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규 시인님의 시 '통도사 홍매'를 만납니다. 통도사 홍매에 대한 시를 읽는데 부모님이 자꾸만 생각나는 시입니다. 함께 읽으며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박진규 시 '통도사 홍매' 읽기
통도사 홍매
- 박진규(1963년~ , 부산)
300살도 더 된 노거사가 똥을 누고 있는 중이다
얼마나 오래 참았다 하는 일인지
차가운 땅바닥 거머쥐고 잔뜩 힘을 주고 있다
가끔 헛기침을 하는지 가지들이 흔들리고
그때마다 몇 닢씩 하늘 붉게 물들었다
대체 무얼 공양하셨는지 그 냄새 코를 찌르는데
필시 솔바람과 소낙비와 달빛의 소화다
가까이 가 색깔 살펴보니 속도 정정하시다
안심이다 당신 큰일 보는 일이
이즈음 제일의 관심사인 줄 아는지 모르는지
몰려든 탐매객 아랑곳없이 크응 힘을 주고 있다
나도 곁을 어정거리며 두어 시간 용써주고 왔다
- 박진규 시집 「문탠로드를 빠져나오며」(신생, 2016년 1쇄, 2017년 2쇄) 중에서
2. '300살도 더 된 노거사가 똥을 누고 있는 중이다'
오늘 만나는 시 '통도사 홍매'는 경남 양산시 통도사에 있는 매화나무를 소재로 한 시네요.
통도사는 신라 선덕여왕 15년(646년)에 율사 자장 스님이 창건한 천년 고찰입니다. 이 절집에 영각(影閣)이라는 건물이 있는데 그 앞에 오래된 매화나무가 한 그루 서 있습니다.
매화나무에 이름도 있어요. 절을 지은 스님 이름을 따 '자장매(慈臧梅)'라 합니다. 수령이 300년을 훌쩍 넘긴 노거수입니다.
빗방울이네도 자장매를 여러 번 만났습니다.
자장매 가지에 꽃이 피면 겨울의 사람들은 봄이 왔다고 여기니, 자장매의 개화는 얼마나 반가운 일인지요.
300살도 더 된 노거사가 똥을 누고 있는 중이다 / 얼마나 오래 참았다 하는 일인지
차가운 땅바닥 거머쥐고 잔뜩 힘을 주고 있다
- 박진규 시 '통도사 홍매' 중에서
그 자장매가 꽃망울을 터뜨렸네요. 얼마나 아름다울까요? 그런데 왜 시의 화자는 노거사(자장매)가 '응가'를 누는 중이라고 했을까요? 자장매를 보다가, 또 보다가 화자는 자장매에 몰입된 나머지 거의 자장매가 된 상태인 것 같습니다.
그렇게 자장매가 되어 본 적이 있는지요?
자장매로 치환된 화자는 자장매의 개화가 어떤 '밀어냄'이라는 생각이 들었을까요? 자신의 내부에 응축된 어떤 에너지/덩어리를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배출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 도달한 걸까요?
가끔 헛기침을 하는지 가지들이 흔들리고 / 그때마다 몇 닢씩 하늘 붉게 물들었다
- 박진규 시 '통도사 홍매' 중에서
'헛기침'. 예전에 시골에서는 어르신들이 밖에 있는 변소에서 큰일을 보실 때 '가끔 헛기침을' 하시곤 하는 걸 들었습니다. 이 안에 사람 있으니 급하더라도 기다리시오. 그 헛기침에는 그런 뜻이 들어있었지요.
그런 장면이 이 구절과 오버랩되면서 그 틈새로 빗방울이네는 불쑥 아버님 생각이 나네요. 그러면서 이 노거수 자장매와 아버님이 서서히 겹쳐 보이기 시작하고요.
대체 무얼 공양하셨는지 그 냄새 코를 찌르는데 / 필시 솔바람과 소낙비와 달빛의 소화다
- 박진규 시 '통도사 홍매' 중에서
바람을 마주하고 서서 바람에 실려오는 자장매의 향기를 음미합니다. 수시로 바뀌는 바람의 방향을 가늠해서 향기의 줄기를 찾아 나서기도 하면서요.
그 향기는 무엇이 발효된 것일까요? 자장매가 된 화자의 말이니 '필시 솔바람과 소낙비와 달빛의 소화'가 아니겠는지요? 같은 '솔바람과 소낙비와 달빛'이라도 아무나 소화해서 이런 향기가 날까요? 자장매 고유의 향기는 이들 요소들이 자장매라는 특별한 내부를 거쳐서 밖으로 배출되는 향기이겠습니다.
그 향기를 맡다 보면 그대도 늙으신 부모님이 생각날지도 모릅니다. 빗방울이네도 그렇네요. 70대 후반이 되면서 '큰일' 보는 것이 일과의 큰 숙제였던 아버님이 이 시에 나오는 노거수인 것만 같습니다. 일 년에 한 번 꽃을 피우기 위해 '차가운 땅바닥 거머쥐고 잔뜩 힘을 주고' 있는 이 자장매 말입니다.
3. '당신 큰일 보는 일이 이즈음 제일의 관심사'
가까이 가 색깔 살펴보니 속도 정정하시다 / 안심이다 당신 큰일 보는 일이
이즈음 제일의 관심사인 줄 아는지 모르는지 / 몰려든 탐매객 아랑곳없이 크응 힘을 주고 있다
- 박진규 시 '통도사 홍매' 중에서
자장매 개화 시기에는 탐매객들이 자장매를 빙 둘러싸고 진을 칩니다. 대형 카메라를 자장매에게 들이대고 연방 카메라 셔터를 눌러댑니다. 자장매가 300살이 넘은 노거수여서 카메라 플래시 터뜨리는 것을 금지해야 할 정도로 탐매객들의 사랑은 특별합니다. 자장매는 그렇게 '몰려든 탐매객 아랑곳없이 크응 힘을 주고 있다'라고 하네요.
'당신 큰일 보는 일이 이즈음 제일의 관심사'. 온 식구들이 다 '당신 큰일 보는 일'에 신경이 집중되어 있었던 시간이 있었습니다. 섬유질 음식에 유산균 음료, 수분 섭취 같은 팁들을 총동원하고서는 "오늘 아침 아버님 '큰일'은 어떠셨나?"가 서로의 인사였던 시간이 있었습니다.
나도 곁을 어정거리며 두어 시간 용써주고 왔다
- 박진규 시 '통도사 홍매' 중에서
화자도 그런 어르신이 떠올랐을까요? '큰일'로 힘들어하시는 어르신 곁에서 그렇게 용을 써주었을까요? '우리 아가, 응가~ ' 하면서 어린 화자의 곁에서 용을 써주셨을 어르신요. 아기 때 그렇게 용써주셨으니 이제 늙으셔서 그 용을 받으시네요.
누구에게라도 이렇게 '곁을 어정거리며' 함께 용을 써주면 얼마나 좋을까요? 아기든, 자장매든, 부모님이든, 누구에게라도요. 그렇게 용써준다는 건 함께 꽃을 피운다는 거니까요. 사랑이라는 꽃요.
봄이 오는 길목, 자장매가 한창 용을 쓰고 있는 중이겠네요. '곁을 어정거리며' 용써주러 조만간 자장매에게 가보아야겠네요. 그런 시간은 얼마나 마음 간질간질한 시간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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