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승 시인님의 시 '슬픔으로 가는 길'을 만납니다.
시인님은 왜 기쁨으로 가지 않고 슬픔으로 간다고 하는 걸까요?
함께 읽으며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정호승 시 '슬픔으로 가는 길' 읽기
슬픔으로 가는 길
정호승(1950년~ , 경남 하동 출생 대구 성장)
내 진실로 슬픔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슬픔으로 가는 저녁 들길에 섰다
낯선 새 한 마리 길 끝으로 사라지고
길가에 핀 풀꽃들이 바람에 흔들리는데
내 진실로 슬픔을 어루만지는 사람으로
지는 저녁해를 바라보며
슬픔으로 걸어가는 들길을 걸었다
기다려도 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는 사람 하나
슬픔을 앞세우고 내 앞을 지나가고
어디선가 갈나무 지는 잎새 하나
슬픔을 버리고 나를 따른다
내 진실로 슬픔으로 가는 길을 걷는 사람으로
끝없이 걸어가다 뒤돌아보면
인생을 내려놓고 사람들이 저녁놀에 파묻히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 하나 만나기 위해
나는 다시 슬픔으로 가는 저녁 들길에 섰다
▷정호승 시집 「슬픔이 기쁨에게」(창비, 2014년 개정 2판 1쇄) 중에서.
2. 정호승 시인의 첫 시집 첫 시는?
정호승 시인님은 신춘문예 3관왕입니다.
한국일보(1972년 동시), 대한일보(1973년 시), 조선일보(1982년 단편소설) 신춘문예에 잇달아 당선했습니다.
시인님은 29세 때인 1979년 첫 시집 「슬픔이 기쁨에게」를 창비시선 19번으로 발간합니다.
이 첫 시집을 구해 살펴보니, 대한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인 '첨성대'를 비롯 모두 68편의 시가 실려 있네요.
그 첫 시집의 첫 시가 바로 오늘 만나는 '슬픔으로 가는 길'입니다.
시인님은 '슬픔으로 가는 길'을 첫 시로 걸어놓고는 그 뒤에 잇달아 '슬픔을 위하여', '슬픔은 누구인가', '슬픔이 기쁨에게', '슬픔 많은 이 세상도' 같은 시들을 배치해 두었네요.
이처럼 '슬픔'이 제목에 들어있는 시 다섯 편을 첫 시집 앞쪽에 배치해 둔 것을 보니 시인님이 얼마나 슬픔을 골똘히 생각하고 귀하게 여기고 사랑하는지 느낄 수 있겠습니다.
첫 시는 첫 시집을 내는 시인님의 두근거리는 마음이 담겨있는 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마음은 앞으로 어떤 시를 쓰고 싶다는, 또는 어떤 삶을 살고 싶다는 '새내기' 시인님의 다짐이기도 할 것입니다.
'내 진실로 슬픔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 슬픔으로 가는 저녁 들길에 섰다'
첫 시집 첫 시의 첫 구절입니다.
우리 모두 기쁨이 좋고 기쁨을 사랑하고 기쁨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믿을 때 시인님은 '진실로 슬픔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선언' 하시네요.
이 구절은 바로 시인님이 자신에게 하는, 삶의 길에 대한 엄숙한 선언으로 느껴집니다.
세상의 슬픔을 어루만지는 사람이 되겠다고, 그러기 위하여 슬픔을 사랑하고 슬픔 쪽을 향하여 걸어가겠다고 합니다.
'자비(慈悲)'
'자비롭다' 할 때의 '자비'라는 단어가 떠오르네요.
'자비(慈悲)'는 사랑 '慈(자)'와 슬플 '悲(비)'로 구성된 단어입니다.
'悲(비)'는 '슬프다, 서럽다, 슬픔, 비애' 같은 뜻과 함께 '가엾이 여기는 마음, 가엾게 여겨 은혜를 베푸는 일'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비'는 타인을 깊이 사랑하고 가엾게 여기는 것을 말합니다.
타인을 가엾게 여겨 은혜를 베푸는 '자비'의 근본 감정이 바로 슬픔이네요.
내 마음속에 이 슬픔이 그렁그렁 넘쳐흘러야 나의 마음과 타인의 마음은 서로 페어링 되는 걸까요?
시인님도 그런 마음이겠지요? 시인님도 그런 그렁그렁한 가슴을 안고 '슬픔으로 가는 저녁 들길'로 가고 있겠지요?
그 길은 어떤 길일까요?
'낯선 새 한 마리 길 끝으로 사라지고 / 길가에 핀 풀꽃들이 바람에 흔들리는데
내 진실로 슬픔을 어루만지는 사람으로 / 지는 저녁해를 바라보며 / 슬픔으로 걸어가는 들길을 걸었다'
그 '저녁 들길'은 외롭고 쓸쓸한 길이네요.
새도 사라지고 저녁의 스산한 바람에 풀꽃들이 흔들리는 그런 길, 어떤 슬픔이 한쪽 구석에서 혼자 웅크리고 있을 것만 같은 그런 길 말입니다.
첫 구절의 '진실로 슬픔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했던 '나'는 여기서는 '내 진실로 슬픔을 어루만지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슬픔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그 슬픔에 다가가 어루만지는 사람이 되겠다고 하네요.
'슬픔으로 걸어가는'. 슬픔이 되어 간다는 느낌과 슬픔을 향해 간다는 뉘앙스가 겹쳐져 잔잔한 울림이 번져 나오는 구절이네요.
고독한 '저녁 들길'을 '슬픔으로 걸어가는' 시인님의 마음에서 진리를 찾아가는 구도자(求道者)의 모습이 느껴지기도 하고요.
'기다려도 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는 사람 하나 / 슬픔을 앞세우고 내 앞을 지나가고
어디선가 갈나무 지는 잎새 하나 / 슬픔을 버리고 나를 따른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슬픔을 앞세우고 내 앞을' 지나갔을까요?
얼마나 많은 순간, '슬픔을 앞세우고 내 앞을' 지나가는 사람을 모르고 지나쳤을까요?
'내 앞'을 지나가는 사람이 '슬픔을 앞세우고'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안다는 마음은 얼마나 자비로운 마음인지요?
그런 사람의 마음에는 그렁그렁한 슬픔이 가득 차 있다는 말일 테니까요.
그런 사람은 '지는 잎새 하나'가 굴러가는 소리도, 그 마음도 선명하게 느낄 수 있는 사람이겠습니다.
3.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내 진실로 슬픔으로 가는 길을 걷는 사람으로 / 끝없이 걸어가다 뒤돌아보면
인생을 내려놓고 사람들이 저녁놀에 파묻히고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 하나 만나기 위해
나는 다시 슬픔으로 가는 저녁 들길에 섰다'
시 '슬픔으로 가는 길'의 마지막 구절에 등장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그 사람은 바로 시인님이 사랑하는 사람일 텐데요, 과연 어떤 사람을 말할까요?
시인님의 다른 시에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만나봅니다.
나는 눈물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 나는 눈물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방울 눈물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 기쁨도 눈물이 없으면 기쁨이 아니다
- 정호승 시 '내가 사랑하는 사람' 중에서.
시인님이 사랑하는 사람은 눈물이 있는 사람, 눈물을 사랑하는 사람, 그리하여 마침내 '한 방울 눈물이 된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에 대한 정의입니다.
시인님이 '슬픔으로 가는 저녁 들길'에 선 것은 눈물이 있는 사람, 눈물을 사랑하는 사람, '한 방울 눈물이 된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이겠지요?
이렇게 끝없이 슬픔 쪽으로 걸어가겠다는 시인님이네요.
그렇게 슬픔으로 걸어가는 시인님도 눈물이 있는 사람, 눈물을 사랑하는 사람, '한 방울 눈물이 된 사람'이겠지요?
'내 진실로 슬픔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시인님이 첫 시집 첫 시에 걸어놓은 다짐을 다시 새겨봅니다.
슬픔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겠다는 마음은 얼마나 높고 높은 것인지요.
슬픔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겠다는 마음은 삶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일 것입니다.
'내 진실로 슬픔을 어루만지는 사람으로'
슬픔을 어루만지는 사람이 되겠다는 마음은 세상에 태어나 애면글면 살아가고 있는 모든 생명을 가여이 여기는 자비로운 마음일 것입니다.
이렇게 슬픈 사람들의 다정한 벗이 되어 걸어가겠다는 시인님의 첫 다짐은 얼마나 뜨겁고 뜨거운 것인지요.
그동안 기쁨쪽으로 걸어가려고 한 마음, 기쁨만을 추구해 온 마음을 돌아보게 되네요.
그러니 새삼 세상이 아릿한 슬픔으로 가득 차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그 슬픔의 물상들에게 다가가서 어깨를 토닥여주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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