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육사 시인님의 시 '꽃'을 만납니다.
시인님이 중국 북경 감옥에서 숨지기 전 쓴 유서 같은 시입니다.
이활(李活)이라는 본명 대신 감옥 수인번호(264)를 이름으로 삼아 평생 일제에 항거했던 시인님의 마지막 시입니다.
함께 읽으며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이육사 시 '꽃' 읽기
꽃
이육사(1904~1944, 경북 안동)
동방은 하늘도 다 끝나고
비 한 방울 나리잖는 그때에도
오히려 꽃은 빨갛게 피지 않는가
내 목숨을 꾸며 쉬임 없는 날이여
북(北) 쪽 쓴드라에도 찬 새벽은
눈 속 깊이 꽃 맹아리가 옴자그려
제비 떼 까맣게 날라오길 기다리나니
마침내 저바리지 못할 약속(約束)이여
한 바다복판 용솟음치는 곳
바람껼 따라 타오르는 꽃성(城)에는
나비처럼 취(醉)하는 회상(囘想)의 무리들아
오늘 내 여기서 너를 불러 보노라
▷「육사시집(陸史詩集)」(이육사 지음, 서울출판사, 1946년) 원본('문학사상사'가 묶은 원본전집) 중에서.
2. 감옥에서 쓴 이육사 시인의 유서 같은 시 '꽃'
위의 「육사시집(陸史詩集)」은 이육사 시인님이 1944년 돌아가시고 난 2년 뒤인 1946년 발간된 유고시집입니다.
이 유고시집에는 모두 20편의 시가 실려 있습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시 '청포도' '절정' '광야'도 이 시집에 실려 있습니다.
오늘 만날 시 '꽃'은 이 시집의 맨 마지막 시로 실려 있네요.
시 '꽃'이 처음 발표된 때의 원문은 어떤 모습일까요?
이 글에서는 「원전 주해 이육사 시선집」(박현수 지음, 예옥, 2008년)에 실려 있는 시의 원문(각 시행의 아래 붉은 글자)을 중심으로 '꽃'을 감상해 봅니다.
원문은 처음 발표되던 때(「자유신문」, 1945. 12. 17)의 시 그대로입니다.
비교해 보니, 이 원문이 「육사시집」에 실리면서 몇 군데가 고쳐졌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시 '꽃'은 언제 쓰인 시일까요?
위 책에 실린 박훈산 님의 '항쟁의 시인-육사의 시와 생애'라는 글(1956. 5. 25)을 읽어봅니다.
이에 따르면, 시 '광야'는 "서울서 피검되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나게 된 북경으로 압송 도중 찻간에서 구상되었다."라고 합니다.
그리고 시 '꽃'은 "북경형무소에서 옥사하기 전에 쓰인 유고."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시 '꽃'과 '광야'는 시인님 생애 마지막 시간에 쓰인 작품이네요.
시인님이 돌아가시고 난 다음 해, 동생(이원조)이 「자유신문」에 이 시 '꽃'과 '광야'를 함께 발표해 처음 이 시들이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일제에 항거하여 40년이라는 짧은 생애에 무려 17번이나 감옥생활을 해야 했던 독립투사 시인님입니다.
중국에서 항일투쟁을 하다 북경감옥에 수감되어 차가운 감방에서 마지막으로 시 '꽃'을 쓰셨네요.
그러면 시 '꽃'은 시인님의 유서 같은 시네요.
'동방은 하늘도 다 끝나고 / 비 한 방울 나리잖는 그때에도'
'동방은 하늘도 다 끗나고 / 비 한 방울 나리쟌는 그따에도'
'동방'은 어느 곳을 말할까요?
뒤의 2연에 나오는 추운 곳의 상징으로 쓴 '쓴드라(툰드라)'에 대비한 상징으로 더운 곳, 아시아의 더운 사막지역으로 새깁니다.
'동방'과 '쓴드라' 모두 일제 식민 지배 하에 있던 우리 민족의 암울한 시간을 상징합니다.
시 속의 '동방'이 직접적으로 가리키는 곳은 광활한 열대 사막의 나라일까요?
'하늘도 다 끝나고'. 하늘의 보살핌이라곤 없는 것 같은 황폐한 곳 말입니다.
원문의 '비 한 방울 나리쟌는 그따에도'라는 구절은 시집에 실리면서 '비 한방울 나리잖는 그때에도'로 고쳐졌네요.
그런데 맥락상 '그때에도'보다는 '그따에도(그땅에도)'가 더 어울리는 것만 같습니다.
'그따에도'로 읽으니 몹시 메마른 땅이라는 환경이 도드라지네요.
'오히려 꽃은 빨갛게 피지 않는가 / 내 목숨을 꾸며 쉬임 없는 날이여'
'오히려 꼿츤 밝아케 되지안는가 / 내 목숨을 꾸며 쉬임업는 날이며'
'피지 않는가' 구절보다 원문의 '되지안는가'가 더 좋네요.
둘 다 빨갛게 핀다는 뜻이지만, '된다'에는 꽃이 피어나는데 극한의 땅 '동방'에서는 그 빛이 더 빨갛게 '된다'는 의미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칸나꽃이 떠오르는 구절입니다. 뜨거운 여름날 꽃촉을 내민 칸나 말입니다.
이 빨강은 메마름과 뜨거움이, 매우 척박한 환경이 만들어낸 색인 것만 같습니다.
모진 세상을 향하여 무슨 할 말이 있는 것만 같은 검붉은 칸나입니다.
'내 목숨을 꾸며 쉬임업는 날이며'
'내 목숨을 꾸며'에서 '꾸며'를 '꿈꾸다'의 '꾸다'로 보면, '내 목숨'이 참으로 제대로 사는 날을 갈망하는 시인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네요.
시인님 고향(안동)을 떠올리며, '꾸며'를 '꼬다'의 방언(경북)으로 새겨보니 시가 더욱 애절해집니다.
'내 목숨을 꼬며 쉬임없는 날이며'
이는 그냥 평범하게 살아가는 목숨이 아니네요. '내 목숨을' 새끼줄 꼬듯 꼬며 목숨 속의 에너지를 다 짜내며,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온몸이 꼬이는 고통을 견디며 치열하게 항거하는 삶이라는 느낌이 가슴으로 안겨옵니다.
그런 날이 '쉬임없는 날'이라고 합니다. 시인님이 40 평생을 거의 감옥에서 지냈다는 사실을 떠올리니 우리 마음에 소용돌이가 이는 것만 같습니다.
그렇게 척박한 땅에 피는 꽃은 그냥 빨강이 아니라 더 빨간 꽃이 되듯, 일제에 항거하는 시인님 자신의 기상과 절개도 더 강해진다는 뜻이 '꽃' 1연에 스며 물들어 있었네요.

3. 40 평생 17번이나 투옥된 시인이 '꽃 피운 것'에 대하여
'북(北)쪽 쓴드라에도 찬 새벽은 / 눈 속 깊이 꽃 맹아리가 옴자그려'
'北쪽 「쓴도라」에도 찬 새벽은 / 눈 속 깁히 꼿 맹아리가 옴작어려'
'쓴드라(툰드라)'는 북극해 근처 연중 눈과 얼음으로 덮인 거친 벌판입니다.
'맹아리'는 알갱이의 방언(경북)입니다. 꽃 맹아리는 꽃 알갱이, 즉 꽃의 씨앗을 말하겠습니다.
'옴작어려'는 꽃씨가 옴지락거린다는 뜻이겠지요?
'찬 새벽은 눈 속 깊이 꽃 맹아리가 옴작어려'
눈과 얼음으로 덮인 툰드라의 시간, 그것도 차가운 새벽이네요.
그런 새벽에도 꽃씨가 눈 속 깊이 옴지락거린다는 말은 얼마나 우리 정신을 서늘하게 하는지요?
멈출 수 없는 생명의 끈질김, 피어날 수밖에 없는 자연의 법칙을 떠올리게 하는 구절입니다.
'제비 떼 까맣게 날라오길 기다리나니 / 마침내 저바리지 못할 약속(約束)이여'
'제비 떼 까마케 나라오길 기다리나니 / 마츰내 저버리지 못할 約束이며!'
눈과 얼음으로 덮인 동토의 '찬 새벽' '눈 속 깊이 꽃맹아리'가 주어입니다.
그 눈 속의 꽃씨가 '제비 떼 까마케 나라오길' 기다린다고 하네요. 꽃씨가 꽃으로 피어날 봄날을 말입니다.
그렇게 오는 봄날을 누가 멈출 수 있겠는지요?
'마츰내 저버리지 못할 約束이며'. '눈 속 깊이' 묻힌 '꽃맹아리'의 개화를 누가 막을 수 있겠는지요?
2연은 조국 광복의 그날은 필연적으로 오게 될 약속이라는 시인님의 선명한 선언(!)이네요.
눈 속에 묻힌 꽃씨가 봄이 되면 눈을 뚫고 올라와 개화하듯 말입니다.
그런데요, 앞의 1연의 마지막 구절 '날이며'와 이 2연의 마지막 구절 '약속이며'는 시집에 실리면서 각각 '날이여'와 '약속이여'로 고쳐져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원문을 살려 '날이며'와 '약속이며'로 읽습니다. 이럴 때 시인님이 손가락을 꼽으며 애절하게 간구하는 갈망의 마음이 더 절절히 다가옴을 느낍니다.
'한 바다복판 용솟음치는 곳 / 바람껼 따라 타오르는 꽃성(城)에는'
'한 바다 복판 용소슴 치는곧 / 바람결 따라 타오르는 꼿城에는'
이 시의 제목이 '꽃'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면서 마지막 연을 만나봅니다.
꽃이라도 '비 한 방울 나리쟌는 그따에도' 오히려 더 빨갛게 되는 꽃입니다.
꽃이라도 동토의 땅 '눈 속 깁히' 옴작거리는 꽃 맹아리의 꽃입니다.
마지막 연에 이르러 그 꽃이 활짝 피었네요. 그 꽃이 피어 '꽃성', 꽃대궐을 이루었네요.
그 꽃은 모진 시련과 절망의 시간, 주권을 빼앗긴 일제 강점기를 견디고 핀 꽃, 바로 조국 광복입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일까요?
이 시를 쓰고 있을 때 시인님은 광복을 위해 항거하다 감옥에 갇혀 있는 몸입니다.
그러니까 이 마지막 연에서 시인님은 감옥에 갇혀 조국의 광복을 떠올리고 있는 중이네요. 꿈결처럼요.
절망적인 환경에서도 꼭 피어나고 마는 꽃처럼, 아니 절망적일수록 더 붉게 피어나는 꽃처럼 언젠가는 기필코 오고 말 광복이니까요.
'나비처럼 취(醉)하는 회상(囘想)의 무리들아 / 오늘 내 여기서 너를 불러 보노라'
'나븨처럼 醉하는 囘想의 무리들아 / 오날 내 여기서 너를 불러보노라'
'陸史李活氏今月十六日別世'. 이육사 시인님(본명 이활·李活)의 죽음을 알리던 부고(訃告)입니다.
1944년 1월 16일 새벽, 베이징의 어느 감옥(베이징주재 일본총영사관 감옥일 듯)에서 순국.
▷「새로 쓰는 이육사 평전」(김희곤 지음, 지영사, 2000년)의 '이육사 연보' 중에서.
시인님이 돌아가신 때는 겨울의 새벽이네요. 그것도 겨울날의 차갑고 외로운 감옥 안이었네요.
그 차갑고 외로운 감방에서 시 '꽃'의 마지막 연을 쓰고 있는 시인님을 상상합니다.
'나븨처럼 醉하는 囘想의 무리들아'.
'醉(취)'는 '취하다, 지나치게 좋아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광복의 환희를 누리는 민족의 환한 표정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囘想(회상)'의 '囘'는 돌아올 '回(회)'와 같은 한자입니다.
회상은 지난 일을 돌이켜 생각하는 것입니다.
광복을 이미 지난 일로 두고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시인님이 회상하고 있는 장면이네요.
시인님은 차가운 감방에서 조국 광복의 시간을 떠올리고 있는 것입니다.
시인님 자신은 광복을 맞는 그 '무리'에 없는 뉘앙스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에서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듯한 어조가 느껴지네요.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오날 내 여기서 너를 불러 보노라'
광복의 시간에 자신이 없는 것에 대한 어떤 원통함이나 후회나 아쉬움 대신 자애로움과 넉넉함, 그리고 가슴 벅찬 느꺼움이 느껴지는 구절입니다.
온갖 고통을 감수하며 나라와 민족을 위해 투쟁하고 희생한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지는 구절입니다.
이런 마음의 시인님은 어떤 성정(性情)을 가진 분이었을까요?
시인님 사망 10여 년 후인 1956년에 쓰인, 시인님이 어떤 인물인지에 대해, 박훈산 님이 쓴 글을 읽어봅니다.
치열한 정신을 안으로 감추고
놀라우리만큼 자기의 자랑을 스스로 지키면서
칼날 같은 시대에 칼날을 맞세우고 살아간 분
- ▷「원전 주해 이육사 시선집」(박현수 지음)에 실린 박훈산 글 '항쟁의 시인 - 육사의 시와 생애' 중에서
'자기의 자랑'은 꽉 찬 자부심이겠지요?
누가 물어도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일제의 탄압에 굴하지 않던 떳떳한 정신과 올곧은 행동 말입니다.
이렇게 마지막 시 '꽃'을 남기고 차가운 감옥에서 마지막 숨을 몰아쉬었을 이육사 시인님을 생각합니다.
그렇게 40세라는 짧은 생애를 마친 그는 '꽃'을 피우지 못한 걸까요?
생전에 17번이나 감옥생활을 하고, 대구교도소 수인번호 264를 자신의 이름으로 삼아 '칼날 같은 시대에 칼날을 맞세우고' 살다 간 치열한 투사이자 시인 이육사!
1944년 1월 16일에 운명한 후 1년 반 후인 1945년 8월 15일, 조국은 그가 시에서 말한 대로 '꽃성(城)'이 되었습니다.
그 꽃은 시인님의 붉은 피와 푸른 정신을 자양분으로 피어난 꽃이 아니겠는지요?
그러면 그 꽃은 바로 시인님 아니겠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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