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 시인님의 시 '흰밤'을 만납니다. 저 멀리 떨어져 은은히 빛나는 달과 나와의 관계를 생각하게 하는 시입니다. 함께 읽으며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백석 시 '흰밤' 읽기
힌밤
- 백석(1912~1995, 평북 정주)
녯성(城)의 돌담에 달이 올랐다
묵은 초가집웅에 박이
또 하나 달같이 하이얗게 빛난다
언젠가 마을에서 수절과부 하나가 목을 매여 죽은 밤도 이러한 밤이었다
▷ 백석 시집 「사슴」(1936년 초판 복원본, 도서출판 소와다리, 2016년) 중에서
2. '흰밤'이 풍기는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
백석 시인님의 시 '흰밤'은 1935년 12월 「조광」을 통해 처음 발표된 시입니다. 1936년 시집 「사슴」이 발간되기 전에 발표된 10여 편의 시 가운데 하나입니다.
우선, 제목 '흰밤'(원문에는 '힌밤')이 예사롭지 않네요.
밤은 어두운 시간인데, '희다'는 것이 도대체 밤과 어울리겠는지요? 이런 '흰밤'이라면 편히 잠도 자지 못할 것 같고요, 약간은 으스스한 기분이 들기도 할 것 같네요.
'녯성(城)의 돌담에 달이 올랐다'
옛성(녯성)이라면, 성채는 무너지고 돌담만 남아있는, 쓸쓸하고 허무한 느낌을 주는 공간이네요.
그런 '녯성의 돌담에 달이 올랐다'라고 합니다. 이 시의 제목이 '흰밤'이니까, 옛성의 낡은 돌담에 떠오른 달이 환하게 마을을 비추고 있는 밤이네요. 달밤인데 그냥 달밤이 아니라 아주 밝은 달밤, 하얀 밤입니다.
'묵은 초가집웅에 박이 / 또 하나 달같이 하이얗게 빛난다'
'묵은 초가집웅(지붕)'은 아직 새 볏짚으로 갈지 않은 지붕입니다. 조만간 추수를 하고 나면 그 볏짚으로 이엉을 엮어 지붕을 새롭게 단장하겠지요. 그러기 전의 '묵은 초가집웅'은 오래되어 낡은 지붕입니다.
'묵은 초가집웅에 박이'. '박'은 호박 모양의 둥글고 커다란 열매입니다. 속을 먹고 껍데기는 말려서 바가지를 만듭니다. 그렇게 둥그런 박 하나가 '또 하나 달같이 하이얗게 빛난다'라고 하네요. 우윳빛 박이 달빛에 반사되어 '하이얗게' 빛나고 있습니다.
'묵은 초가지붕에'는 첫 행의 '녯성의 돌담에'와 함께 오래되어 낡은 이미지의 공간입니다. 그런 공간의 환한 달밤은 뭐랄까요, 아름답기는 할 텐데 쓸쓸하고 으스스한 아름다움이라고 할까요?
3. 달은 인간의 감정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요?
'언젠가 마을에서 수절과부 하나가 목을 매여 죽은 밤도 이러한 밤이었다'
앞의 2행에 등장하는 '묵은 초가집웅에 박이'이라는 구절에서 우리는 이 시의 시간이 가을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박은 가을에 둥글게 영그니까요.
가을날의 달밤입니다. 가을밤, 그냥 가을의 달밤이 아니라 하이얗게 빛나는 '흰밤'입니다.
이러한 '흰밤'에 '언젠가 마을에 수절과부 하나가 목을 매여' 죽었다고 하네요.
시인님은 달이 하이얗게 빛나는 밤과 수절과부의 자살을 무심한 듯 시 속에 툭 던져놓으셨네요. 과연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요?
'lunar'라는 형용사는 '달의'라는 뜻이고, 달의 운행을 따르는 '음력'은 'lunar calender'라고 합니다. '광기(狂氣)'를 'lunacy'라 하는 걸 보면, 달과 광기는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 걸까요? 보름달이 뜨면 사람이 늑대로 변한다는 모티브로 된 영화도 많습니다.
지구 주위를 공전하는 달의 인력(引力)은 바닷물 높이에도 영향을 줍니다. 밀물과 썰물은 달의 힘입니다. 그래서 사람도 달의 힘에 영향을 받게 되는 것일까요?
'수절과부 하나가 목을 매여 죽은 밤'. 돌담과 지붕이 있는 달밤 풍경에 뒤따라 등장한 이 구절에서 우리는 문득 달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달이 우리에게 멀리 동떨어져 있기만 하는 낯선 행성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존재라는 생각 말입니다.
'수절과부'. 죽은 남편과의 사랑을 지키며 홀로 살아가는 슬픈 운명의 여인입니다. 그 정절(貞節)을 지키고 사는 여인이라는 것을 외부에 알리기 위해 하얀 옷을 입고 삽니다.
가을밤입니다. 만물이 결실의 시간을 지나 상실의 길로 가고 있는 시간입니다. 우리도 자연의 일부여서 가을의 시간을 타고 외롭고 쓸쓸하여 쇠락과 소멸, 존재의 유한성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또한 우리는 자연이라서 우리의 신체나 감정은 휘영청 밝은 달의 힘에 딸려가거나 밀려나기도 하는 걸까요?
가을밤이라도 달이 휘영청 밝은 가을밤입니다. '흰밤'입니다. 이런 밤은 예사로운 밤이 아닙니다. 그런 '흰밤'에 수절과부는 평생 흰옷을 입고 홀로 쓸쓸히 외로이 살아가야 할 자신의 기구한 운명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을까요?
'흰밤'. 이 4행짜리 짧은 시는 우리와 자연은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서로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받는 하나라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만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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