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 시인님의 시 '여승'을 만납니다. 언젠가 스쳐간 인연이 떠오르는 시, 마음이 애틋해지고 또 따뜻해지는 시입니다. 함께 읽으며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백석 시 '여승' 읽기
여승
- 백석(1912~1995, 평북 정주)
여승(女僧)은 합장(合掌)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녯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佛經)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平安道)의 어늬 산(山) 깊은 금덤판
나는 파리한 여인(女人)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女人)은 나어린 딸아이를 따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 년(十年)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산(山)꿩도 설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산(山)절의 마당귀에 여인(女人)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 「정본 백석 시집」(백석 지음, 고형진 엮음, 문학동네, 2007년 1쇄, 2019년 32쇄) 중에서
2.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백석 시인님의 시 '여승'은 1936년 발간된 시집 「사슴」에 실려 세상에 나온 시입니다.
이 시는 시의 화자가 여자 스님(비구니)을 만난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연이 있었을까요?
여승(女僧)은 합장(合掌)하고 절을 했다 /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녯날같이 늙었다 / 나는 불경(佛經)처럼 서러워졌다
- 백석 시 '여승' 중에서
어느 날 어떤 여승과 마주쳤네요. 그 여승이 '합장하고 절을 했다'라는 구절에서 우리는 시의 화자와 여승이 서로 안면이 있는 사이라는 느낌을 받습니다. 첫 구절로 보아 여승이 먼저 시의 화자를 알아보았다는 것도 알 수 있네요.
그 '여승'에게서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라고 하네요. 가지취(참취나물)는 쌉쓰레한 맛과 향이 나는 산나물입니다. 알 듯 모를 듯한 냄새인데, 이 담백한 식물성 냄새는 정갈하고 단정한 여승의 이미지를 우리 코앞에서 느낄 수 있게 해 주네요.
백석 시인님은 ‘정갈한 노친네’의 냄새를 이렇게 비유한 적이 있습니다.
거리에서는 모밀내가 났다 / 부처를 위하는 정갈한 노친네의 내음새 같은 모밀내가 났다
- 백석 시 '북신(北新)' 중에서
'정갈한 노친네의 내음새'를 모밀(메밀) 냄새로 비유했네요. 여승에게서는 가지취의 내음새가 난다고 하고요. 시인님은 가지취나 모밀 같은 주변의 흔한 사물에서 보석 같은 미감을 찾아내 시 속으로 데려왔네요.
'녯날같이 늙었다'. 오랜 시간의 파도에 일렁이다 옛날처럼 낡고 흐려진 얼굴입니다. 이 구절로 보아 우리는 시의 화자가 예전에 여승이라는 이 인물을 만난 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때도 여승의 신분이었는지 아니면 세속의 아낙이었는지 아직 우리는 모르지만요.
'나는 불경처럼 서러워졌다'. 여기서 우리는 무언가 심상찮은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네요. 왜 불경처럼 서러워졌다고 할까? 두 사람은 무슨 관계일까? 마음속에서 이런 질문이 이어집니다.
그런데요, 시인님은 불경소리나 목탁소리를 이처럼 서러움의 상징으로 시에 등장시키곤 합니다.
어데서 서러웁게 목탁(木鐸)을 뚜드리는 집이 있다
- 백석 시 '미명계' 중에서
중생의 무명을 밝혀달라는 이 소리는 언제 들어도 애절함과 간절함, 서러움이 느껴집니다.
시의 화자는 왜 이렇게 서러워할까요?
평안도(平安道)의 어늬 산(山) 깊은 금덤판 / 나는 파리한 여인(女人)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女人)은 나어린 딸아이를 따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 백석 시 '여승' 중에서
이 여승을 처음 만난 곳이 '금덤판'이었네요. 시의 화자는 평안도 산골 금광 마을에서 여인을 만났다고 합니다. '파리한'. 몸이 여위고 온몸에 핏기가 없는 가난한 여인이네요. 그 '여인에게서 옥수수를 샀다'라고 합니다. 그 후 어쩌다 이 여인은 여승이 되었을까요?
'금덤판'은 '금점(金廛)판'을 말하는데, 주로 수공업 방식으로 작업하던 금광의 일터를 말합니다. 이 시가 쓰인 1930년대는 일제가 운영하던 금광에 젊은이들이 일확천금을 꿈꾸며 몰리던 때였습니다. '금전판'을 사전에 찾아보니 예문으로 이런 문장들이 이어집니다. '금전판이란 데는 첩경 사람 버리기 쉬운 데다', '덕쇠는 순갑이가 금전판으로 품을 팔려고 첫새벽에 나왔다가 허탕을 치고 ···' 그 시절의 분위기를 알 수 있는 문장들이네요.
그런데요, 그 여인이 '딸아이를 따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라고 합니다. 딸아이가 배가 고프다고 울었을까요? 아이를 때렸다고 하네요. 그러면서 자신도 울었다고 하네요. 이렇게 아이를 데리고 옥수수 행상을 해야 하는 자신의 운명이 비참하고 서러워서 그랬겠지요.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라는 구절에서 여인이 가을밤에 홀로 우는, 모든 것이 쇠락하는 쓸쓸한 가을밤에 홀로 우는 한 마리 귀뚜라미인 것만 같습니다.
바로 이때 시의 화자는 가만있지 않았겠네요. '가을밤같이 차게' 우는 여인을 그냥 두고 어찌 옥수수만 사서 훌쩍 떠날 수 있었겠는지요? 따뜻한 말, 따뜻한 마음을 전했을 것입니다. 아마 주머니에 있던 동전을 우는 아이에게 주며 울음을 달래주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이 여인이 화자의 가슴 한편에, 화자도 이 연인의 가슴 한켠에 오래 남아 있었겠지요.
3.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 년(十年)이 갔다 /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 백석 시 '여승' 중에서
그렇게 옥수수를 사며 처음 만났던 여인을 앞의 1연에서 여승으로 다시 만났습니다. 이 3연은 화자를 재회한 여승이 털어놓은 서러운 사연입니다.
'섶벌'. 나무섶에 벌집을 짓고 꿀을 찾아 밖으로 다니는 벌을 말합니다. 여인이 옥수수 행상을 해야 했던 그때도 그 이후로도 지아비는 섶벌처럼 어디론가 나가 돌아오지 않았다고 하네요. 돈 벌어서 오마 했던 지아비는 어떤 사연으로 돌아오지 못했을까요?
그리고 어린 딸에 대한 안부를 이렇게 전하며 여승은 화자 앞에서 울었을 것만 같습니다. '그렇게 도라지꽃을 좋아하더니 그만 도라지꽃이 핀 돌무덤으로 가고 말았답니다.'
이 얼마나 서럽고 서러운 일인지요?
산(山)꿩도 설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 산(山)절의 마당귀에 여인(女人)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 백석 시 '여승' 중에서
지아비도 잃고 딸도 잃고 희망과 꿈마저 잃어버린 여인이 선택한 것은 한 많은 속세를 떠나는 것이었네요. 여인이 그 긴 머리를 자르고 스님이 되던 날, 머리카락(머리오리)과 눈물방울이 같이 뚝뚝 떨어지는 모습이 눈앞에 훤히 보이는 것만 같습니다. 기구한 여인의 운명에 그 '슬픈 날' 산꿩도 서럽게 울었다고 합니다. 애틋하고 애틋한 장면이네요.
이 여인의 험난한 삶을 떠올리며 1연을 다시 읽어봅니다.
여승(女僧)은 합장(合掌)하고 절을 했다 /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녯날같이 늙었다 / 나는 불경(佛經)처럼 서러워졌다
- 백석 시 '여승' 중에서
'불경처럼 서러워졌다'라는 그 마음이 우리에게 전해져 오는 것만 같습니다. 우연히 만난 한 사람에게 이토록 깊은 연민과 동정을 보내는 시인님의 마음이 되어봅니다. 사람을 향한 이 마음, 얼마나 따듯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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