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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스미기

백석 시 산비

by 빗방울이네 2022. 1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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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 시인님의 시 '신비'를 만납니다. 시는 짧지만, 서로 먹고 먹히는 치열한 삶의 풍경이 든 시입니다. 함께 읽으며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3행짜리 '산비' 읽기


산(山)비

- 백석(1912~1996, 평북 정주)

산(山)뽕닢에 비ㅅ방울이 친다
맷비들기가 닌다
나무등걸에서 자벌기가 고개를 들었다 멧비들기 켠을 본다

 

▷백석 시집 「사슴」(1936년 오리지널 디자인, 도서출판 소와 다리, 2016년) 중에서


백석 시인님(1912~1996)은 평북 정주 출신으로 1930년 19세 때 조선일보 신년형상문예에 단편소설 '그 모와 아들'이 당선했습니다. 이어 1935년 조선일보에 시 '정주성'을 발표하며 시인으로 등단했습니다.

1936년 첫 시집 「사슴」을 100부 한정판으로 출간했습니다.

조선일보 편집기자, 함흥 영생고보 영어교사 등을 지냈습니다. 1040년부터 만주에서 지내다 1945년 신의주를 거쳐 고향 정주로 돌아와 조만식의 부탁으로 평양에서 러시아어 통역비서로 활동했습니다.

그 후 러시아 문학 번역작업에 몰두해 숄로호프의 「고요한 돈 1, 2」 등을 냈고, 동화시집 「집게네 네 형제」 등을 냈습니다.

1959년 48세 때 양강도 삼수군 관평리에 내려가 농업협동조합 축산반에서 양치는 일을 맡았으며, 1996년 1월 85세로 생을 마감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2. '산비'가 말하려는 것은?

'시인의 시인'으로 불리는 백석 시인님은 생애 단 한 권의 시집, 「사슴」을 남겼습니다.

 

얼마나 좋은 시들인지, 윤동주 시인님이 이 시집을 빌려와 노트에 필사해 읽고 간직하며 사랑했을 정도였습니다.

「사슴」에는 33편의 시가 실렸는데, 유달리 짧은 시 네 편이 있습니다. '비'와 '노루'란 시는 각각 2행짜리입니다. '청시'와 '산비'는 겨우 3행입니다. 

 

이 3행짜리 짧은 시 속에 우리네 삶의 어떤 풍경이 들어있을까요?

 

시 제목 '산(山)비'는 산에 내리는 비를 말하네요. 산속에 비가 내려 빗방울이 뽕나무 잎을 때립니다. 그리고 멧비둘기(맷비들기)가 푸드덕하고 날아갑니다. 나뭇가지에서 자벌레(자벌기)가 고개를 들어 날아가는 멧비둘기 쪽을 바라봅니다.

 

그런데 시인님은 이 시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요?

 

'산(山)뽕닢에 비ㅅ방울이 친다'


조용한 산속인데요, 비가 내립니다.

 

'산뽕닢'에 빗방울이 친다'에서 '친다'라고 했으니 갑자기 후두득 내리는 소낙비였을까요?

 

산속 공간에 비릿한 비 냄새가 퍼지고 일순 주위가 소란해지는 것만 같네요.

 

'맷비들기가 닌다'

 

원문에는 '닌다'에서 '닌'의 받침이 'ㄹㄴ'으로 되어 있습니다. '닌다'는 '난다'의 의미인데요, 그 'ㄹㄴ'이라는 받침은 멧비둘기(맷비들기)가 날아가는 동작을 스냅사진이 아니라 짧은 동영상처럼 느껴지게 하네요. 지금 막 날아오르고 있는 움직임을 보고 있는 것만 같네요.

 

조용한 산속에 갑자기 비가 후드득 산뽕잎을 치니까 멧비둘기가 놀라 공중으로 날아올랐습니다. 그다음에는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나무등걸에서 자벌기가 고개를 들었다 멧비들기 켠을 본다'

 

'자벌기'는 자벌레를 말합니다. 자벌레는 자벌레나방의 애벌레입니다. 나뭇가지나 나뭇잎 위에서 꼬물거리며 넙죽넙죽 기어 다니는 벌레요.

 

기어가는 동작이 아주 특이합니다. 마치 자신의 몸을 자로 삼아 이 지구를 다 재어보려는 듯이 기어갑니다. 

 

우선 꽁무니를 힘껏 들어서 기다란 몸을 고리처럼 말아요. 그다음에 그 꽁무니를 앞쪽(머리)에 가까이 가져가서는 다시 머리를 앞으로 길게 뻗어 전진합니다. 

 

이 녀석의 영어 이름이 'geometer'입니다. geo(지구)+meter(계량기). 그 이름 참 거창하네요.

 

그 자벌레가 '나무덩걸'에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라고 합니다. 그리고 멧비둘기 쪽을 본다고 하네요. 

 

과연 어떤 상황일까요?

 

나뭇가지로위장중인자벌레모습
나뭇가지로 위장 중인 자벌레. 중간의 나뭇가지처럼 보이는 것이 자벌레다.

 

 

 

3. 서로 먹고 먹히는 자연 속의 치열한 생(生)

우선 시행의 형태를 봅니다.

 

백석 시인님은 '나무등걸에서 자벌기가 고개를 들었다'와 '멧비들기 켠을 본다'라는 문장 두 개를 두 개의 행으로 나누지 않고 굳이 기다랗게 붙여놓았네요. 읽는 사람이 숨이 찰 정도입니다. 

 

'나무등걸에서 자벌기가 고개를 들었다 맷비들기 켠을 본다'

 

이런 시행 배치는 상황의 긴박성을 우리에게 고스란히 전해 주네요.

 

시인님은 나무등걸에서 자벌레가 고개를 드는 동시에(!) 바로 멧비둘기 쪽을 바라보는 다급한 상황을 이렇게 기다란 시행으로 우리에게 전하려는 것만 같습니다.

 

자벌레는 지금 멧비둘기를 매우 두려워하고 있네요. 혹시나 멧비둘기가 자신을 잡아먹지 않을까 하고요. 

 

푸드덕하고 나는 멧비둘기의 움직임을 자벌레는 본능적으로 다 느꼈을 테니까요.

 

'자벌기가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자벌레가 왜 고개를 들었다고 할까요?

 

멧비둘기의 움직임을 느끼고 위험을 직감했다면 오히려 몸을 움츠려야 하지 않을까요?

 

자벌레의 특성을 알면 시인민이 '자벌기가 고개를 들었다'라고 한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자벌레를 지켜본 적이 있습니다. 나뭇잎 위에 있던 자벌레를 살짝 건드리자 자벌레는 도망가지 않고 자기가 있던 자리에서 기다란 몸을 일자(一字)로 곧추세워 섰습니다.

 

그리고 가만히 있었지요. 미동도 하지 않고요. '나 자벌레 아니야!'

 

바로 자벌레의 위장전술입니다. 자벌레는 위험에 처하면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습니다. 자신의 몸을 나뭇가지인 것처럼 위장합니다. 그러니까 '나무등걸에서 자벌기가 고개를 들었다'라는 구절은 자벌레의 위장전술을 말하고 있네요.

 

'자벌기가 고개를 들었다'

 

막 날아오르는 멧비둘기를 발견한 자벌레가 재빨리 위장에 들어가 몸을 길게 공중으로 뻗어 딱딱한 나뭇가지인 것처럼 보이게 하고 있습니다. 

 

시골에서 자라 자신의 시 전편에서 자연을 노래한 백석 시인님은 자벌레의 위장전술을 다 알고 있었네요.

 

이렇게 시인님은 '산비'를 통해 서로 먹고 먹히는 치열한 생(生)의 현장, 약육강식의 치열한 생명의 현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연 속에 고스란히 노출된 생명의 긴장이 시 속에 흐르고 있네요. 3행짜리 짧은 시 속에 생(生)의 잔인과 공포가 넘쳐흐르고 있네요.

 

시인님은 이 시에서 자신의 감정을 일절 드러내지 않고, 있는 사실 그대로를 툭툭 던지며 우리에게 보여만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고도의 긴장감으로 몸을 떨게 됩니다. 

 

우리도 자벌레처럼 연약하고 연약한 생명이니까요. 마음 바닥에서 슬픔이 몽글몽글 피어오르네요.

 

그러니 어찌 우리 서로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지요? 위하지 않을 수 있겠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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