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 시인님의 시 '가무래기의 낙'을 만납니다. 맑고 가난한 삶에 대해 곰곰 생각하게 하는 시입니다. 함께 읽으며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백석 시 '가무래기의 낙(樂)' 읽기
가무래기의 낙(樂)
백석(1912~1995, 평북 정주)
가무락조개 난 뒷간거리에
빚을 얻으려 나는 왔다
빚이 안 되어 가는 탓에
가무래기도 나도 모도 춥다
추운 거리의 그도 추운 능당 쪽을 걸어가며
내 마음은 우쭐댄다 그 무슨 기쁨에 우쭐댄다
이 추운 세상의 한구석에
맑고 가난한 친구가 하나 있어서
내가 이렇게 추운 거리를 지나온 걸
얼마나 기뻐하며 락단하고
그즈런히 손깍지벼개하고 누워서
이 못된 놈의 세상을 크게 크게 욕할 것이다
▷「정본 백석 시집」(고형진 엮음, 문학동네, 2019년 32쇄) 중에서.
2. '가무락조개의 낙(樂)'은 어떤 즐거움일까요?
백석 시인님의 시 '가무래기의 낙(樂)'은 1938년 10월 「여성」을 통해 발표된 시입니다.
시인님 27세 즈음이네요.
가무래기는 뭘까요? 조개의 한 종류인데, 모시조개를 말합니다.
조개껍데기가 검다고 해서 가무락(←까무락) 또는 가막조개, 모시처럼 곱다고 해서 모시조개라고 불리는 조개입니다.
'가무래기의 낙(樂)'의 뜻은 글자 그대로 '가무래기의 즐거움'이라는 뜻이네요.
가무락조개의 즐거움이라니, 그건 어떤 즐거움일까요?
'가무락조개 난 뒷간거리에 / 빚을 얻으려 나는 왔다'
뒷간거리는 큰길 뒤에 있는 거리를 말합니다. 거기에 가무락조개가 났다고 하니 거기는 시장거리인 모양입니다.
그 시장거리 언저리에 시인님의 지인, 돈 있는 이가 살고 있었나 봅니다.
어떤 사정이 있었던지, 시인님은 그에게 돈을 빌리러 왔다고 합니다.
누구라도 살다 보면 이렇게 급히 돈이 필요할 때도 있지 않은지요?
빚을 얻으러 뒷간거리에 온 시인님의 눈에 들어온 것은 누군가 시장거리에 팔려고 내놓은 가무락조개였네요.
'빚이 안 되어 가는 탓에 / 가무래기도 나도 모도 춥다'
시인님은 돈을 빌리지 못했네요. 누구라도 이런 상황이면 서글퍼지지 않겠는지요?
돈을 빌리지 못한 일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그것은 돈을 빌리는 사람에게 '능력'이 없다는 것을 말하겠네요. 경제적, 사회적 능력 말입니다. 이는 돈 있는 사람의 기준에 맞는 능력이겠지요?
그러니 돈을 빌리지 못한 이는 자신의 처지를 다시 한번 확인하는 셈이 되어 서글픔이 배가되겠네요.
그 탓에 '가무래기도 나도 모도 춥다'라고 하네요.
가무래기는 추운 날 한데 나와 있어 춥고요, 시인님은 돈을 빌리지 못해 마음이 춥습니다.
이 구절에서 시인님의 독백(獨白)이 들리는 것만 같네요.
- 가무래기야, 네가 얼마나 추운지 알겠다. 지금 내가 얼마나 추운지 너도 알지? 추운 사람끼리 얼마나 추운지 알고말고!
'추운 거리의 그도 추운 능당 쪽을 걸어가며 / 내 마음은 우쭐댄다 그 무슨 기쁨에 우쭐댄다'
'그도'는 '그중에서도'로 새깁니다. 그러면 '추운 거리' 중에서도 추운 쪽이라는 의미가 드러납니다.
시인님 고향 평북 방언에 '능달'은 응달을 의미합니다(「평북방언사전」, 김이협 편저). 시 속의 '능당'은 이 '능달'의 변형으로 새깁니다.
'추운 거리의 그도 추운 능당 쪽을 걸어가며'. 이 구절에서 빚을 얻지 못한 시인님의 쓸쓸한 마음이 느껴지네요.
그런데 왜 '내 마음은 우쭐댄다 그 무슨 기쁨에 우쭐댄다'라고 했을까요?
이 부분에서 시인님의 복잡한 심사가 느껴지는 것만 같습니다.
빚을 얻으러 왔다는 말은 그만큼 돈이 '급한 일'이 생겼는데, 빚을 얻지 못하자 돈이 필요한 그 '급한 일'을 마음에서 놓아버린 것 같습니다.
그 어떤 '급한 일'은 마음 깊은 곳에서 느끼는 우쭐대는 기쁜 마음과는 거리가 있는 일이었을 것 같네요.
자신이 추구하는 본질과 다른 일, 속된 세상과 영합하여 살아가는 일이었을까요?
그러면 빚이 안 되어 '내 마음은' '그 무슨 기쁨에 우쭐댄다'라는 마음이 읽히네요.
- 그래, 차라리 잘 됐어! 그렇게 살면 안 되지! 나에게 그게 어울리기나 한 일인가! 돈을 못 빌린 일은 다행한 일이야!
그런 시인님의 마음은 애써 스스로를 위로하는 마음이기도 하겠지요?
3. '맑고 가난한 친구가 하나 있어서'
'이 추운 세상의 한구석에 / 맑고 가난한 친구가 하나 있어서'
'맑고 가난한 친구'는 가무락조개를 말하네요.
가무락조개의 성정을 가진 것 없어 두려움 없고, 욕심 없이 맑은 것으로 그렸네요.
그런 가무락조개를 자신의 친구라고 하고요.
그러니 시인님도 그 친구처럼 가진 것 없어 두려움 없고, 욕심 없이 맑은 성정이겠네요.
'이 추운 세상의 한구석에' 그런 친구가 있어 얼마나 다행인가 하는 시인님의 심정이 느껴지네요.
'내가 이렇게 추운 거리를 지나온 걸 / 얼마나 기뻐하고 락단하고'
'락단하고'는 사전에 나오지 않습니다. 전후 맥락으로 보아 '안심하다' '다행으로 여기다'라는 뉘앙스가 풍기기도 하는 특별한 단어네요.
가무락조개는 '맑고 가난한' 나의 친구입니다.
'맑고 가난한' 친구끼리는 친구의 '맑고 가난한' 처지를 대번에 알아줍니다.
그래서 빚이 되어 '추운 거리'에 영합하여 살아가지 않고, 빚이 되지 않아 그 '추운 거리를 지나온' 나를 기뻐해줄 것이라고 하네요.
기뻐하고 안심하며 좋아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즈런히 손깍지벼개하고 누워서 / 이 못된 놈의 세상을 크게 크게 욕할 것이다'
'손깍지벼개'는 손깍지를 하고 머리 뒤에 베개처럼 괴는 것을 말하네요.
타원형으로 둥그런 가무락조개의 형상에서 '손깍지벼개'의 형상이 느껴지는 것도 같고요.
어물전에 가지런히(그즈런히) 놓여있는 가무락조개들이 보이는 것만 같네요.
'맑고 가난한 친구'는 나를 위해 '이 못된 놈의 세상을 크게 크게 욕할 것이다'라고 했네요.
내가 분한 일을 겪어 분하면 나와 더불어 화를 참지 않는 친구입니다.
'맑고 가난한 친구'는 맑고 가난해서 '이 못된 세상'을 향해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맑고 가난'해서 빼앗길 것도 없고 흠 잡힐 일일랑 하나도 없을 테니까요.
시인님은 빚을 얻을 수 없는 이 세상을 '이 못된 세상'이라고 했네요.
'이 못된 세상'은 사사로운 이익만 좇는 세상, 돈이 없으면 홀대받는 세상, 돈만 있으면 다 되는 그런 세상이겠지요?
그런 '못된 세상'에 결코 물들지 않으리라!
이런 시인님의 다짐이 들리는 것만 같네요.
맑고 가난한 삶이란 얼마나 부러움 없는 자유인지, 얼마나 외로움 없는 행복일까요?
그에 대해 시인님은 다른 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들은 가난해도 서럽지 않다
우리들은 외로워할 까닭도 없다
그리고 누구 하나 부럽지도 않다
▷백석 시 '선우사' 중에서
제목 '가무래기의 낙(樂)'의 의미가 다가오네요. '맑고 가난한 삶의 즐거움/편안함'이라는 의미 말입니다.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목욕'에서 백석 시인님의 시를 더 만나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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