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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스미기

박인환 시 목마와 숙녀

by 빗방울이네 2023. 1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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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환 시인님의 시 '목마와 숙녀'를 만납니다. 이 시는 널리 애송되는 대표적인 낭송시입니다. 감정을 살려 천천히 낭송해 보면서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박인환 시 '목마와 숙녀' 읽기

 
목마와 숙녀(木馬와 淑女)
 
- 박인환(1926~1956, 강원도 인제)
 
한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生涯)와
목마(木馬)를 타고 떠난 숙녀(淑女)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木馬)는 주인(主人)을 버리고 그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傷心)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서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少女)는
정원(庭園)의 초목(草木) 옆에서 자라고
문학(文學)이 죽고 인생(人生)이 죽고
사랑의 진리(眞理)마저 애증(愛憎)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木馬)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歲月)은 가고 오는 것
한 때는 고립(孤立)을 피하여 시들어 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作別)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女流作家)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 등대(燈臺)에 ···
불이 보이지 않아도
그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未來)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木馬) 소리를 기억(記憶)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그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意識)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틈을 지나 청춘(靑春)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人生)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잡지(雜誌)의 표지(表紙)처럼 통속(通俗)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木馬)는 하늘에 있고
방울 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 바람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 「한국대표시인 101인선집 - 박인환」(박인환 지음, 문학사상, 2005년) 중에서
 

2. 상실과 절망, 그리고 허무에 대하여

 

박인환 시인님의 시 '목마와 숙녀'는 1955년 발행된 시인님의 첫 시집이자 마지막 시집 「選詩集(선시집)」에 실린 시입니다. 시인님 30세 즈음에 쓰인 시네요.
 
시인님의 청춘은 해방 공간의 어지러운 상황과 한국전쟁이라는 엄청난 폭력을 온몸으로 온마음으로 뚫고 나온 시간이었네요.
 
시집 「選詩集」의 '자서(自序)'에 시인님은 이렇게 썼습니다.
 
이 세대는 세계사가 그러한 것과 같이 참으로 기묘한 불안정한 연대였다.
그것은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고 성장해 온 그 어떠한 시대보다
혼란하였으며 정신적으로 고통을 준 것이었다.

- 위의 같은 책 중에서

 
전쟁으로 모든 것이 무너졌습니다. 그 시기에는 꿈과 희망보다 불안과 상실, 허무감이 사람들의 삶을 지배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렇게 모든 것이 무너지고 떠나버린 폐허의 광장을 홀로 걷고 있는 시인님의 쓸쓸한 뒷모습이 보이는 것만 같습니다. 
 
한잔의 술을 마시고 /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生涯)와 / 목마(木馬)를 타고 떠난 숙녀(淑女)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木馬)는 주인(主人)을 버리고 그저 방울소리만 울리며 /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 상심(傷心)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서진다

- 박인환 시 '목마와 숙녀' 중에서

 
영국 소설가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 1882~1941)는 이 시에 다가가는 나침반 역할을 합니다. 자전적 소설인 대표작 '등대로' 등을 남긴 그녀는 현대 심리소설의 기수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신경증을 앓아온 그녀는 2차 세계대전 발발 후 갈수록 심각해지는 전황, 그에 따른 정신적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강물에 스스로를 던져 비극적으로 삶을 마감했습니다. 전쟁의 공포가 그녀를 죽음으로 몰아간 것입니다.
 
시인님은 이 시의 도입부에서 참혹한 전쟁 속으로 휩쓸려간 버지니아 울프처럼 우리의 소중한 것들, 삶의 순수하고 아름다운 국면들, 그중에서도 특히 사랑들이 '주인을 버리고' '가을 속으로' 떠났다고 합니다. 상실과 절망, 허무감이 가득한 도입부입니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서진다'. 술잔에 천천히 술을 따르고, 그 술을 마시는 장면이 아주 감각적으로 다가옵니다. 투명하고 독한 술이 시인님과 우리의 상심한 가슴을 타고 내려가며 '화' 하고 부서지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지네요.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少女)는 / 정원(庭園)의 초목(草木) 옆에서 자라고 / 문학(文學)이 죽고 인생(人生)이 죽고
사랑의 진리(眞理)마저 애증(愛憎)의 그림자를 버릴 때 / 목마(木馬)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 박인환 시 '목마와 숙녀' 중에서

 
'내가 아는 소녀'가 아니라 '내가 알던 소녀'네요. 지금은 그 소녀가 없는 정황입니다. 전쟁 속에서 소녀는 어디로 사라졌을까요? 그래서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란다는 구절에 우리는 초록빛 슬픔 속으로 빠져드는 것만 같습니다.
 
이 시는 낭송시로 가장 많이 애송되어 온 시의 하나입니다. 낭송할 때, 목소리를 한껏 고조시켜 읊는 절정은 바로 여깁니다.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이 구절에 그렇게 감정이 고조되는 것은 왜일까요? 우리 주변의 소중한 많은 것이 사라질지라도 우리 삶의 요체라 할 사랑과 미움만은 간직하자는 시인님의 당부가 느껴지기 때문일까요? 흩어져 황폐화된 우리의 삶을 다시 뭉치게 하고 견디게 하는 힘은 서로 사랑하고 미워하는 일일 테니까요.
 

"불이보이지않아도"-박인환시'목마와숙녀'중에서.
"불이 보이지 않아도" - 박인환 시 '목마와 숙녀' 중에서.

 

 

3. '두 개의 바위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세월은 가고 오는 것 / 한 때는 고립(孤立)을 피하여 시들어 가고 / 이제 우리는 작별(作別)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 늙은 여류작가(女流作家)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 등대(燈臺)에 ··· / 불이 보이지 않아도 / 그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未來)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木馬) 소리를 기억(記憶)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 그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意識)을 붙잡고 /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 박인환 시 '목마와 숙녀' 중에서

 
여기부터 시의 무대 조명이 달라지네요. 이전의 어두운 빛이었던 시의 무대가 점점 밝은 빛으로 채워지기 시작합니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우리가 겪어야 할 참담한 시간이 지나가면 우리를 점령했던 비애도 지나가겠지요? 그러면 새로운 시간이 오겠지요? 
 
지금의 비관적(페시미즘)인 상황은 어쩌면 우리를 새로운 시간으로 이끌어줄 수 있을 것입니다.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우리 삶이 온통 고통에 압도당했을 지라도 그 고통의 의미를 잊지 않고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현실을 직시하자고 하네요.   
 
두 개의 바위틈을 지나 청춘(靑春)을 찾은 뱀과 같이 / 눈을 뜨고 한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人生)은 외롭지도 않고 / 그저 잡지(雜誌)의 표지(表紙)처럼 통속(通俗)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木馬)는 하늘에 있고 / 방울 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 가을 바람소리는 /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매어 우는데

- 박인환 시 '목마와 숙녀' 중에서

 
이 구절부터 시의 무대 조명이 더 환해지네요. 뱀은 '두 개의 바위틈을 지나' 자신의 허물을 벗습니다. 온몸을 바위틈에 밀착시켜 자신의 껍질을 벗는 행위는 과거의 시간을 지나 새로운 시간을 맞이하는, 새롭게 태어나는 행위입니다. 
 
바위처럼 무겁고 딱딱한 고통의 시간, 온몸으로 밀며 빠져나가야 한다고 하네요. 그러면 우리를 감싸고 있던 상실과 허무, 절망이라는 껍질이 벗겨지겠지요? 
 
이 시에는 '그저'라는 단어가 네 번 나옵니다.     
 
- 그저 방울소리만 울리며
- 그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 그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그저'는 '변함없이 이제까지' 또는 '별로 신기할 것 없이'라는 뜻입니다. 이 냉소적인 느낌의 부사는 시의 전체 분위기를 착 가라앉혀 세상을 보는 우리의 태도마저 시니컬하게 끌고 갑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와서 이렇게 우리를 다독입니다. 
 
'인생은 외롭지 않고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통속(通俗)'은 '세상에 널리 통하는 일반적인 풍속'을 말합니다. '잡지의 표지'가 통속하다는 것은 그만큼 일반 대중에게 쉽게 통한다는 말이네요.
 
시인님이 생각하는 인생은 그런 거라고 하네요. 타인과 지지고 볶으며 욕망이 뒤엉키는 통속한 것이라고 하네요. 상실과 허무와 절망에 빠져 있거나 홀로 고독하게 이상적인 것을 추구하며 세상 일에 초연한 그런 삶 말고요. 그저 사랑하며 때로 미워하며 둥글둥글 어울려 즐겁게 살아가는 삶이겠지요?

이 시의 마지막 무대는 소리로 가득 차오르네요. 목마의 딸랑거리는 방울소리와 흐느끼는 바람소리 말입니다. 이 그립고도 구슬픈 소리들은 아련히 먼 곳으로부터 점점 우리 쪽으로 크게 들려와 우리의 가슴으로 아프게 스며 차오르네요.
 
그러나 때때로 슬픔은 우리의 영혼을 맑고 환하게 씻겨주기도 하니 우리의 지친 영혼, 어서 어두운 계곡을 벗어나 찬란한 빛 속으로 나아갔으면요.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목욕'에서 박인환 시인님의 시 '세월이 가면'을 만나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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