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응 시인님의 동요 '감자꽃'을 만납니다.
천천히 음미하다 보면 자꾸 나의 내면을 바라보게 되는 동요입니다.
함께 읽으며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권태응 동요 '감자꽃' 읽기
감자꽃
권태응(1918~1951년, 충북 충주)
자주 꽃 핀 건 자주 감자,
파보나 마나 자주 감자.
하얀 꽃 핀 건 하얀 감자
파보나 마나 하얀 감자.
▷「권태응 전집」(도종환·김제곤·김이구·이안 엮음, 창비, 2018년) 중에서.
권태응 시인님(1918~1951년)은 충북 충주 출신으로 해방기에 활동한 동시인입니다.
일본 와세다대학 유학 중 '독서회 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1938년)되어 형무소에 갇혔습니다.
폐결핵으로 풀려난 시인님은 1944년 고향에 돌아와 요양하며 창작활동을 하다 1951년 34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1948년 발행한 동요집 「감자꽃」이 있습니다.
1968년 시인님 고향 충주 탄금대공원에 동요 '감자꽃' 노래비가 세워졌으며, 1997년부터 해마다 시인님을 기리는 권태응문학제가 열리고 있습니다.
2. 자연의 신비 속에 시인이 숨겨둔 뜻은?
권태응 시인님의 대표 동요 '감자꽃'은 1948년 월간 잡지 「소학생」(55호)에 발표된 작품입니다.
시인님 30세 즈음이네요.
시인님은 지금 시 속에서 감자꽃이 피어있는 감자밭에 있네요.
감자는 6월 즈음에 엷은 자주색 또는 하얀색 꽃을 피웁니다.
시인님이 보고 있는 감자밭의 감자꽃 중에도 자주색과 하얀색이 있었나 봅니다.
감자꽃을 피우고 있는 감자나무('감자알'과 구분하기 위해 편의상 '감자나무'라 칭함)는 땅속에 감자알을 한창 키우고 있겠네요.
그렇게 땅속에서 굵어진, 우리가 먹는 동그란 감자를 '덩이줄기(tuber)'라고 합니다.
감자나무 아래 땅속에 있는 줄기 끝이 양분을 저장하여 점점 뚱뚱해진 땅속줄기를 우리는 감자(덩이줄기)라고 하는 거네요.
그러니까 감자알은 감자나무의 땅속 '뿌리'에 달리는 것이 아니라 땅속 '줄기'에 달리는 거고요.
'자주 꽃 핀 건 자주 감자 / 파보나 마나 자주 감자
하얀 꽃 핀 건 하얀 감자 / 파보나 마나 하얀 감자'
시인님은 꽃만 봐도 다 알 수 있다고 합니다.
꽃 색깔만 봐도 지금 땅속에 어떤 색깔의 감자알이 달려있는지 다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자주 꽃 핀 감자나무의 땅속줄기에는 자주색 감자알이 달렸다 하고요, 하얀 꽃 핀 감자나무의 땅속줄기에는 하얀색 감자알이 달렸다고 합니다.
그건 안 봐도 다 알 수 있다고 하네요.
'파보나 마나'
뻔하다고 하네요. 꽃 색깔로 땅속 감자알 색깔을 금방 알 수 있다고요.
'안 파보아도'라고 하지 않고 '파보나 마나'라고 했네요.
그렇게 말하는 톤에서 다소 으스대는 느낌이 전해져 옵니다. 확신에 찬 목소리요.
누군가 '네 말 맞는지 땅을 한번 파봐?'라고 반문했을까요? 그래서 시인님은 '파보나 마나 뻔해!'라고 대꾸하는 상황인 것도 같고요.
정말로요, 자주 꽃 감자나무의 땅속에는 자주색 감자가 달리는 일은 얼마나 신비로운 일인지요?
또 하얀 꽃 감자나무의 땅속에는 하얀 감자가 달리는 일도 얼마나 신기한 일인지요?
하얀 감자만 보아온 이들에게는 세상에 이렇게 자주색 감자가 존재한다는 사실도 흥미롭기만 하겠습니다.
이렇게 시인님은 동요를 통해서 우리에게, 특히 아이들에게 신비로운 과학 지식을 자연스럽게 알려주고 있네요.
이 흥미로운 감자꽃 진실을 알게 된 도시 아이들의 반짝이는 눈망울이 보이는 것만 같네요.
'자주 꽃'
특히 이 동요에서 '자주색 꽃'이라고 하지 않고 '자주 꽃'이라고 딱 적시한 점도 눈길을 끕니다.
그래서 '자주'란 시어가 도드라져 보이게 됐네요.
흔히 볼 수 있는 하얀색 감자 대신 잘 볼 수 없는 자주색 감자를 굳이 앞쪽인 1연에 내세운 점도 예사로 보이지 않네요.
시인님이 일부러 그런 건 아닐까요?
시인님은 짧은 생애 속에서 일제 강점기와 해방, 남북 분단과 한국전쟁이라는 역사의 격동기를 오롯이 살았습니다.
이 동요가 쓰인 시간은 우리나라가 해방 후 38선을 기준으로 남북으로 갈라지고 미국과 소련이라는 외세(外勢)에 휘둘리던 때였네요.
'자주 꽃' '자주 감자' '자주 감자'
이렇게 1연에서 '자주'가 세 번이나 등장합니다.
그래서 자주색의 '자주(紫朱)'에 '자주(自主)'를 겹쳐 놓은 느낌이 물씬 나네요.
'남의 보호나 간섭을 받지 않고 자기 일을 스스로 처리한다'라는 뜻인 '자주(自主)' 말입니다.
격동기의 혼란 속에서 무엇보다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자주적으로 사는 일이 중요하다는 시인님의 생각이 겹쳐 있는 동요인 것만 같습니다.
이렇게 신비로운 동요 '감자꽃'에는 또 어떤 의미가 겹쳐 있을까요?
3. 감자꽃이 감자알 색깔을 숨길 수 없듯 우리가 숨길 수 없는 것은?
시를 만나러 가는 길을 여러 갈래일 것입니다.
'독서목욕'의 또 다른 오솔길을 따라 동요 '감자꽃'을 만나 봅니다.
빗방울이네는 권태응 시인님의 동요 '감자꽃'을 읽고 이 문장이 떠올랐습니다.
'정신은 외면에 나타나는 법이다'
- 「백경」(허먼 멜빌 지음, 현영민 옮김, 신원) 중에서
소설 「백경」(모비딕)의 주인공 이스마엘이 작살잡이 퀴퀘그와 지내면서 느낀 감정을 표현한 문장입니다.
퀴퀘그는 흉측한 외모의 야만족이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스마엘은 퀴퀘그의 순수한 내면을 발견하게 됩니다.
위 문장의 원문은 이렇습니다.
'You cannot hide the soul'
정신은 숨길 수 없다고 합니다. 정신은 밖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다고 하네요. 아무리 흉측한 외모를 하고 있어도 퀴퀘그의 순수한 정신은 감출 수 없다고요.
우리는 얼마나 저마다의 정신을 잘 감출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요?
남들은 나의 내면을 잘 모를 거야. 그러면서 우리는 얼마나 좋은 옷이나 장신구, 얼굴 표정, 말, 행동 같은 겉모습으로 내면을 감출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그러나 그런 것으로는 자신의 내면을 숨길 수 없다고 하네요. 다 드러난다고 하네요. 이렇게요.
'자주 꽃 핀 건 자주 감자 / 파보나 마나 자주 감자
하얀 꽃 핀 건 하얀 감자 / 파보나 마나 하얀 감자'
꽃이 밖으로 드러난 외모라면 감자알은 내면의 정신이겠네요.
감자알(내면)의 색깔은 외면(꽃)으로 다 드러난다는 말은 얼마나 신비로운 말인지요?
성철 스님의 문장도 떠오르네요. 스님이 방문객들에게 붓글씨로 써주셨다는 문장입니다.
'不欺自心(불기자심)'
이 문장의 뜻은 '자신의 마음을 속이지 말라' 또는 '자신의 마음을 속일 수 없다'일 것입니다.
오늘은 뒤의 '자신의 마음을 속일 수 없다'라는 풀이에 눈길이 가네요.
'자주 꽃 핀 건 자주 감자 / 파보나 마나 자주 감자
하얀 꽃 핀 건 하얀 감자 / 파보나 마나 하얀 감자'
자주 감자알인데 하얀 꽃을 피울 수는 없는 일입니다.
어떻게 땅속 감자알이 꽃 색깔을 숨길 수 있겠는지요?
어떻게 자신의 내면의 색깔을 속일 수 있겠는지요?
그러니 어찌해야겠는지요?
내면을 잘 가꾸며 살아가는 수밖에요.
외면을 꾸민다고 내면을 숨길 수 없다는, 시인님이 전해주신 '감자꽃' 진리를 경외하며 다만 착하게 살아가는 수밖에요.
이렇게 동요 '감자꽃'은 소중한 의미를 간직한 보물 같은 동요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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