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집 「어디쯤, 살아가는 중입니다」를 만나 봅니다.
'독서목욕'이 천천히 음미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추천하는 좋은 수필집입니다.
이 수필집의 저자 이원자 시인님은 소도시에서 농사를 지으며 고요히 살아가는 시인입니다.
글을 보면 얼마나 소박하고 다정한 분, 무엇보다 자연과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분인 줄 잘 알겠습니다.
꾸밈이 없어 배움이 많은 글, 함께 읽으며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서로 순환하며 섞이는 일에 대하여
소한과 대한이 지나는 추위 속에서 이원자 시인님이 봄농사를 위해 미리 밭에 넣는 거름은 이런 것들입니다.
밭에서 나온 거부지기, 부엽토, 만들어 놓은 나뭇재, 깻묵, 소금기를 뺀 멸치젖국 찌꺼기, 해초, 발표제를 뿌린 음식물 찌꺼기···.
흙을 기름지게 하려고 거름을 넣으며 시인님은 이렇게 적었네요.
흙도 보통 미식가가 아니어서 아주 천천히 조금씩 먹는데 혀에 착착 감길 정도가 되어야 받아들인다.
흙이 받아들인 건 또다시 작물의 몸을 이룬다.
서로 관계없이 사는 것 같지만 만물은 이처럼 자기도 모르게 서로 순환하며 섞인다.
어느 육신이 어느 몸으로 화하게 될지 모른다.
이 모든 게 내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일이니 나도 결국은 섞이는 일이다.
▷이원자 수필집 「어디쯤, 살아가는 중입니다」(빛남 출판, 2024년) 중에서.
흙은 입맛이 까다롭고 예민한 미식가라는 표현에 이르려면 우리는 얼마나 흙과 가까워져야 할까요?
시인님은 스스로 흙이 되어버린 것만 같네요.
흙이 거름을 '먹는다'는 관찰도 참으로 낮고 깊은 눈의 마음이 아니면 닿을 수 없는 일이겠습니다.
그러면서 시인님은 생각합니다.
부엽토나 나뭇재, 음식물 찌꺼기가 흙에 섞여 기름진 흙이 되고요,
그 흙의 양분을 먹고 겨울초가 되고 쪽파와 마늘이 되고요,
그 겨울초와 쪽파와 마늘을 먹고 내 피와 살이 되고요.
'나도 결국은 섞이는 일이다'
시인님도 그렇게 '결국은' 흙에 섞여 흙의 양분이 되고 겨울초가 되고 쪽파와 마늘이 된다고 합니다.
'결국은' 섞인다는 성찰은 얼마나 우리를 환하게 해 주는지!
농사짓는 시인의 눈으로 보기에 이렇게 이 세상은 하나의 생명으로 이어진 것이네요.
앞으로 겨울초나 쪽파나 마늘을 만나면 인사해야겠어요!
- 미래의 나여, 오늘의 나에게로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2. 감자의 마음까지 다 아는 따뜻한 시인님!
이원자 시인님의 감자 심는 장면은 이렇습니다. 한 어절씩 천천히 음미해 봅니다.
그동안 흘끔흘끔 눈길을 주고 있긴 했는데 부엌 한쪽에서는 감자가 빨리 밭으로 보내 달라고 난리다.
도저히 더 두고 볼 수가 없어 감자를 데리고 밭으로 간다.
아니, 내가 감자를 따라나선다.
감자는 씨눈을 잘라 심어야 하는 것을 나는 늘 싹이 난 걸 씨눈 자르듯 해서 묻어준다.
언제 또 다녀갈지 모르는 꽃샘추위 때문에 싹까지 완전히 덮고 토닥토닥 잠을 더 재웠다.
▷이원자 수필집 「어디쯤, 살아가는 중입니다」(빛남 출판, 2024년) 중에서.
시인님과 감자의 관계는 부모와 자식 사이인 것만 같네요.
봄에 심으려고, 겨울 동안 부엌 한쪽에 씨감자를 두었나 봅니다.
봄소식이 오고 날이 풀리니까 그 감자, 몸이 근질근질했나 봅니다.
'빨리 밭으로 보내 달라'라고, 감자의 몸이 근질근질한 것을 시인님은 어떻게 알았을까요?
그건 감자가 되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겠습니다.
감자의 몸이 되어보지 않으면 감자의 마음이 되어보지 않으면 모를 일이겠습니다.
그래서 '감자를 데리고 밭으로 간다'라고 하네요. '들고'가 아니라 '데리고'요.
그렇게 써놓고 가만히 생각한 시인님은 이렇게 썼네요.
'아니, 내가 감자를 따라나선다'
밭으로 가고자 하는 감자의 성화가 얼마나 대단한 지, 고스란히 느껴지는 문장이네요.
꽃샘추위 이겨내라고 씨눈을 심지 않고 싹을 조금 틔워 감자를 심는 시인님의 따뜻한 마음에 이르면 우리도 다정한 시인님의 감자가 되고 싶은 마음이 드네요.
참 따뜻한 시인님!
3. 특별하고, 또한 특별하지 않는 나에 대하여
초봄, 이원자 시인님의 밭 풍경 속으로 들어가 봅니다.
엉겅퀴 미나리 쑥부쟁이 참나물 곰취 방풍나물 원추리 등 모두 제 자리를 알리며 일어섰다.
누구나 주체적으로 특별하면서도 아무도 상대적으로 특별하지 않다.
이 명확한 질서로 자연은 완전함에 이른다.
납작 엎드렸던 금전호 달맞이꽃 방가지똥 뽀리뱅이 잎에 초록 생기가 돈다.
각자 다른 모습이 서로 연결되며 리듬을 탄다.
▷이원자 수필집 「어디쯤, 살아가는 중입니다」(빛남 출판, 2024년) 중에서.
이 수필집에는 이보다 많은, 셀 수 없는 식물과 동물이 등장합니다.
그 이름과 '성격'을 일일이 다 알게 되기까지 시인님은 얼마나 많이 그 무수한 생명들과 대화하며 지냈을까요?
그 생명들과 알콩달콩 지내면서 시인님은 우리네 삶을 성찰합니다.
'누구나 주체적으로 특별하면서도 아무도 상대적으로 특별하지 않다'라는 것을요.
저 들판의 수많은 생명들처럼 오로지 우리는 저마다 특별함을 발하며 살아가는 빛나는 존재라는 것을요.
죽음을 앞둔 호스티스 병동의 환자들은 '타인의 시선에 맞추어 살았던 시간들이 가장 후회가 된다'라고 합니다.
시인님은 말하네요.
남과 비교하지 않고, 남을 이기려 경쟁하지 않고, 자신을 과시하지 않고, 자신을 비관하지 않고, 조화롭게 살아가는 들판의 생명들을 보라고요.
4. 어느 '뭉근한 된장국' 경전에 대하여
이원자 시인님이 사철 끓여낸다는 이 된장국, 정말 궁금하네요.
사철 뭉근한 된장국이 우리 가계의 젖줄처럼 이어진다.
윗대부터 흘러온 것이 지금 내 부엌을 지나고 있다.
봄에는 봄나물, 여름에는 고구마순, 가을에는 배춧잎이나 무청 등 철 따라 나는 온갖 것이 된장국으로 들어가 우리 몸속을 관통한다.
나물과 된장이 만나 풀어내는 된장국은 성경 말씀이나 불교의 게송만큼이나 부드럽고 심오하게 우리 영혼을 담당한다.
▷이원자 수필집 「어디쯤, 살아가는 중입니다」(빛남 출판, 2024년) 중에서.
이 집의 '뭉근한 된장국'은 한 권의 '경전(經典)'인 것만 같습니다.
봄나물 고구마순 배춧잎 무청 ···. 철 따라 몸을 바꾸는 생명들이 불러주는 말씀들!
소박하고 부드럽고 '뭉근한 된장국'이 불러주는 자연의 숨은 뜻들!
생명을 사랑하며 자연에 나를 일치시키며 배우고 성장하는 삶, 대지에 배를 밀며 농밀하게 살아가는 삶이어야 들리는 말씀들 말입니다.
이 책 속의 문장들, 그 '뭉근한 된장국'이 불러주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그 '말씀'들은 페이지마다 불쑥 불쑥 우리에게 묻는 것만 같습니다.
'지금 어디쯤 살아가는 중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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