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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스미기

천상병 시 만추

by 빗방울이네 2024. 1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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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병 시인님의 시 '만추(晩秋)'를 만납니다. 늦가을, 꽃의 일생을 떠올리며 삶의 길을 생각하게 하는 시입니다. 함께 읽으며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천상병 시 '만추(晩秋)' 읽기

 

만추(晩秋)

- 주일(主日)

 

천상병(1930~1993, 일본 출생, 창원 성장)

 

내년 이 꽃을 이을 씨앗은

바람 속에 덧없이 뛰어 들어가지고,

핏발 선 눈길로 행방을 찾는다.

 

숲에서 숲으로, 산에서 산으로,

무전여행을 하다가

모래사장에서 목말라 혼이 난다.

 

어린양 한 마리 돌아오다.

땅을 말없이 다정하게 맞으며, 

안락의 집으로 안내한다.

 

마리아.

나에게도 이 꽃의 일생을 주십시오.

 

▷천상병 시집 「새」(1971년 처음 나온 시집을 도서출판 '답게'가 번각해 출판. 2020년) 중에서.

 

2. '바람 속에 덧없이' 뛰어든 씨앗의 삶에 대하여

 

천상병 시인님의 시 '만추(晩秋)'는 1970년 2월 「시인(詩人)」에 발표된 시입니다.

 

시인님 40세 즈음이네요.

 

늦을 '晩(만)' 가을 '秋(추)'이니 시 제목 '만추(晩秋)'는 '늦은 가을'이라는 뜻입니다.

 

세상의 생명들이 사그라들어 궁지로 가는 듯 저무는 시간, 늦가을입니다.

 

그런 때에 시인님은 어떤 기도를 올렸을까요?

 

'내년 이 꽃을 이을 씨앗은 / 바람 속에 덧없이 뛰어 들어가지고 / 핏발 선 눈길로 행방을 찾는다'

 

분꽃이 떠오릅니다.

 

여름 내내 맺은 까만 씨 하나를 꽃자리에 올려놓고 어디론가 사라진 빨간 분꽃이 떠오릅니다.

 

아주 작은 수류탄 같이 생긴, 그 동그란 까만 씨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니 분꽃 만이 아니라 이 세상의 씨앗들은 이 만추의 시간에 모두 어디로 갔을까요?

 

'바람 속에 덧없이 뛰어 들어가지고'에서는 '덧없이'가 눈에 밟히네요.

 

아무 갈피를 잡을 수 없고 근거도 없다는 뜻의 부사입니다.

 

분꽃 씨앗에게는 내년에 다시 예쁜 분꽃으로 피어나리라는 아무 보장도 없었겠습니다.

 

우리네 삶도 '덧없이' 세상에 나서 '바람 속에 뛰어들어가지고' 살아가는 중이겠지요?

 

그렇게 '덧없이 뛰어 들어가지고' 세상 어느 곳을 헤매고 있을까요?

 

세상의 바람에 휘날려 어느 후미진 구석에 박혀 있을까요?

 

누군가에게 먹혀 어느 먼 곳으로 이동해 그곳에서 웅크리고 있을까요?

 

분꽃의 씨앗 말입니다.

 

아니 그대, 그리고 빗방울이네 말입니다.

 

'숲에서 숲으로, 산에서 산으로 / 무전여행을 하다가 / 모래사장에서 목말라 혼이 난다'

 

씨앗의 '무전여행'이라는 말은 참으로 애틋한 말이네요.

 

'무전여행'은 돈도 없이 길을 떠나 얻어먹으면서 다니는 여행을 말합니다.

 

이 구절에서는 우리 좋은 시인님이 생각납니다.

 

지인들 만날 때마다 막걸리값 달라고 졸랐다던 천상병 시인님 생각나네요.

 

그렇게 세상을 무전여행 하듯 살다 떠난 천사 같은 시인님 생각이 나네요.

 

'모래사장에서 목말라 혼이 난다'에서 정신이 번쩍 듭니다.

 

'혼이 나다'는 '무척 놀라거나 당혹스러울 정도로 된통 당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된통 당하면 혼이 난다는 뜻이네요.

 

생명에서 혼이 나지 않으면 되겠는지요? 

 

아무 혼이 없이 살면 되겠는지요?

 

그러니 '모래사장에서 목말라 혼이 난다'라는 구절에서는 혼이 나는 조건을 생각해 보게 됩니다.

 

그 조건은 악조건이네요. 혼을 틔우는 것은 좋은 조건이 아니라 악조건이네요.

 

물 한 방울 없는 모래사장 같은 곳 말입니다.

 

그러니 모래사장은 얼마나 혼을 틔우기 좋은 조건이겠는지요?

 

'어린양 한 마리 돌아오다 / 땅을 말없이 다정하게 맞으며 / 안락의 집으로 안내한다'

 

그렇게 물 한 방울 없는 모래사장, 살벌한 세상의 허허벌판을 헤매는 어린양이네요.

 

씨앗 말입니다. 아니, 그대 그리고 빗방울이네 말입니다.

 

살아내느라, 목마르고 배 고팠고 길을 잃기도 했습니다.

 

'어린양 한 마리 돌아오다'라는 구절에서 그 '어린양'을 가슴에 품고 주고 싶어 집니다.

 

고맙다 애썼다 장하다

나는 네가 익어 떨어질 때까지

살아 나온 그 마음을 안다

- 박노해 시 '밤나무 아래서' 중에서

 

오, 누군가 이렇게 다정하게 말해주며 여윈 등을 쓸어준다면!

 

"마리아_나에게도_이_꽃의_일생을_주십시오"-천상병_시_'만추'_중에서.
"마리아. 나에게도 이 꽃의 일생을 주십시오" - 천상병 시 '만추' 중에서.

 

 

3. '나에게도 이 꽃의 일생을 주십시오'라는 만추의 기도

 

천상병 시인님 시 '만추(晩秋)'의 마지막 2행을 만납니다.

 

'마리아 / 나에게도 이 꽃의 일생을 주십시오'

 

우주의 어머니여, 대지여.

 

'나에게도 이 꽃의 일생을 주십시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겠습니다.

 

그저 '바람 속에 덧없이 뛰어' 드는 생(生)이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아무 가진 것 없이 '무전여행'을 하는 삶일지라도 불평하지 않겠습니다.

 

'모래사장에서 목말라 혼이 난다' 해도 절망하지 않겠습니다.

 

그 혼으로 일어서서 삶 속을 걸어가겠습니다.

 

'마리아 / 나에게도 이 꽃의 일생을 주십시오'

 

고난 속에서도 '내년 이 꽃을 이을 씨앗'이 되겠다는 시인님의 마음이 환하게 다가오네요.

 

'꽃의 일생'으로 살겠다는 시인님의 햇살 같은 마음이 전해져 오네요.

 

무욕의 삶, 천성 그대로의 삶, 타인을 환하게 하는 삶, 그런 '꽃의 일생'을 살다 간 시인님의 아이 같은 웃음이 떠오르네요. 

 

박진규 시인님의 시 '꽃처럼'을 함께 읽으며 '꽃의 일생'을 생각해 보는 만추(晩秋)의 밤입니다.

 

언제 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

어느 날 돌아보면 문득 피어 있다

절벽에서도 눈 얼음 속에서도

때가 되면 꽃 핀다

깊은 숲 속이나 제왕의 수반(水盤)에서도

그저 타고난 모습으로 핀다

피어있는 동안 타인(他人)이 환하다

오로지 그러다가

어느 날 조용히 사라진다

그리하여 열매가 생긴다

꽃은 모르는 열매가 생긴다

- 박진규 시 '꽃처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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