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 시인님의 시 '박각시 오는 저녁'을 만납니다. 시인님은 그저 자신의 주변에 있는 소소한 것들을 툭툭 던져주는데 우리는 그것이 그렇게 보약같습니다. 어떤 시일까요? 함께 읽으며 마음을 맑히며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백석 시 '박각시 오는 저녁' 읽기
박각시 오는 저녁
- 백석(1912~1995, 평북 정주 출생)
당콩밥에 가지냉국의 저녁을 먹고 나서
바가지꽃 하이얀 지붕에 박각시 주락시 붕붕 날아오면
집은 안팎 문을 횅하니 열젖기고
인간들은 모두 뒷등성으로 올라 멍석자리를 하고 바람을 쐬이는데
풀밭에는 어느새 하이얀 대림질감들이 한불 널리고
돌우래며 팟중이 산 옆이 들썩하니 울어댄다
이리하여 한울에 별이 잔콩 마당 같고
강낭밭에 이슬이 비 오듯 하는 밤이 된다
- 「정본 백석 시집」(백석 지음, 고형진 엮음, 문학동네, 2019년) 중에서
2. 왜 박각시일까요?
여름밤이네요. '박각시 오는 저녁'이라고 합니다. 대체 박각시가 어떤 각시(색시)일까요? 각시가 온다니 어쩐지 기분이 좋네요.
그런데 박각시는 나방입니다. 나방이면 징그러운 기분이 들어야 할 텐데, 왜 이리 기분이 마냥 좋을까요?
이 나방은 박꽃(바가지꽃)을 아주 좋아한답니다. 박꽃을 찾아가 꿀을 냠냠 빨아요. 화려한 날갯짓으로 박꽃에 붙어 꿀을 빠는 이쁜 모습에 박꽃의 각시라는 의미에서 박각시라는 이름이 붙었군요. 얼마나 다정한지요.
영어로는요, hawk moth입니다. 매(hawk) 나방(moth)입니다. 날개를 펼친 모양이 매처럼 생겼어요. 날갯짓을 빨리해서 공중에서 정지비행을 하면서 꿀을 빨아요. 자기 몸보다 더 기다란 빨대모양의 주둥이를 박꽃 속에 딱 꽂아서 꿀을 빨아요. 얘는요, 후진도 하고요, 급격한 방향전환도 할 수 있어요. 박쥐들의 사냥을 피하기 위해 박각시 몸에는 박쥐가 보내는 초음파를 흡수하는 기름성분의 털이 나 있고요. 정말 신기하죠?
그런 '박각시 오는 저녁'이라는데, 왜 저녁에 올까요?
이 녀석은 해질녘을 가장 좋아해 저녁에 꽃을 찾아다니는 로맨티시스트죠. 박꽃이 초저녁부터 밤에 꽃잎이 벌어진다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요? 그대도 자주 박각시를 만났을 거예요. 빛을 좋아해서 가로등 근처에 많고요, 특히 저녁에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앞유리에 부딪히는 나방, 자동차 불빛이 좋아 뛰어든 불쌍한 박각시네요.
이런 정다운 이름과 꿀 빠는 출중한 능력과 저녁을 좋아하는 고상한 취향을 가진 각시가 오는 저녁은 어떤 저녁일까요?
3. 인간과 자연이 하나되는 향연 속으로
당콩밥에 가지냉국의 저녁을 먹고 나서
바가지꽃 하이얀 지붕에 박각시 주락시 붕붕 날아오면
- 백석 시 '박각시 오는 저녁' 읽기
오늘 식당에서 점심을 먹는데 오이와 미역이 든 냉국이 나왔어요. 얼마나 반갑던지요. 새콤한 맛에 이 시가 딸려 나왔죠. 이 시에는 가지냉국이 나오니까요. 가지를 데쳐서 넣은 가지냉국도 여름 별미지요.
당콩밥은 당콩(강낭콩)을 넣어 지은 밥입니다. 양대라고도 하는데 검붉은 색입니다. 붉은 콩물이 우러나와 밥도 불그스레 했겠네요. 삶은 밤맛이 나는 밥이네요. 참으로 소박한 저녁입니다.
가을에 박을 얻으려고 초가지붕에 올린 박에 박꽃이 하얗게 피었습니다. 박꽃은 초저녁에 꽃이 벌어집니다. 박꽃의 꿀을 좋아하는 박각시가 가만있을 리 없지요. 박각시과의 곤충인 주락시와 함께 날아오네요. 이 2행은 박꽃과 박각시의 생태를 정확히 묘사한 매우 과학적인 진술입니다.
그냥 날아오는 게 아닙니다. '붕붕'요. 박각시와 주락시는요, 이 시의 입체음향 담당입니다. '붕붕'은 여름 저녁의 작은 향연이 시작됨을 알리는 팡파르죠. 얼마나 멋진 파티가 열릴까요?
집은 안팎 문을 횅하니 열젖기고
인간들은 모두 뒷등성으로 올라 멍석자리를 하고 바람을 쐬이는데
- 백석 시 '박각시 오는 저녁' 읽기
3행의 주어는 '집'이고, 4행의 주어는 '인간'입니다. 집과 인간이 동등한 주어 자격으로 등장했네요! 집이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하고요, 인간들은 뒷등성으로 올라가 바람을 쐰다 하고요. 이래서 집이 더욱 정답게 다가옵니다.
풀밭에는 어느새 하이얀 대림질감들이 한불 널리고
돌우래며 팟중이 산 옆이 들썩하니 울어댄다
- 백석 시 '박각시 오는 저녁' 읽기
하얀 이불 홑청이었을까요? 인간들은 지금이 저녁인데 왜 다림질할 하얀 것들을 한 데 하나 가득 늘었을까요? 이슬이라도 맞으면 어쩌려고요? 아, 일부러 이슬을 맞히는 걸까요? 맞네요. 저녁 이슬을 머금고 촉촉해지면 광목이나 삼베 같은 옷감은 더 잘 다려지겠네요. 이 구절을 읽으니 예전에 입에 물을 가득 품었다가 이불 홑청에 푸! 하고 뿌린 후 다림질하던 어머님이 생각나네요.
돌우래는 땅강아지입니다. 팟중이는 메뚜기고요. 그냥 '곤충들이 울어댄다'라고 하지 않고 돌우래 팟중이라는 곤충 이름을 구체적으로 표기했군요. 이로써 서로 다른 곤충의 울음이 빚어내는 화음을 상상하게 합니다. 각각 바리톤과 테너 담당이었을까요?
이리하여 한울에 별이 잔콩 마당 같고
강낭밭에 이슬이 비 오듯 하는 밤이 된다
- 백석 시 '박각시 오는 저녁' 중에서
축제의 지휘자는 오케스트라 연주자들의 연주를 절정으로 끌어올렸습니다. 그리고 현란하게 움직이던 지휘봉을 공중에서 짠! 하고 멈추었습니다. 이리하여!
이리하여 한울에 별이 잔콩 마당 같고
강낭밭에 이슬이 비 오듯 하는 밤이 된다
- 백석 시 '박각시 오는 저녁' 중에서
'이리하여' '밤이 된다'라고 합니다. 집과 인간과 바가지꽃과 박각시와 돌우래와 팥중이와 당콩밥과 가지냉국과 대림질감, 이 모든 주인공들의 참여로 밤이 된다고 합니다. 작은 콩을 흩어놓은 마당처럼 별이 총총한 하늘이 내려다보는 밤, 옥수수 잎사귀에 밤이슬이 송알송알 맺히는 밤이네요. 참으로 아름다운 밤입니다.
시인님, 이렇게 인간과 자연이 하나 되는 멋진 향연 속으로 빗방울이네도 좀 들어가도 되겠는지요?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목욕'에서 백석 시인님의 시 '하답'을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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