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귀리차를 뜨겁게 한 잔 만들어 마시고 있습니다. 백석 시인님의 시를 한 편 읽고 나서 무척이나 귀리차를 마시고 싶었습니다. 백석의 시는 왜 이렇게 사람을 안달이 나게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늘도 백석의 품에 포옥 안겨 함께 마음목욕을 해보십시다.
1. '함남 도안'은 어떤 시일까요?
한반도의 지붕이라고 불리는 곳, 개마고원입니다. 평균 해발고도가 1,490m입니다. 한라산 높이(1,950m)를 견주어 생각해보니 정말 높은 곳이지요? 한반도에서 가장 추운 고원지대입니다. 개마고원은 부전고원이라고도 불립니다.
아래의 시는 백석 시인이 함흥에서 영어교사를 할 때 함흥과 부전을 잇는 신흥선 열차를 차고 신흥군의 부전호수를 여행하면서 쓴 시입니다.
부전호수는 일제가 1926년 부전강을 막아 5년만에 준공한 인공호수(해발 1,200)입니다. 부전강발전소를 만들기 위해서였지요. 그 전기로 흥남질소비료공장이 돌아갔다고 합니다.
이 시 제목에 나오는 도안은 당시 신흥군, 요즘의 부전군의 마을입니다. 부전호수가 있다는 점을 떠올려 주세요.
함남 도안
- 백석
고원선 종점인 이 작은 정거장엔
그렇게도 우쭐대며 달가불시며 뛰어오던 뽕뽕차가
가엾이 쓸쓸하니도 우두머니 서 있다
햇빛이 초롱불같이 히맑은데
해정한 모래부리 플랫폼에선
모두들 쩔쩔 끓는 구수한 귀리차를 마신다
칠성고기라는 고기의 쩜벙쩜벙 뛰노는 소리가
쨋쨋하니 들려오는 호수까지는
들쭉이 한불 새까마니 익어가는 망연한 벌판을 지나가야 한다
- 「백석의 노래」(김수업 지음, 휴머니스트) 중에서
2. 대한팔경의 하나 '부전고원' 이야기
'함남'은 함경남도, '고원선'은 시 원문에서는 '高原線'이라고 한자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개마고원, 즉 고원지대에 있는 철도노선을 말하겠네요. 도안에 있는 고원선(신흥선) 종점역의 작은 정거장 이야기네요.
이 시의 배경은 어떤 곳이었을까요? 1930년대 경성방송이 전국 청취자를 대상으로 명승지 선호도를 조사해 대한의 8대 명승지를 추렸는데 그것이 '대한팔경'입니다. 그 속에 이곳 부전고원이 들어갑니다. 부전고원은 험준고봉과 오색단풍으로 그 당시 전국 제일의 등산과 휴양, 피서지로 유명했다고 합니다.
그런 곳에, 그 첩첩산중까지 일제가 자원을 수탈하기 위해 철도를 깔아놓았군요. 그러니 불현듯 나타난 문명의 이기인 기차가 이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도대체 어울리는 사물이 아닌 듯합니다. 그래서 백석은 뽕뽕차라는 단어를 만들어 '우쭐대며 달가불시며 뛰어오던 뽕뽕차가' '가엾이 쓸쓸하니도 우두머니 서 있다'고 연민의 눈길을 보내고 있네요. 맙소사, 사람이 기차를 타고 내리는 플랫폼조차 해정한(맑고 깨끗한) 모래부리에 걸쳐 있군요.
이 시가 발표된 1939년은 이 일대가 일제에 의해 마구 개발된 이후 10여년 쯤 지난 시기입니다. 자신의 아름다운 삶터를 잃은 사람들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그런 사람들이 모래부리에 걸쳐 있는 플랫폼에서 '모두들 쩔쩔 끓는 구수한 귀리차를 마신다'고 합니다. 체념 속에 입을 꾹 다물고 속에 가득한 할말을 쟁여두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그 헤집어진 속을 쩔쩔 끓는 귀리차가 달래주었겠네요.
사람들은 귀리차를 목으로 삼키며 몸 옆에 일곱쌍의 아가미 구멍이 있는 부전호수의 '칠성고기'를 생각하고, 이 지역 특산물 들쭉술에 들어가는 '들죽'(들쭉나무 열매)이 까맣게 익어가는 것을 바라보며 희망를 버리지 않았을 겁니다.
백석은 그 '호수'까지는 우리 모두 이 '망연한 벌판을 지나가야 한다'고 합니다. 그 '호수'란 바로 자연과 더불어 자연답게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겠네요.
그 희한한 플랫폼에서 백석도 '쩔쩔 끓는 귀리차'를 마셨네요. 그러면서 예전처럼 칠성장어와 들쭉술과 함께 사람들이 평화롭게 사는 삶에 대해 생각했을 겁니다.
3. 뜨거운 귀리차 마시며 칠성장어를 생각하다
인터넷으로 볶은 귀리차를 주문해 보리차처럼 쩔쩔 끓여 마셔봅니다. 맑고 구수합니다. 그리고 시의 잔상 때문인지 몸과 마음 깊은 곳이 애연해집니다.
통일이 되면 백두산과 개마고원 일대가 우리나라 최대의 국립공원이 될 거라는 기대가 큽니다. 고원선 시발역 함흥 출신 실향민 가족인 문재인 전 대통령은 방에 개마고원 사진을 붙여두고 고향을 그리워하며 고원 트레킹을 꿈꾸었다고 합니다.
백석은 당신에게도 건너야할 망연한 벌판이 있지 않느냐고 말하는 듯합니다. 맞습니다. 그 그리운 곳에 가면 나만의 칠성장어를 만나게 되리라 기대하며 우리는 오늘도 그 길을 가고 있습니다. ‘많이 고단하시지요?’ 하면서 백석은 쩔쩔 끓는 귀리차 한 잔을 우리에게 건네줍니다. ‘속을 데워드릴 겁니다. 천천히 드셔 보십시오. 후후 불면서요.’라고 하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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