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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스미기

박목월 시 가정 읽기

by 빗방울이네 2023. 5.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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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목월 시인님의 시 '가정'을 만납니다. 시인님이 퍼올려 주신 쓸쓸함과 따뜻함, 아픔과 다정함이 버무려진 사유의 우물물로 마음을 씻으며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박목월 시 '가정(家庭)' 읽기


가정(家庭)
 
- 박목월
 
지상(地上)에는
아홉 켤레의 신발.
아니 현관(玄關)에는 아니 들깐에는
아니 어느 시인(詩人)의 가정(家庭)에는
알 전등(電燈)이 켜질 무렵을
문수(文數)가 다른 아홉 켤레의 신발을.
 
내 신발은
십구문반(十九文半).
눈과 얼음의 길을 걸어
그들 옆에 벗으면
육문삼(六文三)의 코가 납짝한
귀염둥아 귀염둥아
우리 막내둥아.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얼음과 눈으로 벽(壁)을 짜올린
여기는
지상(地上).
 
연민(憐憫)한 삶의 길이어.
내 신발은 십구문반(十九文半).
 
아랫목에 모인
아홉 마리의 강아지야
강아지 같은 것들아.
굴욕(屈辱)과 굶주림과 추운 길을 걸어
내가 왔다.
아버지가 왔다.
아니 십구문반(十九文半)의 신발이 왔다.
아니 지상에는 
아버지라는 어설픈 것이
존재한다.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 「박목월 시 전집」(이남호 엮음·해설, 민음사) 중에서

 
사람들은 박목월 시인님(1915~1978)을 '나그네' '청노루' '윤사월' 같은 매우 절제된 언어로 자연을 노래한 서정시인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44세이던 1959년 발행한 두 번째 개인 시집 「난·기타」 이후 자신을 조용히 응시하는 내면적 성향이 그의 시 세계를 주도했다고 합니다.
 
목월에게 중요한 것은 언제나 내면이었고, 세상의 이런저런 일들은 항상 내면에서 변명과 이해와 해결과 만족을 구했으며, 그 과정이 곧 시 쓰기의 과정인 경우가 많았다. 목월의 내면적 눈길이 머문 곳은 우선 가난한 시인이요 무능한 가장으로서의 자기 자신이다.

- 「박목월 시 전집」 작품해설 '한 서정적 인간의 일상과 내면'(이남호 문학평론가) 중에서
 

2. '지상에는 아홉 켤레의 신발'


박목월 시인님의 시 '가정(家庭)'은 1961년 작품입니다. 그해 「현대문학」에 연작 시의 하나로 발표되었던 '가정'을 독립시킨 시입니다. 그의 세 번째 시집 「청담晴曇」(1964년 발행) 첫 시로 실려 있습니다.

시인님이 46세 즈음 쓴 시네요. 가장으로서의 박목월 시인님의 애환이, 이 세상 모든 아버지들의 노고가 고스란히 전해져 오는 것만 같은 시입니다.

지상(地上)에는 / 아홉 켤레의 신발

- 박목월 시 '가정' 중에서


이 시의 솟대 같은 첫 구절 좀 보셔요. 아홉 켤레의 신발이 있다고 합니다. 시인님이 책임져야 할 가솔이네요. 부모님과 아내, 그리고 장남 동규를 비롯, 장녀 동명, 차남 남규, 삼남 문규, 사남 신규 등 5명의 자식들, 그리고 자신, 이렇게 모두 9명입니다.

그런데 그 신발들이 '지상'에 있다고 하네요. 이때의 '지상'은 단순히 '땅 위'라는 말이 아니라 이 세상, 현실 세계를 말하는 것이네요. 이 광활하고 험난한 삶의 현장, 지상에 있는 아홉 켤레의 신발을, 그 신발의 주인들을 '십구문반'짜리 신발의 주인이 다 짊어지고 가야 하네요. 책임감과 엄숙함, 그리고 고달픔이 느껴집니다.

아니 현관(玄關)에는 아니 들깐에는 / 아니 어느 시인(詩人)의 가정(家庭)에는

- 박목월 시 '가정' 중에서


그 신발들이 '지상'에 있다고 했다가, '현관'이라고 했다가 '들깐'이라고 했다가 다시 '어느 시인의 가정'에 있다고 합니다. '들깐'은 경상도 방언으로 다용도실이나 창고를 의미합니다. '현관'이라는 근사한 용어를 쓰기엔 조금 민망한 가난한 공간이었던지 일상어였을 '들깐'이라는 용어로 고쳐 쓰고, '어느 시인의 가정'이라고 밝히는 시인에게서 다소 냉소적인 태도가 느껴집니다.

내 신발은 / 십구문반(十九文半)

-박목월 시 '가정' 중에서


우리는 이 구절에 이르러 문수가 다른 아홉 켤레의 신발 속에 있는 '십구문반'짜리 신발을 '발견'합니다. 이 당시에는 대부분 고무신을 신고 다녔습니다. 박목월 시인님의 신발 크기는 '십구문반'이었군요. '십구문반'짜리 신발 한 켤레가 환하게 클로즈업되어 우리 눈에 들어옵니다. 가까이 보니 어쩐지 먼지처럼 슬픔이 가득 스며있는 낡고 오래된 신발일 것만 같네요. 

눈과 얼음의 길을 걸어 / 그들 옆에 벗으면 / 육문삼의 코가 납짝한 / 귀염둥아 귀염둥아 / 우리 막내둥아

- 박목월 시 '가정' 중에서


그대도 이런 경험이 있지 않은지요? 퇴근해서 집 현관에 신발을 벗을 때, 거기에 '육문삼의 코가 납짝한' 막둥이의 앙증맞은 신발을 발견했을 때, '눈과 얼음의 길'에서 쌓였던 삶의 고달픔이 눈 녹아내리듯 사라지지 않던가요? '귀염둥아 귀염둥아 우리 막내둥아~~' 이렇게 아빠 미소가 절로 나오지 않던가요? 가족의 힘!

얼음과 눈으로 벽(壁)을 짜올린 / 여기는 / 지상(地上) // 연민(憐憫)한 삶의 길이어 / 내 신발은 십구문반(十九文半)

- 박목월 시 '가정' 중에서


눈과 얼음의 길을 하염없이 가야 하고, 또 얼음과 눈으로 짜올린 벽에 부딪히는 팍팍한 삶입니다. 시의 화자는 그런 삶의 길을 가는 것은 자신의 십구문반짜리 신발이라고 합니다. 나를 끌고 다니는 나, '십구문반'이 겪어야 할 현실의 냉혹함이 더욱 절절히 다가옵니다. 하루동안 험한 길을 정처 없이 다녔던 '십구문반'에서 흙먼지 내도 나고 땀냄새도 나네요. 
 

박목월시가정중에서
박목월 시 '가정' 중에서

 

 


3. ‘아버지가 왔다 십구문반의 신발이 왔다’


굴욕(屈辱)과 굶주림과 추운 길을 걸어 / 내가 왔다 / 아버지가 왔다 / 아니 십구문반(十九文半)의 신발이 왔다

- 박목월 시 '가정' 중에서


지금까지 서러움으로 부글거리던 우리의 내부가 팽창하여 극에 달합니다. 터질 것만 같네요. 굴욕과 굶주림과 추위를 참으며 하루를 건너온 내가 → 아버지가 → 십구문반의 신발이 드디어 '들깐'에 도착했네요. 세상의 모든 아버지시여! 우리는 여기서 두 손을 가만히 앞으로 모을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습니다.
 
미소하는 / 내 얼굴을 보아라

- 박목월 시 '가정' 중에서
 

그런 아픔을 간직하고도 아버지는 가족들에게 그것을 내색할 수 없습니다. '지상'의 싸움터에서 상처투성이로 너덜너덜해진 아버지이지만 가정으로 돌아오면 이렇게 넓고 따뜻한 가슴을 가진 '슈퍼맨' 아버지네요. 사랑합니다,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목욕'에서 박목월 시인님의 시 한 편 더 읽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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