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환 시인님의 시 '깃발'을 만납니다.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이라는 첫 구절로 유명한 시입니다. 시인님은 이 시를 통해 우리에게 어떤 말을 하고 싶었을까요? 함께 읽으며 마음을 맑히며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유치환 시 '깃발' 읽기
기(旗)빨
- 유치환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向)하야 흔드는
영원(永遠)한 노스탈쟈의 손수건
순정(純情)은 물껼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理念)의 표(標)ㅅ대 끝에
애수(哀愁)는 백로(白鷺)처럼 날개를 펴다.
아아 누구던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닯은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 「유치환 시선」(배호남 엮음, 지식을만드는지식, 2012) 중에서
유치환 시인님(호는 청마, 1908~1967)은 경남 거제 출신으로 1930년 「문예월간」에 '정적'을 발표하며 등단했습니다. 시인님은 1939년 첫 시집 「청마시초」 이후 시집 「생명의 서」 「울릉도」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등 14권, 산문집 「나는 고독하지 않다」 등을 발간했습니다. 서울시문화상, 아시아재단 자유문화상, 대한민국예술원상, 부산시문화상 등을 수상했습니다.
2. '소리 없는 아우성'의 뜻은?
유치환 시인님의 시 '깃발'은 1936년 1월 「조선문단」에 발표되면서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시인님 28세 즈음에 쓰인 작품이네요. 이 시는 3년 후 발간된 시인님의 첫 시집 「청마시초」에 수록됐습니다. 위에 소개된 시의 전문은 첫 시집에 수록된 그대로입니다. 시의 초본을 천천히 음미해보시기 바랍니다.
당시 이 시의 제목 '깃발'이 '기(旗)빨'로 표기된 점도 이채롭습니다. 국어사전에 보니 '깃발'은 '旗발'로 풀어지고, 깃대에 달린 천이나 종이로 된 부분이라고 설명되어 있네요. '기(旗)빨'이란 표기 자체에서 어떤 힘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 유치환 시 '깃발' 중에서
우리 시사(詩史)에서 가장 빛나는 첫 구절의 하나입니다. '소리 없는 아우성'이라 하네요. 깃발이 말입니다. 아우성 자체가 소리일 텐데 왜 소리 없는 아우성이라고 했을까요? 그대는 지금 바닷가 높은 언덕에서 펄럭이는 깃발을 보고 있습니다. 그대가 깃발 바로 아래에 있다면 깃발이 바람에 펄럭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 속의 깃발은 그대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져 있네요. 그래서 깃발이 펄럭이는 모습은 보이지만 그 소리가 그대에게 들리지 않습니다. 소리는 들리지 않고 펄럭임만이 감지되는, '소리 없는 아우성'입니다.
깃발이 바람을 받아 펄럭이는 모습은 무슨 소리인가를 외치는 것만 같습니다. 절규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애절하게 호소하는 것도 같네요. '소리 없는 아우성'이어서 우리가 느끼는 절박함은 더 강렬해지네요.
볼륨 기능을 무음 모드로 해둔 스크린 화면인 것만 같네요. 시인님은 28세 청년입니다. 일제 강점기이네요. 청년은 깃발처럼 아우성치고 있네요. 바람에 펄럭이는 깃발처럼 무음 모드로 몸부림치고 있는 것을 생생히 느낄 수 있네요. 지금이라도 누구라도 이렇게 무음 모드로 설정해둔 자신만의 꿈이 있으니까요.
3. 우리에게 저 높고 먼 곳을 바라보게 한 이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向)하야 흔드는 / 영원(永遠)한 노스탈쟈의 손수건
- 유치환 시 '깃발' 중에서
노스탤지어(nostalgia)는 고향을 몹시 그리워하는 마음, 또는 지난 시절에 대한 그리움을 말합니다. '소리 없는 아우성'이었던 깃발은 여기서는 '손수건'에 비유되고 있네요. 저 푸른 해원은 무얼까요?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곳 아닐까요? 억압과 굴종, 굴욕 없이 마음껏 나의 꿈을 펼칠 수 있는 곳 말입니다. 자연과 함께 자연스럽게 살았던 시절, 그런 시간과 장소 말입니다. 깃발은 그런 곳을 간절히 그리워하며 흔들리는 손수건으로 묘사되고 있네요. '영원한 노스탈쟈의 손수건'이라는 구절에서, 존재의 유한성으로 인간이 닿을 수 없는 어떤 아득한 영원성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아아 누구던가 / 이렇게 슬프고도 애닯은 마음을 /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 유치환 시 '깃발' 중에서
그렇네요. 깃발을 맨 처음 공중에 단, 그 고마운 이는 누구였을까요?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으로 주저앉지 않고 저렇게 높은 깃대 끝에 달아 우리를 펄럭이게 한 이는 누구였을까요? 절망과 고난 속에서도 곧게 높게 치솟아 우리에게 먼 곳을 가리켜 준 이 말입니다. 지금 여기 일상의 좁은 곳 말고, 멀고 높은 곳을 바라보게 해 준 이 말입니다.
그대도 지금 멀고 높은 곳을 바라보며 펄럭이고 있겠지요? 무음 모드로 말입니다.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목욕'에서 유치환 시인님의 시 '행복'을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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