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성 시인님의 시 '11월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을 만납니다.
11월의 쓸쓸한 우리네 가슴에 따뜻한 불씨를 넣어주는 시입니다.
함께 읽으며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정희성 시 '11월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읽기
11월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정희성(1945년~ , 경남 창원)
11월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빛 고운 사랑의 추억이 남아 있네
그대와 함께한 빛났던 순간
지금은 어디에 머물렀을까
어느덧 혼자 있을 준비를 하는
시간은 저만치 우두커니 서 있네
그대와 함께한 빛났던 순간
가슴에 아련히 되살아나는
11월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빛 고운 사랑의 추억이 나부끼네
※ 아메리카 원주민 아라파호족은 11월을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이라 부른다.
▷정희성 시집 「돌아다보면 문득」(창비, 2008년) 중에서.
2. 11월은 혼자가 아니라고 토닥여주는 시
시 '11월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은 2008년에 나온 정희성 시인님의 시집 「돌아다보면 문득」에 실린 시입니다.
시인님 60대 초반 즈음의 시네요.
그런 시인님에게 묻고만 싶습니다.
이 쓸쓸한 11월을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지요?
'11월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이 구절을 만나는 순간, 얼마나 안심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봄 여름을 거쳐 쇠락과 소멸의 시간 11월, 세상의 빛나던 것들이 모두 다 사라진 줄로만 알았습니다.
갈색이나 회색 질감의 11월은 우수와 애상, 공허와 비애의 물감으로 가득한 줄로만 알았습니다.
누군가 온 세상을 떠 매고 어디론가 사라져 나만 덩그러니 남게 된 11월인 줄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11월에는 많은 것이 사라지기는 하겠지만, 그렇다고 모두 다 사라지지는 않는다고 하네요.
‘11월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시인님이 시 맨 아래에 적어둔 메모에서 밝혔듯이, 이 문장은 아메리카 원주민 아라파호족이 11월을 부르는 문장입니다.
11월을 '11월'이라 하지 않고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이라 부르는 마음을 떠올려 봅니다.
자연 속에서 자연의 일부로 자연에 밀착하여 살아가는 원주민들에게 11월은 더 큰 상실과 슬픔의 시간이었겠지요?
그러나 이들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이라고 11월을 호명하며 저마다의 공허한 마음을 달랬을 것만 같습니다.
시인님도 그런 텅 빈 마음이 되어 우리를 달래주고 있네요.
이렇게요.
'빛 고운 사랑의 추억이 남아 있네 / 그대와 함께한 빛났던 순간 / 지금은 어디에 머물렀을까'
'그대'마저 떠나고 없는 11월의 시간입니다.
그래서 모두 다 사라진 듯 세상이 아득했는데, 시인님은 '그대와 함께 한' '사랑의 추억'이 남아 있다고 하네요.
그 시간은 '빛 고운' 시간, '빛났던' 시간이라고 합니다.
그냥 잊고 지나칠 뻔하였습니다.
그대와 함께 쌓은 우리의 추억이 어딘가에 남아 있었다는 것을요.
추억이 사라지지 않고 어딘가에 머물고 있다는 말은 얼마나 안심이 되는 말인지요.
3. 안치환의 아름다운 노래 '11월'로 태어난 시
'어느덧 혼자 있을 준비를 하는 / 시간은 저만치 우두커니 서 있네'
이 구절 속의 '시간'을 '나무'로 읽으면서 11월의 나무를 생각합니다.
'어느덧 혼자 있을 준비를 하는 / 나무는 저만치 우두커니 서 있네'
11월이 오기 전부터 나무들은 나뭇잎들을 떨어뜨리기 시작했습니다.
나뭇잎들을 떨어뜨리지 않으면 겨울을 견디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나뭇잎들을 떨어뜨리면 뿌리에서 잎까지 이어지는 물길이 닫힙니다.
그렇게 나무는 혼자 있을 준비를 해왔습니다.
얼지 않기 위해 마른 몸으로 우두커니 서 있는 11월의 나무를 생각합니다.
'어느덧 혼자 있을 준비를 하는 / 시간은 저만치 우두커니 서 있네'
우리도 그렇게 우두커니 서 있는 고독한 존재라는 말일까요?
나무처럼요.
그래서 나무처럼 '혼자 있을 준비'를 하며 겨울을 맞아야 한다는 말일까요?
얼마나 힘든 시간이 기다리고 있을까요?
정체 모를 두려움과 외로움에 휩싸여 누구라도 흔들리는 11월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나무처럼 이런저런 세상사 훌훌 떨치고 홀로 외로움을 견뎌야 하는 11월이네요.
그래도 '그대와 함께한 빛났던 순간'이 가슴에 남아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요?
'그대와 함께한 빛났던 순간 / 가슴에 아련히 되살아나는
11월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 빛 고운 사랑의 추억이 나부끼네'
쓸쓸하고 막막할지라도 텅 빈 가슴은 아니라고 시인님은 11월의 우리를 다독여 주네요.
겨울을 견딜 수 있는 따뜻한 불씨를 가슴에 안고 있다고요.
'가슴에 아련히 되살아나는' '빛 고운 사랑의 추억' 말입니다.
이 시는 안치환 가수님이 곡을 붙여 '11월'이라는 아름다운 노래가 되었습니다.
이 노래의 도입부는 시와 같이 이렇게 시작됩니다.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 빛 고운 사랑의 추억이 남아 있네 ~♪ 으음음~ ♪'
이렇게 두 번째 소절 끝에 '으음음~'이라고 운이 들어가네요.
-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니야. 빛 고운 사랑의 추억이 남아 있잖아, 으음?
이렇게 시와 노래는 텅 빈 11월의 우리를 다독여주네요.
아메리카 원주민의 12월 명칭은 '침묵하는 달'이라고 합니다.
그리하여 부디 우리 모두 무사히 겨울을 지나 봄으로 갈 수 있기를!
외로운 겨울일지라도 부디 우리가 견딜 수 있을 만큼만 외롭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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