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지우 시인님의 시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를 만납니다. 시인님은 이 시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요? 함께 읽으며 마음을 씻으며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황지우 시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읽기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 황지우
영화(映畫)가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일제히 일어나 애국가를 경청한다
삼천리 화려 강산의
을숙도에서 일정한 군(群)을 이루며
갈대 숲을 이륙하는 흰 새떼들이
자기들끼리 끼룩거리면서
자기들끼리 낄낄대면서
일렬 이열 삼렬 횡대로 자기들의 세상을
이 세상에서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간다
우리도 우리들끼리
낄낄대면서
깔죽대면서
우리의 대열을 이루며
한 세상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하는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로
각자 자기 자리에 앉는다
주저앉는다
- 황지우 시집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문학과지성사, 1983년) 중에서
황지우 시인님은 1952년 전남 해남 출신으로 198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연혁'이 입선하고, 「문학과지성」에 '대답없는 날들을 위하여' 등을 발표하며 문단에 데뷔했습니다.
1983년 첫 시집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를 낸 것을 비롯, 시집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 「나는 너다」 「게눈 속의 연꽃」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있을 거다」 등을, 희곡 「오월의 신부」, 산문집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호」 등을 냈습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을 역임했으며, 김수영문학상 현대문학상 소월시문학상 백석문학상 등을 수상했습니다.
2. 영화 보려면 애국가를 경청해야 했다
황지우 시인님은 1980년대 민주화시대를 살아온 시인입니다.
황지우의 시는 그가 매일 보고, 듣는 사실들,
그리고 만나 토론하고 헤어지는 사람들에 대한 시적 보고서이다...
그의 다양한 형식의 보고서들은 삶의 다양성을 그대로 보여 주면서,
그것들을 해석하는 해석자의 세계관을 은연중에 노출시킨다.
- 황지우 시집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에 대한 김현 평론가의 해설 중에서
시인님의 시는 시인님이 매일 보고 듣는 사실들에 대한 보고서라고 합니다. 시인님은 영화관에서는 어떤 장면을 만났을까요?
영화(映畫)가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 일제히 일어나 애국가를 경청한다
- 황지우 시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중에서
이 시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는 시인님의 첫 시집 제목이 되었습니다. 첫 시집은 1983년 시인님 31세 때 나왔습니다. 그 당시는 이렇게 영화관에서 영화가 시작되기 전 애국가를 경청해야 했습니다. 그것도 자리에서 '일제히 일어나' 말입니다.
그런데요, 그렇게 일상화된 장면에 들어가 있으면 우리의 뇌도 거기에 익숙해져 '아, 그런가 보다' 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일 때도 많습니다.
시인님은 그때 애국가를 경청하면서 시상이 떠올랐네요. 첫 두 줄을 통해 시인님은 우리에게 무언가를 말하려고 벼르고 있네요.
삼천리 화려 강산의 / 을숙도에서 일정한 군(群)을 이루며 / 갈대 숲을 이륙하는 흰 새떼들이
- 황지우 시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중에서
애국가 영상은 화려합니다. 우리나라의 방방곡곡 좋은 모습만 보여줍니다. 첨단산업 현장, 화려한 도시의 웅장한 건물들, 수려한 자연풍광들요. 우리 이렇게 잘 살고 있다, 이렇게 발전하고 있다, 영상은 이렇게 자랑하면서 우리에게 자부심을 불어넣어 주고 안심시켜 주려는 것만 같습니다.
그 애국가 영상 속에 철새도래지로 유명한 부산 을숙도의 새떼들도 있었네요.
3. 자기들 세상을 떼어 메고 날아가는 새떼들
「황지우 문학앨범」(웅진출판)에 따르면, 황지우 시인님은 1973년 서울대 철학과(미학 전공) 재학시절 유신반대 시위에 연루, 구속되어 강제 입영됩니다. 1980년에는 광주 민주화 항쟁에 가담한 혐의로 구속되고, 1981년 같은 사유로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제적되어 서강대학교 대학원 철학과에 입학합니다.
그런 억압의 시간을 살았던 시인님에게 갈대밭을 박차고 날아오르는 새떼들이 어떻게 보였을까요?
자기들끼리 끼룩거리면서 / 자기들끼리 낄낄대면서
일렬 이열 삼렬 횡대로 자기들의 세상을
이 세상에서 떼어 메고 /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간다
- 황지우 시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중에서
이 시의 중심부입니다. 새들은 끼룩끼룩하면서 날았다고 합니다. 그 모양이 꼭 지상의 존재들을 비웃는 것만 같이 보이네요. '자기들끼리 낄낄대면서'.
억압적 통치체제의 시대, 시적 자아에게 새들은 폭력과 위선, 억압과 굴종의 땅을 비웃으며 자기들만의 세상을 똑 떼어 메고 어디론가 날아가는 것처럼 보였네요.
우리도 우리들끼리 / 낄낄대면서 / 깔죽대면서
우리의 대열을 이루며 / 한 세상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 황지우 시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중에서
시적 자아도 그랬으면 좋겠다고 하네요. 새들처럼 이 땅을 떠나 어디론가 훨훨 날아가고 싶다고요. 이 땅을 내려다보며 낄낄대면서요.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 하는데 대한 사람 대한으로 / 길이 보전하세로
각자 자기 자리에 앉는다 / 주저앉는다
- 황지우 시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중에서
자유로운 삶을 억압하는 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무력하게 살아가야만 하는 자신에 대한 냉소와 체념이 진하게 느껴지네요.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시 제목을 다시 음미해봅니다. 이 땅에서는 평화롭게 살기 힘들어 새들도 이 세상을 뜨는구나,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이렇게 탄식하고 있는 것만 같네요.
이렇게 시인님은 끊임없이 현실을 직시하고 있습니다. 일상에서 빚어지는 부조리와 억압의 구조를 우리에게 환기시켜 주려는 시인님의 쉰 목소리가 옆에서 들리는 것만 같습니다.
지금 우리 괜찮은 건지요?
글 읽고 마음목욕하는 블로그 '독서목욕'에서 시대의 억압을 환기시켜 주는 시 한 편 더 읽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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