하는 거네요. 자벌레가 저에게 하고 싶었던 말일까요?
여러분, 혹시 체육공원에서 어느 자벌레라도 만나면 제 안부 좀 전해주세요. 저 요즘 자벌레처럼 한껏 웅크려 있다고요. '브레이크'를 걸고 '브레이브'를 키우면서요.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 목욕'에서 자벌레가 나오는 백석 시인님의 시를 만나보세요.
'읽고 쓰고 스미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무지출을 결심한 그대에게 띄우는 편지 (16) | 2022.12.04 |
---|---|
김재철 80대 CEO의 특별한 삶의 비기(祕技) (5) | 2022.12.01 |
조용필 최애곡 ‘바람의 노래’에 숨어있는 것 (20) | 2022.11.24 |
스타벅스는 모비딕과 무슨 관계? (20) | 2022.11.22 |
과연 이것이 기적 같은 일일까요? (12) | 2022.11.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